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겁쟁이의 변명

posted Sep 2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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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와 개 사랑'

"내 이름은 미키입니다. 여섯 살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로 시작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용돈을 벌기 위해 개를 산책시켜주는 일을 한다. 한 주에 두 번 즉 한 달에 여덟 번 개를 산책시켜주는데 10불이다. 동물을 좋아하는 부모님께서 자기 일을 도울 것이며 첫 번째 잡(job)을 시작하게 되어 매우 흥분돼 있다. 관심 있는 분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인사를 끝으로 아빠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남겨 놓았다. 개를 사랑하는 미키네 가족이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떠올랐다.

오늘도 우리 옆집 리사 아줌마는 커다란 개와 함께 동네 산책을 하고 있다. 주로 집을 나서거나 들어오는 길에 마주치는데 차 안에서 하이 하며 반가움을 표한다. 가끔 동네 길에서 만나 이야기가 길어지는 때도 있지만 개를 경계하는 듯한 내 몸짓에 눈치 빠른 리사는 서둘러 말을 맺는다. 리사의 남편 톰도 내가 있으면 빙긋이 웃으며 개를 자기들 몸 뒤편으로 보낸다.

개 이야기로 멍석을 깔았으니 겁쟁이가 된 내 사연을 털어놓아야 겠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주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두 살 터울의 언니가 나를 업고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저 뒤쪽에서 커다란 개가 우리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개가 따라와도 무서워하지 말고 그냥 태연하게 걸으면 해코지 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생각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을 어찌하랴. 나를 등에 업은 언니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본 개가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자 우린 둘 다 자지러질 듯 겁에 질렸다. 언니의 마음은 더 다급해졌고 업혀있던 내가 언니의 등을 넘어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내 이마가 뾰족한 돌에 찍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개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행복감으로 가득 차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개 자랑에 합류하지 못하는 나는 개를 싫어하는 확실한 증거라도 되는 양 이마에 난 흉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표도 안 나네 뭐 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도 난 기어이 아무튼 흉터가 있다고요 라며 내 마음속의 공포심을 다시 들춘다.

미국은 정말 공원이고 동네고 개 천지다. 커다란 개 앞에 내 안색이 어떻게 변하는 지는 모르지만 개 주인이 이 개는 괜찮다고 나를 위로한다. 이 사람아 당신은 괜찮은지 몰라도 나는 아니니 개 조심 좀 시키게 하는 심정이 된다. 하얀 털이 몽실몽실한 조그만 개는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 본다. 하지만 나에게 몸을 치대거나 혀로 손이라도 핥으면 내 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낀다.

얼마 전 개를 여섯 마리나 키운다는 이웃 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집이 아주 개판이겠네 하면서 깔깔 웃으며 맞장구를 쳐댔지만 그녀의 개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개가 새끼 낳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생명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데 그 묘사가 어찌나 실감이 나던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오갈 데 없는 개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는 그녀가 다른 세상 사람으로 보였다. 누구나 한 세계를 가질 수는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과 연관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같았다. 개를 사랑하는 이웃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져 오고 내 속에서 뜨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미주 중앙일보 '삶의 향기' 2012.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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