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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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심상 2007 4월

2007.03.31 18:05

오연희 조회 수:250 추천:49

시작노트


인천공항이 가까워오자 익숙한 땅내음으로 가슴이 풋풋했다.
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야 할 내 땅이구나!
이민의 세월이 길어질수록 한국음식, 한국문화, 한국풍경, 한국사람..
한국과 관련된 것들이 온통 더 좋다.
국제미아가 된 기분이 들때마다 내 언어를 더 힘껏 붙든다.
나를 놓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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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오연희


미국에 첫발을 내 디뎠던 그날
시골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직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은 한 나라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상상도 못했던 시차(時差) 였다
내 머리의 반쪽이 어긋나게 붙어 있는 기분
멀미가 났다
-울엄마는요. 기차를 타도 멀미하고요 버스를 타도 멀미하고요
뱅기를 타도 멀미하고요…걸어다녀도 멀미해요- 에 화르르 웃었던 기억
‘시차멀미’ 하나 더해졌다
서부.중부.동부의 시차 한국과의 시차 몇 해 살았던 영국과의 시차까지
‘따로 또 하나’인 세상에 적응하느라 늘 멀미가 났다
영어와 한국어의 뉘앙스차이로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으로 일어나는 멀미
‘따로’ 쪽으로 기울어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멀미가 난다
나를 꼭 붙드는 내가 아프다
마지막 순간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달려가지 못 하고
종내는 숨을 거둔, 사랑하는 사람들
몸은 여기 마음은 거기 그 출렁이는 바다를 생각하면 멀미가 난다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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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오연희


신은 둘의 등 어디쯤 점을 찍었다

너의 심장소리는 나의 우주
우리가 뜨겁게 포옹할 때
하늘의 큰손도 우리를 껴안았다
그 품에 안겨 죽어도 좋아
살아있음의 기쁨이 그 안에 있었다

열정의 나날은 쉬 가고
어느새 우린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아, 비로소 보인다
열정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너의 등에 점점이 박혀있었구나!

쳐진 어깨에 손을 얹고
굽은 등 감싸 안으면
심장이 서로의 점에 닿아
신이 점을 찍던 아득한 그 길까지
함께 할 수 있어
그럴 수 있어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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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사이에/오연희


밭고랑처럼 골이 진 기와와 기와사이
이름 모를 초록식물 돋아 있다
몸을 내릴 곳이 어디 흙 뿐이랴
뿌리, 줄기, 잎 한 몸으로 얽혀
허공을 젓는 저 푸른 몸짓
집안의 훈기와
하늘의 정기가 만나는 골에
풋풋한 평화
소복하다

내 마음의 골진 자리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짙은 어둠 속에서
부시럭 부시럭 일어서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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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오연희

생일은 붉은색, 지불마감일은 파란색,
이런저런 사연은 검은색
새해 다짐과 함께 쓰여진 기록들은 색깔 구분이 분명하고
모양새가 반듯하다
달이 더할수록 색도 모양도 제멋대로
삐져 나온 글자, 비스듬히 쓰여진 약속시간,
구석구석 혼란스러운 메모들
돌아보면 나름대로 빛나던 날들이
공평하게 배당 받은 하루 속에서
숨 쉬고 있다

그 어디쯤
한 달에 두어 번 암호처럼 은밀히 눈짓하는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질 때 더 잘 보이는 음력숫자
한번도 본적이 없는 조상님 조차 의미가 되어
어스름한 달빛 헤집고 나온다
왜 해마다 생일이 바뀌냐는 아이들의 투정이
전설처럼 남을지도 모르는,
뿌연 달빛처럼 기억될 그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
달빛 받고 태어난 세대는 점점 사라져 가고
태양처럼 빛나는 생명들 붉게 인치는
다이어리는 계속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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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솥/오연희


친정집 뒷마당 한 구석에
초라한 몰골의 밥솥 하나, 쪼그리고 앉아 있다
빙 둘러 붙어있던 걸치개는 부서져나가고
몸통만 덩그렇게 남은

저 알몸 속에서
부슬부슬 익어가던 구수한 살 내
벌떡벌떡 숨을 몰아 쉬던 입술
가슴을 열면 이팝꽃 눈부시던
풋풋한 한 시절 있었다

불더미에 얹혀서도 성급히 타오르지 않던
뭉근한 기력을 다한,
퍼주고 또 퍼주고
긁히고 긁혀 얇아진 바닥

탄탄하던 몸
봉긋 펼쳐져 날아갈 것만 같던 치마자락
그 윤기 흐르던 처음도
거친 마지막도
훌훌 털어버린, 허방 속에
햇빛과 바람
온종일 소슬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