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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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토실토실 한국에서

2004.08.28 05:15

오연희 조회 수:437 추천:46



<img src="http://myhome.mijumunhak.com/Gbuilder/home/ytboard/download.php?id=data2&page=1&sn1=&gmcode=13&gscode=36&sn=off&ss=on&sc=on&no=4&filenum=1&Key_no=101">

<pre>토실토실 밤토실 2003년 한국에서 </pre>


양심의 소리

딸은 틴에이저의 앳된 이미지를 벗고 제법 성인티가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운전하면서 두 번의 대형 교통사고를 냈기 때문에 차를 몰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고등학교 이학년 때 운전을 시작한 딸은 일년 동안 별 사고 없이 차분하게 운전을 해왔다. 그러기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운전하는 딸의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올 즈음이라 이미 가을 학기에 진학할 대학도 정해진 상태여서 참으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대학가서 공부하기에 벅찰듯한 한 과목을 미리 해 놓고 싶다는 딸과 함께 가까운 커뮤니티 칼리지에 등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프리웨이를 신나게 달리던 딸은 우리가 나가야 될 출구 몇 코스 전에 미리미리 차선을 바꿔 맨 오른쪽 차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차선을 달리고 있던 한 차가 갑자기 신호도 넣지 않고 세 개의 차선을 가로질러 딸의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아마도 그 뛰어든 차는 일차선을 달리던 중 자신이 내려야 될 곳의 사인판을 보고 놀라 맨 오른쪽 차선으로 급하게 진입하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급박한 상황을 알아차린 딸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만 딸 차가 앞차를 들이박고 말았다. 그 충돌로 앞차는 왼편 뒤쪽이 부서지고 딸차는 에어백이 터지면서 차의 앞쪽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 프리웨이를 빠르게 달려오는 차들 사이에 사고 난 두 차가 막고 있으니 사람들이 내려서 차를 옆으로 밀어내야 된다고 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당황한 우린 그들이 하는 대로 보고만 있었다.

신호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끼어 들었던 차주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무도 죄스러워 하는 차주를 보니 딱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린 당연히 그 사람의 잘못으로 알고 별 생각 없이 보험회사에 사고 경위를 보고만 하고 끝냈다. 그런데 며칠 후 어이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끼어 든 그 차주가 돌아서자마자 변호사를 사서는 그냥 자신들이 맨 오른쪽 차선을 드라이브 하고 있는데 딸의 차가 와서 들이박았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변호사를 찾아서 맞고소를 했지만 사고가 나면 대체로 뒷차 책임이라는 일반론에 어긋남이 없이 51대 49로 패하고 말았다.

상대차가 끼어 든 것을 증명할 길도 없고 엄밀히 따지면 우리차가 앞차와의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론이 성립되는 상황이었으니 가슴 아리지만 사노라면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겠거니 위로하면서 잊기로 했다. 하지만 상대 차주의 진실하지 못한 마음을 생각하노라면 벌떡벌떡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세월 속에 그때의 그 속상했던 순간도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 며칠 전 딸이 다시 사고를 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딸이 신호를 넣지 않고 다른 차 앞에 끼어 드는 바람에 충돌사고가 난 것이다. 처음에 딸은 지난번 일도 있고 하니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뒤에서 박은 차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뒷차 잘못이라고 그리 단호하게 주장하던 딸이 하루가 지나자 얼굴에 그 당당함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 와서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며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딸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그만 지고 만 것이 분명했다. 보험회사에서 사고경위를 조사하기 위하여 사고 리포트를 전화상으로 녹음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모두가 자기 잘못이라고 고백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만 우울증에 빠져버렸다.

나는 솔직히 딸의 고백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거짓말 했다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기 보다는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딸의 손을 잡았다. 당시 우린 기러기 가족으로 주재원으로 미국 왔다가 근무기한을 끝내고 귀국한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현아…세상 살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 앞에 서게 되는데 그나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가장 쉬운 거야. 돈 걱정은 하지 마라! 부자는 아니지만 오른 보험료 낼 형편은 돼…그리고 정말 힘드는 일은 돈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그런 일이야…” 나의 위로에 딸은 어느 정도 우울한 마음이 걷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린 피해의식에서 완전히 헤어나지는 못했다. “변호사를 쓰라”는 주위 분들의 권고의 말을 들을 때면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다시 거짓말을 해야 되는 것은 더 괴로운 일임을 뻔히 아는지라 그만 두었다.

그러나 딸의 심정을 백분 이해하고 기특해 하면서도 약지 못한 딸에게 괜히 짜증이 났다. 나는 도대체 딸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걸까?




내가 뭐랬냐?

