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태극기도 촛불도 '나라 사랑'

posted Feb 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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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음 한 구석에 구름이 잔뜩 낀 것 같다. 화사하게 피어난 이른 벚꽃을 보고도 한껏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트럼프 대통령의 거친 행보와 한국 정치의 향방에 대한 불안감이 우리 삶 속에 스며든 게 틀림없다.

얼마 전 멕시코 국경 근처에서 비즈니스 하고 있는 지인을 만났는데 '트럼프 노 굿'이란다. 멕시코 페소가 곤두박질치면서 국경 건너와 물건을 사가던 멕시칸 고객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있다며, 생업에 직격탄이 날아들고 있단다.

한국과 중국에서 기계 소모품을 수입해 멕시코에 있는 각국 생산 업체에 판매하는 이웃이 있다. 트럼프 정권 들어선 후 통관이 빡빡해진 것 같다며, 예전과는 달리 몇백 달러짜리 제품을 며칠씩 잡아 두고 꼬치꼬치 묻기도 한단다. 납기 경쟁력에서 떨어지면 어쩌냐며 걱정이 늘어진다.

오래 전 먼 친척이 운영하던 한국마켓에서 어카운팅 일을 잠시 한 적이 있다. 멕시칸 종업원이 상당수를 차지했는데 한 종업원 지원자가 내민 소셜시큐리티 카드에 기가 막혔다. 사진은 제 얼굴인데 생년월일은 중학생 나이였기 때문이다. 이 소셜번호로 세금보고를 할 텐데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한 직원한테 물었더니 피식 웃는다. 몇십 달러만 주면 이런 카드 쉽게 얻을 수 있단다. 힘겹게 번 돈으로 가족 만나러 국경 넘어 멕시코도 다녀온단다. '합법신분이 아닌데 어떻게?' 나의 큰 눈이 더 커질 뿐이었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느니 어쩌니 하는 뉴스를 들으며 그때 생각에 마음이 짠해지곤 한다.

한국 소식도 만만찮다. 아니, 마음속 더 깊이 파고든다. 태평양 건너에서 바라보는 마음이라 더 불안한 걸까. 우리 가족이 미국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LA폭동이 일어났었다. 애리조나에 살던 난 TV로 폭동 장면을 접하고 너무 놀라 당시 LA 살던 오빠한테 전화해서 괜찮냐고 묻는데, 그만 엉엉 울어 버렸다. "우리 괜찮아, 나도 방금 TV 보고 알았어" 라는 말에 안도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지역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철렁 내려앉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내 핏줄이 사는 한국이 그렇다.

최근 한 1.5세 미주시인이 '저도 진짜 한국 사람 맞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글 일부를 옮겨본다. "오랫동안 제 정체성은 '코리안 아메리칸'이었습니다. 영어 이름으로 30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본명인 한국 이름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의 아픈 현실을 보며 깨어났습니다." 그녀의 고백이 이민자의 심정인 것 같았다.

며칠 전 한 모임에서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분이 "아 요즘 트럼프와 박근혜 이야기 말고 뭐 있습니까." 한다. 그때 저쪽에서 "그 이야기만 빼고 하세요." 라는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우리 각자의 생각은 촛불과 태극기만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의 생각과 태극기의 생각이 신문 지면 아래 위로 실리는 것을 보며 나는 희망을 본다. 어느 쪽이든 결국은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 그 한마음인 것 같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7.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