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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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인디에나에서-윈터헤븐 소설 보관

2004.08.12 13:11

오연희 조회 수:743 추천:44




몸은 피곤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지만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밤이에요

보다 만 드라마를 연장으로 보는 것

정신적인 쉼을 얻기 위한 방법을 찾았어요.

지난 두 달간 절망감에 쓰라렸고

지난 며칠 간 집안일에 매달렸어요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음식 만들고 집안 정리하고

돌아가고 나면 다시 꺼집어 낼 물건들을

이곳저곳 쑤셔넣으며.

손님 올 때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구나 싶네요

초대한 손님들 다 돌아가고

자정이 다 되 눈꺼풀은 내려앉는데

잠자리에 들고 싶지 않은 주일 밤이네요.

오늘 또 이렇게 가네요

부활의 아침을 위해

오늘을 고해야 겠어요

안녕....


2018.1.7 일요일

미주에 있는 한국신문 LA 판에도 곗돈 떼먹고 줄행랑 친 계주 이야기가 심심찮게 기사화 되곤 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수시로 터지는 계주 줄행랑 기사를 보고도 계로 돈을 불리려는 사람들은 도무지 무슨 베짱일까. 남의 돈을 끌어 모아 제 배를 채우는 계주는  '불쌍한 인생... 미국까지 와서...' 혀를 끌끌 차는 심정이 된다. 좋게 말해서 그런것이지 솔직히 털어놓자면 같은 민족 등쳐 먹은 계주는 '사깃꾼' 계원은 '쉽게 몫돈 거머쥐려는 욕심' 에서 일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도 아찔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자 마자 살았던 아파트는 남편이 다니는 회사 사택이었다. 남편의 직위에 따라 여자들의 직위가 달라지기도 하는 사택의 특성 때문인지 남편의 직위가 비슷한 여자들끼리 어울리는 것을 서로들 편해 했다. 나의 남편은 대학졸업 전에 입사가 결정되었고 회사에서도 이런저런 운이 겹쳐 또래 새댁들 남편들에 비해 승진이 빨랐다. 나는 윗층에 사는 서대리 와이프와 친하게 지냈다. 서대리의 딸 이름은 은영이고 나의 딸은 민영이, 나이도 같고 이름도 자매 같아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은영엄마는 만날수록 정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은영엄마는 얼굴은 예쁘지 않았지만 유난히 매끄럽고 고운 음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 당시 라디오 방송극 성우로 이름을 날리던 ‘고은정’ 을 은영엄마의 애칭으로 불렀다. 착착 감기는 목소리로 “올라 올래요? 김치찌개랑 밥 같이 먹어요…” 하면 사랑의 고백을 듣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는데 그녀의 촉촉한 음성이 너무 달콤해 ‘여자는 얼굴보다 목소리야!’ 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샤핑도 반상회도 애들 유아원도 늘 은영엄마와 함께했는데 그녀와 삼사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서로의 사정을 알게되고 자연스럽게 돈 거래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저 시장 가서 깜빡 하고 돈을 안가지고 왔을 때 서로 빌렸다가 곧 갚는 정도였으니 사실 ‘돈 거래’ 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액수였다. 남편들은 서로 다른 부서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저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여자들이 정답게 지내니까 서로 호감어린 마음으로 대했고 점차 남자들까지 편안한 관계로 발전 했다. 은영네 가족과 함께 1박 2일 캠핑을 다녀 온적도 있다. 은영이네는 우리부부하고도 잘 지냈지만 우리보다 훨씬 먼저 사택에 들어와 살던 서병준 이라는 사람과도 친했다. 은영 아빠랑 충청도 어디에 있는 지역의 본이 같은 서씨라고 했다. 서병준은 은영 아빠보다 일곱살이 많은 서른아홉 살이었는데 직위는 은영 아빠랑 같은 대리였다.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한 나의 남편에 비하면 모두 늦은 편이다.

