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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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번에 많은 손님을 치르고 끙끙 앓고 있다. 대단하게 차린 것도 아닌데 나름 신경을 많이 썼나 보다.

오랜만에 집 밥 먹으며 감동했다는 사람, 오랜만에 편안하고 느긋하게 즐기면서 잘 먹고 친정집에 다녀온 기분이라는 분 등등… '오랜만에'라는 말이 유난히 반갑고 흐뭇하다.

정말 몸이 땅속으로 푹 꺼질 것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다. 자리 깔고 누워있다고 했더니 맨날 청춘인 줄 아느냐며 우리도 이제 더 이상 팔팔한 나이가 아니라며 주위에서 한마디씩 거든다.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눈을 감고 가만히 혼자 있으니 지난 몇 해 동안 내 주변에서 일어났던 몇몇 일들이 사무치듯 생각난다.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아무래도 첫 번째다. '사람 일 알 수 없다'는 말을 절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우리 가족이 영국에서 잠시 사는 동안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유럽 여행길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친정엄마는 관절염이 심하셔서 진통제에 의지해 간신히 걸으시고 아버지는 정말 펄펄 날아다니셨다. 관광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하는 명소를 관람할 때면 엄마는 '당신이나 다녀오소' 하시며 아버지를 밀었다.

하지만 엄마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아버지의 의리로 결국 다 둘러보지 못한 곳도 여러 곳이다. 늘 고랑고랑 하시는 엄마가 걱정이지, 낙천적인 성품에 자전거 하나로 훨훨 다니시는 아버지는 분명히 백세장수 하실 거라며 우리 네자매는 종종 입을 모았다. 그랬던 아버지가 어느 날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주저앉으셨고 그 길로 일어나지 못하고 양로병원에 조금 계시다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 다음은 나의 절친한 지인인 S가 남편과 갈라선 일이다. 지금도 그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힌다. 미국 와서 만난 사람 중에 그들 부부만큼 존경하고 좋아했던 사람도 드물다. 능력 있고 무던하고 가정적인 그 남편도 진국이지만 미국 직장이든 한국 직장이든 골라 갈 정도로 실력 있고 다정다감한 S를 만나면 그녀의 겸손한 자신감과 밝은 기운이 나에게 풀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두 아들 훌륭하게 잘 키워놓고 이제 부부가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야 할 차례인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싶어 그저 어안이벙벙하다.

한국으로 돌아간 S, 그대가 어디에 있든 그대의 가정이 회복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수시로 이메일을 띄우지만, 답이 없다. 언젠가는 기쁜 소식을 보내올 것이다. 그리 믿는다.

기운이 떨어질 때 더 절실하게 와 닿는 일은 이처럼 예측을 뒤엎어버린 사건들이다. 아버지 그리고 엄마, 우리 생에 주어진 우리의 기운이 다하는 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이, 그래서 오늘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그처럼 소중한 것일 것이다. S와 그의 남편, 부부 사이는 당사자 외에는 알 수가 없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많은 세월 그 따뜻했던 순간은 뭐란 말인가? 곰국 끓이는 냄새 구수하던 김 서린 그 댁 부엌과 그 부부의 환한 웃음이 너무 그리워 눈물이 난다. 아무튼, 빨리 기력을 회복해야겠다.

미주 중앙일보 201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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