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오늘:
0
어제:
4
전체:
1,291,795

이달의 작가
조회 수 17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새해 달력을 받으면 얼른 벽에 걸고 싶다. 날짜가 남았지만 마지막 장을 떼어내고 새해 달력을 달고 만다. 평소에는 몇 달 치를 한꺼번에 떼 낼 정도로 무관심하면서 새해 달력은 특별 대우이다. 사실 해가 가는지 오는지 실감이 나질 않는다. 한해의 마무리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중간중간을 묶어주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매듭의 구분은 지난 날을 돌아볼 때 더욱 유용하다.

내 인생의 첫 밀레니엄인 2000년 새해를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새 천년 시작과 맞춰 전시와 공연 공간으로 지은 세계 최대 규모의 건축물인 영국의 밀레니엄 돔 안에 있었다. 대대적인 홍보에 비해 볼거리는 별로였던 기억이 남아 있다. 관광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돔 건설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지만, 실패로 끝났으며 21세기 런던 건축의 최악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살아 생전 3000년대를 맞을 가망은 없으니 10년이나 5년 단위로 의미를 두어 볼까. 아니, 모든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올해의 무엇을 떠올릴까.

그렇게 벼르던 친정엄마 실버타운 입주를 돕기 위해 한국을 다녀왔다. 엄마가 소원하시던 성당과 병원을 갖춘 따뜻한 곳에 모셔놓고 한국 추위 소식에 무덤덤해졌다. 멀리 살아 자매들에게 빚진 기분에서도 조금 놓여났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아꼈던 조카가 상사 주재원으로 우리 집 근처에서 1년 살다가 회사의 프로젝트 변경으로 며칠 전 한국으로 돌아갔다.

올해도 롤모델로 삼고 싶은 분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마음이 조금 더 부요해졌다. 정갈한 차림에 단정한 걸음걸이의 그분 손에는 비닐봉지와 집게가 들려있다. 이른 아침 동네 공원을 돌며 쓰레기를 주어 담는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본다. 어쩌다 마주치면 안부 인사나 나눌 뿐이지만, 그 유명한 K업체 안주인의 반듯한 정신에 정신이 번쩍 난다.

두 번의 암 투병을 견뎌내고 글쓰기와 후학 지도로 문학의 열정을 불태울 뿐 아니라, 깊은 신앙심으로 섬김의 나날을 보내느라 도무지 쉴 틈이 없는 K시인. 곧 쓰러질 것 같은 가녀린 노구지만 차선 끼어들기를 해야 할 때 '미인계 한번 써 볼게' 하며 창을 열고 뒤차에게 적극적인 손짓을 날려보낸다. 죽음의 그림자에 주눅 들지 않는, 팔팔한 유머 감각이 사람을 얼마나 유쾌하게 하는지.

이번에 한국에서 만난 내 초등 친구 P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펄펄 날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쓰러져 3년째 치료 중이다. 그것은 정말 어느 날 갑자기였다. 그동안 나는 친구의 지극한 남편 사랑을 보고 들었다. 그 경황 중에도 미국서 온 나를 위해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만든 것도 그 친구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나를 돌아보게 한다.

해가 바뀌면 매듭의 숫자 하나 더해지고 또다시 출발하는 거다. 반듯한 정신, 유머감각,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보석같은 사람들을 보고 배우며 조금 더 자라길 소망한다. 실망스러운 사람으로 인해 보석은 더욱 빛날 것이기에 새해 달력 칸칸을 희망이라는 단어로 채워본다.




미주 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5.12.24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9 엄마의 자개장 4 오연희 2016.05.10 161
348 수필 공항에서 만나는 사람들 2 오연희 2016.05.10 135
347 수필 인터넷 건강정보 믿어야 하나 2 오연희 2016.03.29 194
346 수필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낙서' 오연희 2016.03.12 247
345 수필 우리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 오연희 2016.02.13 181
344 수필 가뭄 끝나자 이제는 폭우 걱정 1 오연희 2016.01.29 160
343 수필 굿바이, 하이힐! file 오연희 2016.01.14 126
» 수필 새해 달력에 채워 넣을 말·말·말 오연희 2015.12.29 171
341 수필 냉장고 정리와 마음 청소 오연희 2015.12.11 353
340 수필 추억은 힘이 없다지만 2 오연희 2015.11.25 232
339 수필 실버타운 가는 친정엄마 4 오연희 2015.11.05 334
338 수필 독서, 다시 하는 인생공부 오연희 2015.10.21 164
337 수필 자매들 오연희 2015.10.08 142
336 수필 일회용품, 이렇게 써도 되나 2 오연희 2015.09.16 498
335 네가, 오네 오연희 2015.09.12 155
334 독을 품다 오연희 2015.08.29 243
333 수필 북한 억류 선교사를 위한 기도 편지 오연희 2015.08.21 301
332 수필 다람쥐와 새의 '가뭄 대처법' 오연희 2015.07.29 343
331 수필 따뜻한 이웃, 쌀쌀맞은 이웃 오연희 2015.07.11 203
330 하늘에서 왔어요 오연희 2015.07.07 8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1 Nex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