서병준은 삼년 전에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고 일년 전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했다고 했다. 서병준보다 두 살 연상이라는 재혼한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은영엄마를 통해서 였다. 서병준의 아내는 오다가다 마주쳤을지는 모르겠지만 서병준의 아내로 알고 본적은 없다. 하지만 서병준의 아내가 수시로 은영이네에 갖다 준다는 오징어, 멸치, 명태, 김 등등…질 좋은 건어물은 몇 번 얻어 먹었다. 정이 철철 넘칠 것 같은 서병준의 아내라는 사람이 가끔 궁금하긴 했다. 은영 엄마가 준 짭짤한 것들을 얻어 먹으며 인심 좋은 이웃이 있어 ‘은영 엄마는 좋겠다’ 부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사택은 열 평에서 열 여덟 평으로 모두 고만고만하게 절약하며 알뜰살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받는 돈이 조금 더 많든 혹은 적든 규모 있게 살지 않으면 쉽게 구멍이 나게 되는 월급쟁이라 ‘흥청망청’이라는 말은 사전 속의 단어로만 알고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 같았다. 한집 건너 어린아이들이 있어 동네는 늘 활기가 넘쳤는데 조그만 아파트에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집도 몇 집 있었다. 여자들은 대기업이니까 사택이 제공되는 이런 혜택을 누리는 거라며 좋은 회사에 다니는 남편 혹은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회사에서는 여름에는 회사 버스로 전 직원 가족이 바다에 나가 휴가를 즐길수 있도록 해 주었고 일년에 한번은 직원 가족들을 초청해 회사견학도 시켜주고 식사도 대접하고 선물도 안겨 주었다.



승진 철이 오면 온갖 말이 더 무성하게 떠 도는 곳이 또한 사택이다. 승진한 사람은 승진한 이유 못한 사람은 또 못한 이유를 딱딱 밝혀내고 들춰내서 말을 만드는 것을 취미로 삼는 여자도 있었다. 사택생활 몇 해 되다 보니 은영아빠는 전문학교를 나왔고 서병준은 고등학교를 나와 생산직에서 출발한 이 회사의 터줏대감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파트는 일반 직원부터 대리까지만 살고 과장이 되면 과장 이상급들이 모여 사는 수준이 조금 낳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어 있었다. 남편의 승진 소식을 접하게 된 나는 이사를 가야 될 가정이 나 말고도 얼마 전에 아들을 낳은 현주네가 있음을 알았다. 현주엄마는 초등학생인 현주와 유치원 다니는 민주가 있지만 현주아빠가 집안의 장손이라서 아들을 꼭 낳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아들을 갖기 위해 별별 짓을 다 한 끝에 결국 목표를 달성한 성공케이스로 온 아파트에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시댁이 엄청난 부자 여서 돈 걱정은 없으며 아들만 낳으면 만사 형통인 집인데 얼마 전에 아들 낳고 이번에 승진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경사가 겹친 집이라고 했다. 현주아빠가 승진이 늦은 것은 대학졸업 후 시댁사업을 돕느라 입사가 늦은 때문이며 현주엄마는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적이어서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나동 동장을 맡고 있었다.



조금 더 낳은 환경을 거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승진을 하면 대부분 저쪽 아파트가 비는대로 곧장 이사를 갔다. 물론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사날짜에 따라 대기기간이 길어지기도 했다. 승진발표가 있기 6개월 전쯤의 일이다. 그날도 은영엄마는 빛깔이 투명한 오징어 몇 마리와 윤기나는 김 반 톳을 가지고 우리집에 왔다. 언제부턴가 은영 엄마는 서병준의 재혼한 아내를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가 준 것인데 좀 먹어보라며 내놓은 그것들은 그 언니의 친정 집이 바닷가 근처 여서 갈 때마다 이렇게 많이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몇 번 그렇게 얻어 먹으면서 ‘목소리가 고운 여자는 재물이 떨어지지 않는다’ 던 어디선가 들은 말이 떠올랐고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은영엄마의 마음이 그녀의 음성처럼 곱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은영엄마가 친정일로 갑자기 돈이 좀 필요한데 이자는 3부로 쳐 줄 테니 오백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당시 은행이자의 배에 가까운 3부 이자가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남자들끼리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또 그 동안 겪어 온 은영엄마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 얼마전 정기적금 부어 찾은 돈 사백만원을 선뜻 빌려 주었다. 아마도 오백만원이 있었으면 다 빌려주었을 것이다. 이자가 제법 쏠쏠했다.  3부 이자, 나는 그 은근한 풍요로움에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사를 한달쯤 앞두고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서병준 부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마흔이나 되는 사람들이 어디 유괴라도 당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아파트 여자들의 돈을 싹싹 끌어 모아 자취를 감췄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런저런 사실들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아파트가 온통 시끌뻑쩍 난리도 아니었다. 친정에서 가져왔다며 인심을 써대던 건어물은 미끼였고 돈을 빌려준 여자들 속에는 은영엄마도 있었고 현주엄마도 있었다. 문제는 은영엄마 현주엄마를 비롯한 몇명의 여자들이 서병준 아내에게 5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풍성한 건어물과 함께 꼬박꼬박 내놓는 이자 맛에 홀려 이웃 돈에 친척 돈까지 끌어다가 갖다 바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5부이자를 받아 3부를 주고 2부를 착복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웃 돈 중에 바로 금쪽 같은 내 돈 사백만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있을만한 곳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곧 소식이 올 것이다. 알고 보니 서병준 아내는 다른 곳에서도 사기를 쳐먹은 경력이 있는 여자다. 지난번 살던 곳에서는 수십 개의 계를 끌어 모아 가지고 야반도주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숨어있는 곳을 알아냈으니까 곧 해결될 것이다.’ 은영엄마의 변명은 계속되었다.