아들은 입학할 대학을 결정한 후 맞게 된 방학이라 참으로 홀가분한 기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친척들을 일일이 찾아 뵙고 사촌들 혹은 친구들과 여행도 하면서 신나게 잘 지낸다고 소식을 보내왔다. 한국방문 한달간이 너무 짧다며 그리도 아쉬워하던 아들이 드디어 미국으로 돌아오는 날이다. 나는 딸과 함께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한다는 아들을 마중 나가기 위해 서둘렀다. 간신히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으려니 아들이 건강미가 넘치는 거무튀튀한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왔다. 그런데 혼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웬 예쁜 여자애랑 눈길을 맞추며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무척 궁금해 하면서도 이해심 많은 엄마인척 하느라고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짜식! 지 아빠랑은 딴판이네..” 속으로 생각하면서 슬쩍 누구냐는 몸짓을 했다.

사연인즉, 인천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아들 옆 자리에 앉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공항직원한테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와 딸은 어리벙했지만 두 녀석의 하는 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눈에 척 봐도 내 아들보다는 여러모로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얘! 쟤 여간내기 아닌거 같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마디 했다간 괜히 구닥다리 엄마소리 들을까 봐 침을 꿀꺽 삼켰다.

하여튼 11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한잠도 안자고 그 여자애랑 수다도 떨고 카드놀이도 하면서 지겹잖게 왔다고 하는걸 보니 아들녀석도 그 여자애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눈치다. 그 여자애는 한국에서 옷 샤핑을 많이해서 짐이 많은데 픽엎할 사람이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며 아들에게 사람이 올 때까지 옆에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어쨌든 우린 괘념치 않는다는 듯한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멀찍이 서서 기다려 주었다. 한참 후 그 애를 픽엎할 사람이 오고 나서야 집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온 김에 밖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가면 어떻겠냐고 아들에게 물었더니 공항도착 한시간 전에 비행기안에서 음식을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 음식도 그립고 하니 어디 가까운 멕시코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음식을 먹으면서 아들녀석은 한국생각이 난다며 킥킥대며 웃었다. 가는 집들마다 “너 제일 좋아하는 것(음식)이 뭐니?” “다른 집에선 뭐 만난 것 해주디?” 하고 묻더라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은 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리곤 90세가 되신 할머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손자에게 “배 안고프냐?” 묻곤 열심히 음식을 만드신다. 조금 있다가 잔뜩 차려와서는 “요것 먹어라 조것 먹어라” 정신 없이 권하신다. “아네..먹고 있어요.” 한마디 하면 그것이 또 신통방통 하다면서 호호호 웃으시다가 또 한참 혼자서 중얼거리신다. 어지간히 배가 불러 수저를 놓으면 “넌 왜 요롷게 조금먹냐 ? 애비는 너만할 때 아주 많이 먹었는데…에구.. 요즘 애들은 많이 안 먹어..”  부엌을 왔다갔다 하시면서 어찌나 중얼대시면서 분주하신지 손자는 정신이 없다. 아침 먹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과일을 한 접시 깎아오셔선 “얘! 먹을래?” 하고 물으신다. “아뇨..괜찮아요!” 대답했지만 몇 분도 안돼서 아예 방안으로 과일접시를 쏘옥! 집어넣어 주신다. 할 수 없이 와작와작 한 접시를 비우고 나면 그 다음엔 아예 묻지도 않고 과자를 한 쟁반 담아선 방으로 쑥! 넣어 버린다면서 아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어머님께선 당신이 마흔이 훨씬 넘어서 가진 늦둥이 막내 아들의 막내인 열 일곱살 손자를 몇 년 만에 만나 흥분하셨던 모양이다. 옛날 여성 치고도 유난히 키가 작으신 어머님께선 워낙 연로하신 데다가 얼마 전엔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다치시는 바람에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하시고 계셨다. 더욱 왜소해 지셨을 어머님이 180센티미터가 넘는 장성한 막내 손자녀석을 만나곤 너무 좋으셔서 허리 아픈 것도 잊고 신나게 요리를 하신 모양이다. 뭔가 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는 것이 맛난 것 만들어 손자 입에 넣어주는 것 외에는 없었으리라.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가슴이 미어지면서 와락 그리움이 몰려왔다.

막내 손자가 스무살 안에 장가를 들면 어머님은 막내 증손자까지 안아보실 수도 있겠다는 계산을 해보았다. 그 계산을 하다가 갑자기 아까 공항에서 만났던 그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아들에게 "너 결혼 일찍 할 생각은 없냐? "하고 은근히 물었다. 엄만?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펄쩍 뛴다.
내가 뭐랬냐? 그냥 한번 물어본 것 뿐이데 말이다.









