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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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수필
2009.06.25 05:17

흐뭇한 그림 한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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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부모님 세대의 죽음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일이 잦다. 나 역시 한국 사시는 부모님 근황에 귀를 세우고 있는 상황인지라 급하게 한국행 비행기표를 알아보는 분들의 눈물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비행기로 마음만 날려 보낼 뿐 자주 가 뵙지도 임종도 지켜드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곳의 일들이 여의치 않아 먼 하늘만 바라보아야 하는 분들도 있다. 이민의 세월이 길어질수록 부모님으로부터 멀리 사는 일이 가장 큰 불효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미국에 사는 이웃의 부모님들도 한 분 두 분 떠나신다. 종교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을 살아가는 이의 평안에 대한 장례 인도자의 말씀이 가장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조사로 고인과의 추억을 되뇌이고 조가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가족과 조객을 위로하기도 한다. 가족대표의 인사말씀이 있고 식당위치를 알려준다.

산자들끼리 화목하게 살라는 '망자가 베푼 한 끼' 를 제각각 기도하고 먹는다. 일상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망자인 경우에는 곧 잊혀지고 만다.

그러나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한 장례식을 기억한다.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K장로 어머님 장례식에 참석했던 남편을 통해 전해들은 사연이 그림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장남인 K장로의 형님이 나오셔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셨다고 한다. 일제의 지배 하에 있었을 때 시아버님 그러니까 K장로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사셨다. 근근히 배급식량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한국인들에게는 늘 배급된 양에서 몇 가마니가 부족하게 분배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할아버지께서는 일경을 찾아가서 따졌다. 주면 주는 대로 받을 일이지 무슨 잔소리가 많으냐고 심한 모욕을 받았다. 며칠 끙끙대던 할아버지는 밤중에 그 일본순사를 찾아가 죽어라고 패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가족을 모두 데리고 부산으로 야반도주를 하였다.

살림이고 뭐고 몸만 피했으니 그 때부터의 삶이 어땠겠는가. 6남매를 낳은 어머님은 남편을 일찍 하늘나라로 보내고 그 대쪽 같은 시아버지와 여섯 남매를 데리고 억척같이 살았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자부심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하시는 말씀이 그 어려운 일제시대 때도 육이오 전쟁 때도 한 번도 자식들 밥을 굶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종교를 숭상하던 K장로 가정이 어떻게 신앙의 가정이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으로 이어졌다.

장녀인 K장로의 누님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매일 새벽이면 없어지길래 어머님이 뒤를 따라가 봤더니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종교가 달라 안 된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어 새벽에 일어나 가족 밥을 다 지어 놓으면 가도 좋다고 했다.

설마 했는데 더 일찍 일어나 12명이나 되는 가족 밥을 다 지어놓고 교회를 가길래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딸이 저러나 싶어 따라갔다가 그 날 그대로 말씀에 무릎을 끓으셨다. 사위가 목사시라 그 교회에서 마지막 신앙생활을 하셨다는 어머님의 일생에 대한 소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요즘 장례식장 가면 흔히 하는 쿠폰을 준다든가 하는 일없이 예약해 놓은 한 식당으로 모두 오라고 했다. 그 곳에 한 공간을 예약해 놓고 손님들이 다 모였을 때 기도하고 식사를 했다며 장례식이 이렇게 흐뭇하기는 참 드문 일이었다는 얘기다.

거실 벽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고 싶은, 우리나라 역사와 하나님과 함께한 가정사가 가득 담긴 한 폭의 그림이다. 낮고 굼뜬 말투로 들려주던 남편의 흐뭇한 표정과 함께.

-중앙일보 <살며 생각하며>-

2009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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