이사 가기 전에 나의 남편이 결단을 내렸다. 그날 저녁 은영이네 집에 가서 차분히 은영이 엄마아빠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솔직히… 우린 서병준의 아내를 본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습니다. 서대리님과 은영엄마를 보고 돈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사정이 딱한 것은 알겠지만 원금은 돌려 주셔야 겠습니다. 물론 한꺼번에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매달 얼마씩 값아 나가도록 계획을 세워주십시오….” 대충 그런 내용의 의견을 제시했고 은영아빠엄마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조를 해 주었다.

돈을 다 받아내기까지의 과정은 다시 떠 올리고 싶지가 않다.



욕심이 화를 불러온 그 사건은 당한 쪽만 억울하게 되었고 그 한참 후까지 두 사람이 잡혔다거나 돈을 되돌려 받았다거나 하는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집 한 채 값을 홀랑 날려먹었다는 현주엄마는 잘 사는 시집덕분에 여전히 건재하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나는 가끔 서병준의 아내는 타고난 사깃꾼이라지만 충실하게 회사생활을 잘 해왔던 서병준은 어떻게 된 걸까. 의아한 생각에 잠기곤 한다. 한국에서의 그 일은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결코 지워지지 않는 한편의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과장이상 간부급이 모여 사는 아파트로 이사한 3년 후 남편이 주재원으로 미국으로 오게 되었고 그 길로 쭉 미국 눌러 살게 되었는데 그럭저럭 캘리포니아에서만 12년째다.  

주재원인 남편이 꼬박꼬박 가져오는 월급으로 살아가는 나는 비교적 편안하게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주재원 생활을 끝낸 남편은 한국 본사소속 주재원이 아니라 한국본사와 관련된 미국법인을 따로 세워 비지니스를 하고 있다. 큰 돈이 생길 일도 별로 없지만 혹 돈이 모이면 적게 먹고 가는 똥 누지 뭐, 그런 심정으로 이자가 정말 쥐꼬리인 미국은행에 넣어놓는 것이 고작이다. 부자 되기는 틀렸을지 모르지만 원금 날릴 염려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사업상 돈이 필요하면 은행을 통해 론을 받아 쓰고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난처한 입장이 된적은 없다.



주재원으로 온 그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집 근처에 있다. 정직한 사람만 교회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신앙이 그렇게 깊은 편이 아닌 나는 교회란 그저 일주일에 한번 주일예배만 드리면 되며 ‘지나친 열심은 말썽의 씨앗’만 될 뿐이라는 남편의 주장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남편과 나의 취미와 특기는 골프다. ‘골프천국에 왔으니 골프나 실컷 치다가 죽기 얼마전쯤부터 죽어서야 간다는 천국 열심히 믿으면 된다’는 남편의 의견에도 동조한다. 전도니 선교니 구제니 봉사니 하면서 설쳐대던 사람들이 교회분쟁의 주동자들로 돌변하는 모습을 몇번 경험한 우리부부는 교회란 깊숙히 들어가면 골치아파진다는것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2부나 3부 예배에 참석하면 하루의 중간이 싹둑 잘려버리니까 아침 일찍 시작하는 1부 예배에 나와 적당히 뒤쪽에 자리 잡고 앉아 좋은 말씀이나 듣고 예배가 끝나면 서둘러 나와 버린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써 최소한의 의무는 다하고 사는 기분이 들어 오후시간이 홀가분하다.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아니 교회에 푹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편이 옳다. 유유상종이라고 우리부부와 비슷한 생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서로를 쉽게 알아 보았다. 함께 의기투합해서 골프도 치고 연휴에는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참 좋은 사람들이다. 주재원으로 왔다가 미국에 눌러앉은 사람들 중에 그만하면 미국정착에 성공한케이스로 꼽는 이성민씨 부부와는 통하는점이 많아 더욱 친한 사이가 되었다. 슬하의 아들과 딸은 척척 명문대에 들어갔고 앞뒤 정원이 공원같은 큰집사서 이사하고 미국회사에 직장도 갖고 사교를 위해 부부가 나란히 춤도 배우고 손님접대를 이유로 그 좋아하는 골프를 일주일에 서너번씩 칠수 있는 행운까지 얻었으니 정말 더 바랄것이 없어보였다.

