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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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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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도착한 아들에게서 보이스톡 신청이 들어왔다. 반갑기는커녕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 뭔가 일이 난 것이다. 잘 도착했다. 잠자리도 편하다. 아들의 안부인사가 길게 느껴졌다. 진짜 엄마 생각이 나서? 잠시 착각에 빠질 뻔도 했지만 역시나 그건 착각이었다.

LA공항 121번 게이트 앞에서 랩탑 배터리 충전한다고 아웃렛에 연결해 놓고 중요한 전화 통화에 몰두하고 있었단다. 탑승자는 모두 들어오라는 방송이 흘러나오자 랩탑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우르르 일행을 따라 탑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그 랩탑을 좀 찾아달라는 간단하게 그런 말이다.

또야 싶어 열이 북북 뻗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라고 한다. 그 말에 내 머리 뚜껑이 들컥들컥 허연 김이 솟구쳤다. 하지만 나는 지그시 뚜껑을 눌러야만 했다.

나 역시 갖다 버리는데 선수라는 질책을 들으면서 자랐다. 아들 말처럼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정말 아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 사는 삼촌이 사다 준 눈처럼 하얀 양털모자를 쓰고 나갔다가 그날로 잃어버린 것을 시작으로 언니 시계 몰래 차고 나갔다가 흔적도 없는 손목을 보고 놀라 밤늦도록 시계 찾아 헤맸던 일 남편이 외국 출장 갔다가 선물로 사다 준 목걸이와 팔찌가 사라져 친구까지 동원해서 찾아다녔던 일 등등. 아무튼 '선수'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하나도 없다.

아들 화장실을 들여다보면 대충 나와 비슷하다. 치약 뚜껑 샴푸 린스 뚜껑 화장품 뚜껑… 도무지 제대로 닫혀있는 뚜껑이 없다. 어쩌면 엄마를 이렇게 닮았는지 안 좋은 것은 더 쏙쏙 빼닮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신기하다. 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아들은 어쨌든 고쳐야 할 것 같아 잘못한 것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

이젠 나름대로 어른이 된 아들에게 '엄마니까 이런 말 해 주는 거야'라며 슬쩍슬쩍 눈치 봐 가면서도 어쨌든 한마디 던지고 만다.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본이 되지 못하는 부모 이야기가 생각나 뜨끔한 적도 있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들은 신통한 구석도 참 많다. 그 역시 나의 기질을 닮은 것 같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나의 좋은 성품을 나는 가끔 아들을 통해서 발견한다. 아들의 대견한 마음 씀씀이에 '엄마 닮아서 그런 거야' 했다가 가족 분위기 완전히 썰렁해 진 적이 있다. 그냥 속으로 흐뭇해하고 말걸 후회막급이다

언젠가 아들은 우리가 가진 각별한 버릇이나 생활습관은 그 사람의 장점 혹은 단점이라고 단정지을 일이 아니라 타고난 개성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에 관한 한 연구결과를 가지고 직접 설문조사까지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정돈을 도대체 하지 못하는 딸과 늘 부딪치던 어느 엄마가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딸을 이해하게 되었다나 어쨌다나 논리정연하게 내놓은 이론이 그럴 듯했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지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반기를 들었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아무튼 나의 잔소리가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톤은 아주 부드러워졌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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