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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시골 우리집에는 일본 사는 삼촌이 갖다 준 12인치 소니 텔레비전이 있었다. 태현실 장욱제 주연의 인기 연속극 '여로' 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집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텔레비전이 있어서 좀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종종 도둑이 들었는데 깨끗하게 빨아 널어놓은 옷이나 가죽나무 새순에 찹쌀 가루 묻혀 널어놓은 가죽 자반을 걷어가기도 하고, 된장이나 고추장이 담겨있는 작은 단지도 슬쩍 해갔다. 삼촌 초청으로 아버지가 일본을 다녀온 날, 친지들이 모여 이야기 나누느라 밤늦게 잠이 들었는데 그날도 도둑이 들었다. 아버지 머리맡에 벗어놓은 바지 주머니 속의 돈을 털어 간 것이다. 안방까지 침입한 도둑은 집 옥상과 앞마당에 똥까지 싸놓고 가는 대담함을 보였다.

"우리 집 사정을 훤히 아는 사람이 틀림없어!" 어른들의 수군거림에 돈을 훔쳐 달아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막연한 두려움과 궁금증을 느꼈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생긴 것도 험상궂고 부모도 자식도 없을 거야…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무지막지한 인간일지 몰라…온갖 나쁜 상상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냐, 어쩌면 선한 탈을 쓴 우리 이웃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에 이르자 주변 사람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삐딱해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남의 것을 훔쳐 자기의 필요를 채우는 부류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들처럼 몸으로 뛰는 도둑도 무섭지만, 머리로 뛰는 도둑이 더 무섭다는 것도 알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절대 식욕에 굶주린 사람처럼 자신의 끝없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남의 목숨은 헌신짝만도 못하게 여기는 부류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소식들.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 준 한 사건으로 인해 세상이 떠들썩하다.

한 달 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세월호 참사. 이 일이 없었다면 유유자적하게 악행을 계속하고 있을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과 그 가족, 속속 발표되고 있는 그와 관련된 기사의 제목과 내용이 온통 으스스하다. 5억의 현상금을 노린 '유병언 추적꾼'까지 합세해서 유병언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헛물만 켜고 있는 모양이다.

며칠 전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유병언의 장녀 섬나씨의 변호인으로 '악인' 변호를 맡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거물 변호사 '메종뇌브'가 선임되었단다. "비극적인 사고와 관련해 희생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 정치권에서 섬나씨와 그 가족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고 반박하는 등 섬나씨가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도록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분들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도 모두 슬프고 억울하다. 위로가 될 어떤 말도 이 땅에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라도 해야 숨을 쉬겠다는 듯 마구 쏟아져 나오는 말들, 그 분노의 말들이 사회분열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람 목숨 도둑의 중심에 서 있던 자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돈이 힘을 발휘할까 봐, 악당이 웃는 세상이 올까 봐, 겁난다.

미주 중앙일보 201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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