인물도 좋고 건강미가 넘쳐 얼굴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성민씨가 직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은 골프치자고 몇번이나 연락을 해도 묵묵부답이라 무슨일인가 하여 집을 찾아갔을때에야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건강진단도 해마다 빠지지 않고  받았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수 있냐며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기도한다고 죽을사람이 살까. 함께 어울리는 우리 맴버들의 신앙은 대부분 나와 비슷했다. 주일날 목사님이 이성민씨 수술이 잘되도록 기도부탁 광고를 냈다. 수술대에 오르기 직전 두려움에 싸인 이성민씨가 목사님을 청했던 모양이다. 우리팀중 누군가가 우리도 기도하자는 의견에 적지않은 부담은 느꼈지만 의리상 동참하기로 했다.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1부 예배 그것도 뒷자리에 앉았다가 슬며시 사라지는 우리들이었지만 그래도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니까 모른척 할수는 없었다. 아침잠이 유난히 많은 내가 이부자리를 박차고 새벽기도에 나온다는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적 없는 일이다. 직장암 초기여서인지 아니면 우리의 기도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성민씨는우리의 기도덕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수술이 잘 된 성민씨는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 아, 옛날이여! 그시절로 다시 돌아가자고 아무리 꼬셔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특히 선교부 봉사에 쏟는 성민씨 부부의 열정은 아무도 못말려 결국 나까지 끌고 들어갔다.



박.소.희.

선교부에서 봉사하고 싶다며 자원해서 들어온 박소희는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참여했다. 새벽예배에 나와서 기도도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이고 맛난 간식도 잘 챙겨와 선교부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었다. 선교담당 목사님의 리드로 함께 니카라과 선교를 다녀오면서 좀더 가까와졌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박소희에게 친근한 마음에서 ‘소희씨’ 라고 불렀더니 너무 정겹게 들린다면서 앞으로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박소희는 친교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으면 곁에 다가와 자신의 신상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이 나이에 숨길게 뭐 있냐는 듯이 만날 때마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서울에서 남편이 제법 규모가 있는 통조림 공장을 운영했는데 폭삭 망했다. 남편과 ‘살기 싫어’ 이혼을 했다. 당시 나는 ‘살기 싫어 ’라던 소희의 말에 ‘남편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살기 싫다고 이혼을 하다니…’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빚쟁이 피해서 자기만 도망갔다’ 며 남편을 향한 원망이 그득 담긴 눈빛으로 ‘살기 싫은’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넌지시 비췄다. 남편은 아들을 맡고 자기는 딸을 맡았으며 남편은 재혼을 했고 소희는 딸을 키우며 어렵게 살았다. 마침 초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친구랑 어떻게 연락이 닿게 되었고 자기 오빠가 이혼하고 혼자 살고있는데 어릴 때 서로 좋아 했던 사람들이니 결합하면 어떠냐고 해서 선택의 여지 없이 무작정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친구 오빠인 새 남편은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었고, 어린시절의 추억을 나누며 오랜만에 웃음을 찾았고 그런대로 행복했다. 워낙 큰 아픔을 경험한 뒤라 인생이 그저 소소한 즐거움으로 엮어져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갔다.



