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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로 말하자면 캘리포니아는 정말 축복받은 땅이다. 미국에서 가장 더운 애리조나에서도 살아봤고 하루에 4계절을 경험할 수 있는 변덕스러운 날씨의 영국에서도 살아본 후, 내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말이다.

사막의 땅 애리조나, 미국 온 후 처음 맞은 그해 여름은 얼마나 뜨거웠는지. 자동 온도조절기를 맞춰놓고 24시간 켜놓은 우리 집 에어컨이 한 번의 쉼도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윗옷은 홀랑 벗고 짧은 반바지 하나 달랑 걸친 채 우리를 만나러 왔던 중학교 수학선생인 우리 렌트집 주인 아저씨도, 수영복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들도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오신 친정부모님께서 미국땅이 이리 넓고 넓은데 어째 이리 화로통 같은 동네에서 사느냐고 한마디 하실 땐 슬그머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첫발을 디뎠을 때 장대 같은 비가 우리를 맞았다. 즉시 우산을 사야 했고 비가 잦은 그곳에 살다 보니 코트와 모자가 필요했다. 영화나 명화 속에서 접하던 바바리코트, 우산, 모자 같은 것들이 그들의 고상한 패션감각에서 온 것 같아 난 그 멋을 동경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들의 패션이 아니라 날씨였다. 시도때도없이 내리는 비는 사람 기분을 축 처지게 했다. 우중충한 기후와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주재원 가족 중 한 부인이 우울증에 걸렸고,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태도 발생했다.

캘리포니아, 특히 내가 사는 LA는 천국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 막히게 덥지도 잦은 비로 인해 꾸질꾸질 하지도 않은, 마냥 화창한 날씨에 찬사를 보냈다. '지진, 그 끔찍한 멀미'가 없었다면 LA 천국 주장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2008년 7월, 빌딩의 떨림이 온몸으로 번져오는데 몇 초, 소름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어떡해…'만 연발하다가 곁에 있는 사람을 꽉 껴안았다. 창밖에는 놀라서 뛰쳐나간 사무실 사람들의 부르르 떠는 몸짓들이 보였다. 쩍 벌린 아가리로 불길 활활 뱉어내다가 꿀꺽 삼켜 버릴지도 모르는 못 믿을 땅,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디로 숨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지만 화창한 날씨가 '별일 아냐!'라고 최면이라도 건 듯 그 날의 기억은 잊혀져 갔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저녁 9시경, 교회에서 찬양 예배를 드리는 중 의자와 천장이 흔들흔들,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보니 찬양가사가 적힌 슬라이드가 출렁출렁, 그때 그 기분 나쁜 울렁증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누구도 동요하는 기색없이 예배는 순서대로 잘 드려졌고, 사람들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빅 원이 올지도 몰라' '나 혼자 죽는 거 아니니까' 대담한 대화가 오고 간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말은 무게가 실리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사실이 너무 무거워 말은 가볍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진은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을 총동원해도 언제 어디서 어떤 강도로 얼마나 터질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천국은 없는 것 같다. 오늘 하루 마음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사랑해야 할 뿐.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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