나의 아이들아

기쁨 중에 가장 크고
아픔 중에 가장 깊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속에 있는
나의 아이들아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지우고 싶은 것들
할 수만 있다면
너희들의 생각 속에서
모두 골라내고 싶다

고백컨대 엄마는
아이로 가득찬 어른이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했고
아는 것을 제대로 가르칠 줄 몰랐고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이라는 말
가슴으로 받지 못했다

이제
내 안의 아이도 이 만큼 컸고
내 밖의 아이인 너희도 저 만큼 자랐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거기
여전히
안타까움으로 애가 마르니
너희들은 나에게 진정
무엇일까




안녕하세요?
오연희입니다.
쮸 모모님게서 담담하고 널널하게 하면 된다고 했지만
긴장이 되네요. 몸은 앉아 있지만 마음은 서 있습니다.
오래 전 고원선생님과 공부하던 때가 떠 오릅니다.
자신의 작품을 내놓고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듣고 토론도 하고 고원선생님의 지적도 받고 지도도 받고 … 잠깐 몸 담았었지만 새삼 그립네요.
이땅을 떠나신 분들을 떠 올리다 보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너무 귀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때도 이렇게 내놓은 글에 대한 의견들이 아주 활발했지요. 누구 글인지 모르도록 이름을 안 밝히고 내 놓았기 때문에 더 편안하게 다른 사람 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또한 단점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글을 내놓은 분들이 엄청 깨지곤 했지요. 강심장 아니면 힘들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아무튼 오늘 좀 살살 마음껏 깨주시기 바랍니다.

전 사실 요즘 글을 거의 못 썼습니다. 2007년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열심히 썼습니다. 세 주에 한번 중앙일보 교육섹션에 칼럼을 쓰면서도 수필도 시도 꾸준히 썼거든요.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거야…글다운 글도 써 보지 못했으면서 나의 때는 지나 갔다는 듯 핑계 아닌 핑계로 소홀했던 글쓰기 다시 한번 불을 지피고 싶다는 생각이 오늘 부쩍 드네요. 고맙습니다.

오늘은 우리 아이들에 관한 글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글을 가지고 온 이유 중에 몇 가지로 들자면
작가의 나이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주제의 영역’이 ‘삶의 관심사’가 ‘그것을 바라보는 눈’ 이 변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서구요.
두 번째는 첫번째 이유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만 어쩌면 이젠 더 이상 애들 관련 글을 쓰기가 힘들 것 같아서요. 아이들이 크니까 디게 조심스럽더라구요.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자식 키우는 입장에 선 사람들의 공감대 형성이 그런대로 쉬웠던 시기를 지나왔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번쩍 드는 거에요. 그 후부터 애들 관련 글은 되도록 쓰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좀더 나이가 들면 또 다시 자녀들 이야기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쉬워질 것도 같아요. 그때는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고 그런….좀더 폭 넓고 깊은 인생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부족한 저의 작품을 읽겠습니다. 일요일저녁에 사이트에 올렸으니까 글을 못 읽으신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아요.
첫작품은 ‘딸은’ 으로
두번째 작품은 ‘아들은’으로 시작했습니다.
둘 다 대학을 앞둔 비슷한 시점의 한 에피소드를 담았습니다.

작품 읽은 후

딸에 대한 글 ‘양심의 소리’를 읽고 보니까 그때 그 사고후의 일들이 떠 올랐습니다. 전 그 사고로 어깨와 뒷목이 아파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때 저희가족이 샌디에고 살았는데 물리치료를 해도 별 차도가 없어서 두시간 드라이브해서 친구가 소개한 라팔마에 있는 박성은내과 였던가 그곳까지 주사 맞으러 다녔었으니까요. 치료 받다가 영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몇 달이 흐른 후 어느날 박성은 닥터께서 이멜을 보내왔습니다. 변호사가 병원비를 안 주고 있으니 조치를 해달라고…변호사가 파머스보험사로부터 분명히 돈을 타갔는데 병원에 돈을 안 주는거였어요. 할 수 없이 수를 썼지요.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이 사고건에 대해 경비지불 처리가 잘되고 있지 않다고 편지를 써서는 파머스보험사와 CC로 변호사한테도 함께 보냈지요. 병원에 돈을 안 게워낸 것에 대한 은근한 시위였지요. 물론 금방 해결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 일 해결하기까지 시간 많이 걸렸어요. 양심적인 변호사도 많은데 전 좀 아닌 분을 만났던 것 같아요.
아 참 딸은요. 차는 물론 폐차 되었구요. 그렇게 큰 사고를 내놓고 다음날아침  “엄마차 좀 쓰면 안돼?” 이러는거 있죠? 하여튼 애들은 겁이 없어요. 전 사고한번 나면 몇 달 동안 앞차와의 거리가 조금만 가까워져도 으아악! 하는데…
두 번의 사고 모두 우리보험사쪽에서 몽땅 물어주고 보험료 엄청 올라가고…그랬습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양심선언 하고 발 뻗고 자는 쪽을 택할 것 같아요. 속상하기는 하겠지만…