일년이 지난 어느날 남편이 술을 잔뜩 먹고 와서는 “차암 염치없네…” 한마디 툭, 던졌다. 뭔가 하긴 해 야지 생각뿐 용기를 못 내고 있었던 차였기 때문에 남편의 말이 그렇게 고깝거나 섭섭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 말이 자극이 되어 소희는 한국마켓이 있는 상가에 조그만 옷 가게를 냈다. 원래 손재주가 남다른데다가 사근사근하고 바지런한 성품의 소희는 한국 옷을 떼다가 팔았는데 옷 수선도 하고 한쪽 구석에다가 한국이불도 갖다 놓고 팔면서 단골손님을 확보 해 나갔다. 나도 여러 번 옷도 사고 수선도 맡기고 이불도 여러 채 샀다. 손님이 붐비면 잠시 다른데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조용하다 싶으면 다시 가서 물건도 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되네…” 흐뭇해서 한마디하면 “한푼 없이 시작해서 빠듯해요.” 남편한테 손 좀 벌였다가 언짢은 소리만 실컷 들었다며 생활비를 점점 줄여가더니 언제부턴가 한푼도 안 준다고 했다. 어쩌다가 아쉬운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영주권 손에 쥐어 줬으면 알아서 해야지….”라는 말로 입을 막았다. 표현이 좀 직설적이어서 그렇지 남편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남편에게도 소희의 딸과 동갑내기 딸이 있었는데 부모의 이혼 후 매사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소희의 딸과 수시로 싸우곤 했는데 어느날은 마약까지 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소희의 딸에게 칼을 들이대며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기겁을 한 소희는 자기 딸을 데리고 방을 얻어 나와 버렸다. 다른 집에 살고 다른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남편과의 사이도 점차 소원해져 갔다. 남편은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소희와의 결합을 위해 술을 끊겠다고 동생에게 다짐을 했기 때문에 그 동안 자제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거의 일년동안이나 참고 살았으니 남편도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던 것 같다.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술만 마시면 돌변했고 손찌검까지 했다. 다시 이혼녀가 되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헤어진 그의 아내도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의 폭행에 못 견뎌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이불과 수선을 겸한 옷 가게는 장사가 잘 되어 경제적으로는 빠르게 안정이 되어 갔다. 이제 도장만 찍으면 혼인 관계가 끝나는데 남편 쪽에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고 그 쪽 친척들은 영주권이 목적 이었다며 소희를 욕해 댄다고 했다.



남편과의 관계가 정리가 되고, 돈이 마련되는 대로 한국의 전남편으로부터 아들을 데려올 예정이라고 했던 소희의 사연을 들으며 주위 사람들은 소희가 너무 좋은 여잔데 왜 저렇게 풍파가 많은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 했다. 튀는 행동을 하거나 사람들을 자극하는 차림을 하거나 거슬리는 말을 하거나 하는 일 없이 수수한 외모에 인심 좋고 사근사근한 소희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했다. 나와 남편 역시 소희에게 도움 주는 것을 즐거워했고 단체로 어디 갈 때는 소희를 먼저 챙겼다.



그러던 어느날 소희 옷가게에 들렀다가 눈이 마주치면 ‘차 한잔 하고 가..’ 하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비디오가게 여자가 나를 보더니 은근한 눈길로 불렀다. 나는 차 얻어 마시는 게 고마워 가끔 과일이나 빵을 들여넣어 주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처럼 ‘차 한잔 하고 가…’의 호감어린 눈길이 아니었다. 단독직입적으로 물었다.

“소희씨한테 돈 빌려준 거 있어…요?” 갑자기 웬 돈타령인가, 싶었다.

“아니…왜…왜요?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무튼 다행이네…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거의 다 걸렸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두주 전 소희가 할 말이 있다며 자기 집에 꼭 좀 들러 달라고 부탁 하던 일이 생각났다. 갑자기 일이 생겨 소희에게 들릴 수 없었기에 못 가서 미안하다고 그런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려고 소희네 옷 가게에 들린 길이었다. 무슨 일인가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 소희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먼저 일 것 같아 얼른 비디오가게를 나와 소희네 가게로 갔다. 소희는 보이지 않고 곱상하게 생긴 수지 아줌마가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소희 가게는 손이 모자랄 만큼 일이 많아져 두 달 전부터 사람을 쓰고 있었다.

“안… 보…이..네요…” 가게 안을 휘 둘러보는 내 눈길을 의식한 수지 아줌마는 소희씨 어디 갔냐고 묻는 뜻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주인 아줌마 요즘 일 안 해요…. 맨날 밖으로 나가고 없어요…일만 하면 되는데….”

자기 주인을 저런 식으로 말 하다니…몹쓸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희한테 조심하라고 해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뭔가 큰일이 난 것이 틀림 없다, 싶어 다시 옆집 비디오가게로 갔다.

“도무지 어떻게 된 거에요?”

“소희씨랑 친한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 말은 안 했지만…일은 안하고 어딜 그렇게 싸 돌아다니는지…이상하다 했지이…” 지이, 에 힘을 주어 길게 빼더니

“정말 전혀 눈치 못 챘어요?  온 상가, 동네, 교회가 발칵 뒤집힌 모양이던데…”



자기집에 꼭 좀 와달라고 했던 그날 돈 이야기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어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 잃고 돈 잃고’ 할 뻔했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문은 날이 갈수록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가게 오는 손님뿐만 아니라 상가에서 장사하는 이웃들한테까지 손을 뻗쳤으며. 연세 드신 할머니 쌈짓돈까지 끌어 모았는데 몇몇 분은 자기 전제산인데 어떡하냐고 소희네 옷 가게 앞에 퍼 질러 앉아 울고 소리지르고 난리가 났다는 소문이 성능 좋은 마이크가 되어 마구 퍼져나갔다.



