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칠흑 같은 밤길의 동반자

posted May 0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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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오신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을 다녀온 지 18년만이다. 직장일로 몇 달 째 동부 쪽에 머물고 있는 남편과 참으로 어렵게 짠 여행일정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옐로스톤 가는 길은 굽이굽이 험난했다. LA 출발 비행기가 기체결함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스케줄이 줄줄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다음날 떠나는 비행기 표를 간신히 구했지만 원래 목적지가 아닌 다른 비행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운전거리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그나마 다행이지 위로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하늘은 뿌옇고 비는 뿌려대고 바람까지 세찬데다 먼 산에는 하얀 눈까지 덮여있어 5월이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도무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거나 말거나 한량없이 넓은 들판 곳곳에 푸릇푸릇 돋아난 봄풀들 생명을 밀어 올리는 땅의 힘이 불끈불끈 느껴졌다.

달리는 동안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 오가는 차도 뜸한 캄캄한 밤길을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고속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느닷없이 차창 앞에 커다란 물체가 정물화처럼 우뚝 서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선명하게 드러난 그것은 사슴이었다. 너무 놀란 나는 있는 대로 비명을 지르며 운전 중인 남편 무릎을 꽉 붙잡았다. 순간 급격한 차선 변경으로 차체가 요동쳤다. 다행히 왼쪽 차선을 달려오는 뒤차와의 간격이 있어 피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슴을 들이받아야 할 상황이었고 달리는 차의 속도를 고려해 보면 사슴도 차도 무사하지 못했을 터였다.

퉁탕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비상등을 켰다 껐다 조심조심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계속 달렸다. 저 멀리 달려오는 불빛 하나만 보여도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안도했다. 운전하는 그 누군가에게 마음으로 악수를 청했다. 혼자 이런 밤길을 달렸다면 얼마나 무서웠으랴 옆에 한 사람 있어 두렵지 않은 세상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가족 친구 이웃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같은 시대를 살게 되어 반갑다고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소복소복 모여있는 동네 불빛이 보이자 콧등이 시큰할 정도로 반가웠다. 날이 밝아 공원 내를 둘러보는 동안 곳곳에 무리지어 있는 사슴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제발 좀 조심해라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었다. 사슴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버펄로라고 부르는 야생 들소 또한 18년 전 그때에 비해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이 공원 내 차도 위를 예사로 어슬렁거리는 바람에 버펄로 떼가 다 지나갈 때까지 차들이 옆으로 비켜서 있곤 했다.

옐로스톤을 다녀왔다고 친정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당시 이름난 관광지 몇군데를 여행시켜 드렸지만 친정엄마는 옐로스톤의 기억을 가장 생생하게 가지고 계신다. 옐로스톤의 신비한 간헐천도 산 위의 거대한 호수도 쭉쭉 뻗은 소나무도 사슴도 버펄로도 아니다. 미국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때 성수기인데도 예약을 하지 않고 갔다가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공원으로부터 거슬러 내려가며 문을 두드려 잠자리를 찾던 사위의 애타는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인생의 캄캄한 밤길도 그처럼 애잔하게 기억될 것 같다.


미주중앙일보 "살며 생각하며" 5/2/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