두 번째 작품은 지금 읽어보니까 꼭 꽁트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정말 내가 “너 결혼 일찍 할 생각 없냐?” 그런 웃기는 말을 했을까…그런 생각도 들거든요. 그때는 참 진지 했는데..왜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요. 시어머니를 많이 사랑해서라고 하기에도 지나친 것 같고
글을 좀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이런 말을 썼을까. 그렇다면 제가 아마도 ‘꽁트’ 라고 했을 거에요. 그런 작품이 저한테 있거든요. ‘러미지세일’이라는 글인데 사실을 근거로 했지만 내용이 좀 가벼워 좋게 말하면 재미있어 끝마무리에 무게를 실으려고 상상을 집어넣었거든요. 그래서 꽁트로 했는데 이작품은 그렇게 하지 않은걸 보니까 사실일 것 같아요.

사이트에 글을 올리면서 오늘 정기모임 광고를 보니까
‘두분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과 더불어 문학에 접근하는 방식과 태도, 자신만의 창작 비법등을 소개해 주시는 기회를 갖게 되십니다.’ 라고 해놓았네요.
제 수필과 시는 내용 속에 배경이 대충 나와있으니까 넘어가도 될 것 같고..
그래도 질문 있으시면 해 주시고…깨주시고…
문학에 접근하는 방식과 태도 창작비법…이건 쉽지 않네요.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세월 10년이 그리 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쓸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기도 쓰고 편지도 쓰고(보내지는 않지만…) 댓글도 남기고…가벼운 글은 늘 가까이 하고 있지만 주제를 놓고 쓰다가 그 글을 완성시키는 단계까지는 ‘작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멍석이 깔리면 해이해 졌던 마음이 조금 당겨지긴 하지만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데 까지 가는 것은 결국 ‘다른 작가의 글 속에 담긴 가치를 캐내는 즐거움(읽는 일)과 내 생각을 심는 즐거움(쓰는 일) 없이는 힘들겠지요.
저는 발표할 만한 비법은 별로 없습니다. 이 책을 첨부터 끝까지 이렇게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읽으면서 구구절절 맞아 맞아, 했지만 정말 제 스스로 흡족할 만한 글은 없습니다. 늘 배우는 자세로 다른 분들의 글을 읽습니다.


저에 대한 평가를 제가 하는 것은 좀 웃기는 일이지만
저는 어려운 시나 수필은 잘 못쓰는 것 같아요. 겸손한 마음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간혹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들의 글을 대할 때는 그 작가만의 심오한 세계가 담겨 있겠지 내가 실력이 안 돼서지 그렇게 생각 합니다. 제가 전혀 모르는 부지기수의 다른 장르의 학문을 생각하면 제가 아는 것이 빙산에 일각도 안 되는 것일 테니까요. 문학이라는 장르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 되요.
다른 분들이 뻑 가는 책과 제가 좋아하는 책의 취향이 얼마나 다른지 그걸 생각하면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수용하고 인정하는 마음을 가져야겠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끔 쓰 먹는 옌데 쉬운 노래하나를 만들기 위해 가수는 수없이 많은 쉽지 않은 날을 보내야 한다는 가수 조용필씨의 말을 전 종종 생각합니다. 쉽고도 의미가 깊은 글을 쓰고 싶은 소망 저도 품어봅니다.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거의 6개월간의 퇴고 시간을 갖는다는 어느 수필가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저 정말 뜨끔했습니다. 얼렁뚱땅 발표해놓고 가슴 친 일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한참 후에 보면 거슬리는 부분이 어쩜 그리 눈에 잘 들어오던지 퇴고의 중요성을 거듭 느끼게 됩니다.

글 쓴 연륜이 오래됐다고 해서 글을 잘쓴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꾸준히 열정적으로 써 왔다면 잘쓸 확율이 높긴 하지만 꼭 그런것 같지도 않구요.
글을 쓰기 시작한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분 중에 종종 저 끼를 지금까지 어떻게 누르고 살았나 싶을 만큼 번뜩이는 글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글마루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 보면서 그런 느낌 많이 받습니다.
처음처럼, 아 이거 소주광고 문군가?
저도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아무튼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때의 설렘과 열정과 겸손한 마음 그런 것들을 잊지 않고 문단생활을 해야겠다 거듭 저에게 다짐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