소희는 한국의 아들을 데려와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는데 그 표정이 얼마나 애절한지 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여지없이 내놓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희의 가게에는 늘 손님이 붐볐기 때문에 약속한 날짜에 돈을 갚을 수 있다는 말에 확신이 느껴졌다고 했다. 정 많은 한국 사람들의 정서상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미의 애타는 심정만큼 호소력 있는 이유는 드물었던 모양이다. 나 역시 소희로 부터 몇 번 사연을 들은 바였고 그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마구 솟구쳤었다. 소희는 장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몇 개의 계 모임을 만들어 돈을 끌어 모았다고 했다. 결국 곗돈 떼먹은 계주로 고소가 들어가고 경찰이 들락거리더니 신문에 기사가 나고, 얼마 후 소희는 옷가게를 정리하고 동네서 사라졌다.



자취를 감춘 후 한참 동안 소희의 스토리는 뼈 속까지 살뜰히 발라내야 직성이 풀리는 게살처럼 여자들의 맛난 수다꺼리였다. 순박한 인상의 소희에게 그렇게 깜찍한 사기성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나와 친분이 깊은 한 이웃도 소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나도 분한 마음이 들었다. 병든 남편 간호하느라 자기 몸도 성한데 없는 그 이웃의 딱한 형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물 건너 간 돈임을 알아차린 그 이웃은 소희에게 돈을 떼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황량하게 헤집어 놓았던 그 사건도 사람들 입에서 점점 뜸해지고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소희라는 여자로 인해 고통받던 사람들은 지금쯤 어떻게 사는지 그 돈이 없어도 살 사람은 다 사는 건지, 가끔 궁금했다. 돈을 떼인 사람들도 딱하지만 어쩌다가 그 지경까지 갔는지 가끔 소희의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정신차리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진심어린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희가 코리아타운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솔솔 들려왔다. ‘사기친 돈 가지고 멀리 도망친 계주’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코리아타운 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 소문을 들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가 연락을 해 왔다. 갑작스런 소희의 전화가 고맙기까지 했다. 코리아타운에서 수선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으며 변함없이 다정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고, 그 말을 들으니까 내가 상당히 착한 사람 같았다. 나 역시 소희에게 돈을 떼인 입장이라면 이야기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때 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본 적도 아니 아예 아는 척도 하지않았다. 소희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까?  신문까지 나고 온통 떠들썩했던 그 일을. 아무튼 또 세월이 지나갔고 불경기가 길어지면서 소희도 많이 어렵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후 '경제적으로 편안한 사람’과 만나고 있다는 소희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나이차이는 좀 있지만 두번 상처를 한 사람인데 깊은상처를 두번이나 안겨준 한국이 싫어 그동안 운영해오던 사업체를 정리해서 미국에 오려고 한다. 두번의 결혼에도 자식은 없고 소개한 사람이 바로 그의 두살터울 누이인데 정말 좋은 사람이며 한달전에 그 누나집에 와 있어 몇번 만났다.지금의 자신의 상황이 너무 힘들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성사가 되면 제일먼저 알리고 싶은 사람이 바로 우리부부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가슴이 쿵쾅거려 숨을 헉, 들이마셨다. 내 직감이 맞다면 만약 사실이라면 그 남자는 15년전 사기치고 줄행랑쳤던 그 여자의 남편 서병준이다. 소희에게 돈이 필요하듯 서병준에게는 영주권이 필요한것 같다. 그럼 그 여자는 죽었다는 말인가?  아닐것이다. 어쩌면 소희가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희가 정말 돈 때문만일까. 하긴 남자 품이 여전히 필요하겠지. 뜨거운 피를 달랠 길이 없겠지. 소희를 빈정대는 말이 목구멍 가득 차 올랐다. 소희의 삶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과 그 남자도 사깃꾼이라고 사깃꾼들끼리 잘해보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으로 내 속은 부글댔다.



전화를 끊고 나서 부터 내 속에 웅크리고 있는 천근같은 쇳덩이가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쳐대는것 같아 결국 소희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금요일 저녁이라 시간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소희도 나에게 모든것을 털어놓고 나서부터 계속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며 선뜻 나오겠다고 했다. 소희와 내가 사는 곳의 중간 지점쯤 되는 P시의 ‘윈터헤븐’ 이라는 카페를 겸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이틀전 전화 왔을 때의 들뜬 느낌과는 다르게 소희의 음성에서는 차분한 평화가 감돌았다.


