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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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덥다. 수박 한 덩이가 얼마 가지 않는다. 냉장고에서 꺼낸 수박을 도마 위에 올린다. 수박 속을 가늠해보며 잠시 설렌다. 칼을 대고 지그시 누른다. '쩍' 하는 순간 옆으로 나자빠지는 반쪽, 사람도 수박도 통쾌하다.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 향이 온 집안에 퍼진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오래 기다렸다는 듯 슬금슬금 손들이 바쁘다. 가장 잘 익은 꼭지 쪽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 녹아드는 시원한 맛 '아~'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칼로 툭툭 잘라서 먹는 것도 좋지만, 숟가락 하나씩 들고 머리 박고 함께 퍼먹는 것도 재미있다. 개인 접시 꼭꼭 챙기는 서양 사람들이 보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가장 맛있는 중간 부분 한 숟가락 퍼서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넣어주는 기분도, 입 딱 벌리고 받아먹는 맛도 그만이다.

맛있는 안쪽부터 파먹다 보면 껍질 쪽과 가까워지는 부분은 점점 단맛이 덜하다. 붉은 부분이 한참 남아있지만 어느 정도까지 가면 애들은 손을 놓는다. 더 이상 먹을 수 없다고 판단한 수박을 엄마나 아빠가 숟가락으로 훑고 있으면 아이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때 빠뜨리지 않는 남편의 고리타분한 한마디. 우리 어릴 때는 껍질과 붉은 부분 사이에 있는 이 허연 면을 얇게 썰어서 오이처럼 무쳐먹었어.

나도 빠질세라, 그 부분을 된장에 넣어 장아찌 만들어 먹어도 맛이 상큼하니 좋아. 아, 물론 너희 외할머니가 만든 것이지만….

일단 멍석이 깔린 기분이 들면 수박에 끈을 매달아 깊은 우물에 담가 두었다가 먹었던 이야기, 얼음을 사다가 사카린 넣고 허연 부분까지 빡빡 긁어 수박 화채 만들어 먹던 이야기 등등…. 꿈에도 그리운 지지 궁상이 마구 튀어나온다.

수박을 먹을 때면 친정엄마가 가장 즐겨 드시던 참외도 생각난다. 참외 껍질과 달콤한 씨줄기가 들어있는 속까지 와삭와삭 깨물어 드시던 엄마, 이젠 그 기력 그 치아 다 빠지고 옛집을 홀로 지키고 계신다.

그런데 며칠 전 한 이웃이 참외 껍질을 벗기더니 속을 파내지 않고 그대로 먹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먹게됐느냐고 물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먹어왔다고 하면서 싱싱한 참외 속은 위에도 좋다는 말을 덧붙인다.

어찌나 반갑던지 나도 오랜만에 참외 속까지 다 먹었다. 먹고 생각해보니 어릴 때 먹었던 한국 참외는 껍질이 더 연하고 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 혹독한 배고픔이나 가난은 모르지만 부족함이 안겨주는 맑은 정신과 모자람으로 인해 더 끈끈하게 맺어지는 인간관계들, 그 향수에 젖어들면 내 삶이 갑자기 풍요로워지는 것 같다.

먼 훗날 우리 자식들은 자기 아이들과 수박이나 참외를 먹으면서 무엇을 추억할까? 애들아… 아주 오랜 옛날에는 수박의 이 허연 부분을 먹기도 했다는구나…. 혹은 참외 속의 씨를 먹어버려 배속에 참외가 주렁주렁 열리기도 했다는구나…. 글쎄… 그러지나 않을까?

미주 중앙일보 201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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