엄마가 건어물 장사를 해서 근근히 살림을 꾸려갔어요. 공부 잘하는 오빠가 우리집의 긍지고 희망이었지요.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네신용금고에 취직을 했고 내 월급은 고스란히 오빠 학비로 보내졌어요. 아버지는 대학 다니는 아들자랑만 하고 다니셨어요. 등등한 아들가진 아버지는 무시당하는 법이 없었거든요. 어느날 내가 갑자기 장이 꼬여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어요. 난리가 났어요. 딸이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아들 학비조달에 지장이 생긴다는 거 굳이 말 안 해도 알았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섭섭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부모님도 오빠도 나의 존재를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 나이의 처녀들이 누리는 낭만이 부럽지 않았어요. 누군가의 디딤돌이 되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런 내 삶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동생 돈 받아쓰는 오빠 마음이 편하기만 했겠어요?  오빠는 늘 “네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어떻게 있겠니?” 하셨는걸요.  오빠의 그 한마디로 충분했어요. 올케는 심성이 고운 여자였고 우린 흔치 않은 시누올케사이 였지요. 시기를 조금 놓치긴 했지만  공부를 다시 하면 어떻겠냐고 용기를 준 사람도 올케였어요. 덕분에 직장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가게 되었어요. 그 사람의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장 선한 방향으로 몰고 나가는 올케를 보면서 진정으로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았어요.

학교 도서실에서 한 남자를 만났어요. 오빠가 처했던 상황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궁색한 집안의 사람이었어요. 그와의 사귐이 깊어지면서 난 또 한 사람의 디딤돌이 되어줘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졸업 일년을 앞둔 시점에서 일단 내 공부는 미루기로 했어요. 나로 인해 쭉쭉 뻗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기분,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가슴 벅찬 그 뿌듯함 때문에 아쉽다거나 힘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그의 공부가 끝나면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대학을 무사히 마치고 농수산물유통을 취급하는 공기업에 취직을 했고 우린 곧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느라 내 공부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남만큼 살았어요. 남만큼 산다는 것에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에 큰 욕심없이 살면 부러운게 별로 없어지더라구요. 그런데 말이에요. 난 대단한 것 바란 적 한번도 없는데 남편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남편은  회사에서도 공금에 손을 댄 것이 문제가 되어 사퇴했고 시작한 사업체 역시 IMF를 빌미로 돈을 챙겨 사라진 거였어요. 너무 어렵게 성장해서 그런가 싶어 가엾은 마음이 들었어요. 다시 시작하자고, 그를 찾아 다녔어요. 그런데…말이에요….여자가 있더라구요. 그때의 비통한 심정... 말로 다 못해요. 어떠한 언어가 내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엎친데 덮친다는 말…있죠? 그 즈음 오빠에게 건강상 문제가 생겼어요. 아래 눈꺼풀에 사마귀 같은 것이 생겨 무심코 병원에 갔다가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 안 암이라고 했어요. 위암 간암 대장암 폐암 등등….암 종류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듣도 보고 못한 소리였어요. 레이저, 방사선, 냉동치료, 수술 할 수 있는 것 다 해봤어요. 일찍 발견하면 완치율이 90 % 라고 하는데…


나를 디딤돌 삼아 일어선, 내 인생의 기쁨이고 보람이고 행복이었던 두 사람, 한 사람은 죽고 또 한 사람은 나를 배신하고....살아갈 소망, 없었어요. 몇 달을 정신을 놓고 헤매 돌아다녔어요. 초점 없는 내 눈을 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그래요. 미치는 편이 외려 낳았어요. 죽으려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어요. 곧 비워줘야 할 아파트였고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었지요. 눈 딱 감고 뛰어내리면 끝나는 건데… 죽음에 대한 유혹이 얼마나 강하고… 달콤하던지…그래도…내 아이들… 내 아이들…하도 울어 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거에요. 우리 몸 속에는 눈물 보따리가 따로 있나 봐요. 절망, 고통, 비통, 낙망..이런 것들이 마중물이 되어 터져 나오는 피눈물 말이에요. 피가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악악댔지요. 한참 울다가 생각해 보니 나의 억울함을 받아줄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 더 억울했어요. 지금도 믿어지지 않지만 그 기가 막힌 순간에 "하늘은 바라보라고 있는 거야" 어느 집 거실 벽에 걸린 낭만적인 그 싯귀가 떠 오르는 거에요.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는데 내 절망과는 상관없이 하늘은 왜 그렇게 맑은 거에요...어지간히 쏟아낸 것 같은 눈물이 또 쏟아지는 거에요. 또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왔어요. 그런데 눈물때문에 흐릿해진 시야 저 멀리 십자가가 내 앞으로 크로즈엎 되어 다가오는 거에요. 코앞까지 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극한 감정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 인가 했어요.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십자가가 있는 저 곳, 죽기 전에 한번 가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내 발로 평생 처음 교회라는 곳을 걸어 들어 갔고 그날 그곳에서...  잠시 말을 끊더니 비싯 소희는 웃었다.

“관두죠….뭐……다 털어내고 나면 빈털터리가 될 것 같아서…요.”

너무 소중해서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신앙간증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성령의 역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미국 사는 친구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도 그분의 뜻인가 보다 싶어요. 살길을 열어주셔서 감사해요. 캄캄했거든요.”
"아니 그렇게 감사하다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 "

반감이 가득찬 말투가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어요..."
소희는 한참을 바닥만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그렇게 모은 돈...으로 멀리 가서 살지 무슨 마음으로 코리아타운에...피해 입은 사람들 맞딱 뜨릴지도 모르잖아…"
계속 침묵만 지키던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혹시 오래 전에 니카라과 선교 같이 갔던 정목사님 기억하세요?"
"응....그분...건강이 안 좋으셔서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그분은 왜?..."
갑자기 소희의 눈시울이 벌개지면서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분 결국 돌아가셨어요..."
울음이 가득찬 소희의 음성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필이면 저의 오빠처럼 안 암으로....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그렇게 욕을 먹으면서 돈을 끌어댔는데.. 정목사님…유학비자가 만료되어 불법체류자가 되셨어요. 교회에서도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처지가 못되었고...사모님도 워낙 약 체질이었는데 식당 웨츄레스 해서 번 돈으로는 생활비도 안되고… "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남의 딱한 사연을 들을 때면 좀 힘든 모양이구나. 어떻게 해결하고 사나 보다.  부담 질 일이 생길 까봐 은근 슬쩍 비켜서곤 했었다.
"그때 진 빚 지금도 갚아나가고 있어요... 오래 걸리겠지요....제가 돈을 못값게 된 사연을 알게된 분들이 소문을 잘 내줘서 천천히 되는대로 값으라는 분도 계시지만...그래도 전 빨리 값고 싶지요 뭐... 경제적으로 편안한 사람을 보내준 것도 혹시 그분의 도움의 손길인가 싶어....기도해봤는데....아닌 것 같아요. 솔직히 마음이 많이 흔들렸는데… 결정하고 나니까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네요…”

어떠한 적절한 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속에서는 미안해, 고마워, 놀랍구나, 이런 말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그득그득 차 올랐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것… 그게 저의 천성이라 것…억울한  적도 있었지만…인정하기로 했어요. 그게 지나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도 뼈저리게 경험했구요. 그리고….서병준이라는 사람이나 나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만남 치고는 너무 계산이 깔려 있는것 같아요. 거래같다는 생각도 들고...서선생이 돈으로부터는 나를 구해줄지 모르지만 그 외에는 모두 내가 디딤돌이 되어줘야 할 사람 같았어요. 이젠 정말 한사람에게 연연하는 일 정말... 별로네요. 베풀기만 해도 되는 사람들 어떤 반대급부도 바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 보려구요.”

같은 경험을 했다 하여 누구나 소희 같은 깨달음을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 많은 굴곡의 삶 속에서도 꼬이거나 비틀어지지 않은 소희가 대견해 보였다.


" 아...참...서선생을 소개한 서병준의 누이라는  그 여자가 올때마다 건어물을 잔뜩 싸들고 오는데...웬지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고...."



그말을 듣는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 붙는것 같았다.



"소희씨....서병준과 누이라는 그 여자...아무래도 내가 아는사람같아...오래 전 한국살때부터...."





“그래요?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내일 새벽기도 끝나면 바로 거리선교 나가거든요. 미용기술을 배웠어요…한 달에 한번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지… 제가 손재주가 좀 있잖아요… 에... 이런걸 ‘자뻑’ 이라고 하나…?”

소희는 배시시 웃었다.

“맞아…그런 면 좀 있잖아. 소희씨...”

소희와 난 정말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윈터헤븐’을 나와 카페 뒤로 나있는 파킹장으로 함께 걸어가며 소희 손을 슬며시 잡았다.

“소희씨….아무 기술 없는 나 같은 사람도 할 일이 있을까….그 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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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실질적인 게시판에 글을 올리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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