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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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 않는 옷이나 생활용품을 한곳에 모아둔다. 어느 정도 모이면 비영리 단체들의 도네이션 요청 카드를 물품 봉지 위에 올려 집 앞에 내놓는다. 그들은 도네이션한 물품의 가치만큼 세금 공제받을 수 있다는 쪽지를 문 앞에 놓아둠으로써 물건을 잘 가져갔다는 흔적을 남긴다. 나에게 필요치 않은 물건으로 누군가를 돕는 것, 꿩 먹고 알 먹는 기분이다. 몇 해 동안 그렇게 무언의 약속이 잘 지켜져 왔다.

그런데 이상이 생겼다. 정리한 물품을 암환자를 돕는 한 단체의 픽업 날짜에 맞춰 집앞 지정한 장소에 내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다녀간 흔적이 없다. 물품 봉지를 슬쩍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며, 안전한 동네라는 자부심에 금이 간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랬을까, 라고도 생각해 보지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생활용품도 그렇지만 처분해야 할 책도 만만찮게 많아 한국책, 영어책을 도네이션 받아 좋은 일에 사용한다는 한 단체에 전화했다. 곧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믿고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최근 애들 집 떠나고 정리한 물건이랑 책이랑 다시 쌓여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으니까 심란하기 짝이 없다. 이참에 미국 처음 와서 열심히 기웃거렸던 '거라지 세일' 나도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무슨?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해 보자' 마음 먹고 대대적인 정리에 들어갔다. 있는 줄도 모르고 또 구입한 물건들, 활용도가 떨어지는 선물들, 기술의 발달로 애물단지가 된 전기 전자제품, 싸다고 대량 구매한 것들, 지겨워진 것들, 유행 지난 것들…. 참 많이도 껴안고 사는구나, 새삼 깨달았다.

거라지 세일. 남이 하는 것을 볼 때는 꼬질꼬질한 잡동사니 몇 개 펼쳐놓고 시간이나 때우는 일인 줄 알았다. 집 곳곳을 살펴 내놓을 것을 정하고, 품목별로 분류하고, 테이블과 바닥에 진열하고, 거라지 세일 광고 표지 만들고, 가격을 정하는 일 등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당일 새벽, 집을 잘 찾아올 수 있도록 길목마다 거라지 세일 안내 표지를 붙이고 들어오니 아직 세일 시작 한 시간 전이다. 미리 진열해 놓은 물품 테이블을 앞마당 잔디밭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벌써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보물찾기라도 하려는 듯 번쩍이는 눈빛들을 보니 반갑다. 주인에게 버려진 것들의 가치는 '똥값'으로 전락했지만, 한때 우리의 사랑을 듬뿍 받던 것들이 새 주인 손에서 다시 한 번 꽃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사가는 사람들이 고맙다.

오전으로 막을 내리고 뒷정리까지 마치고 났더니 온몸이 욱신욱신 몸살기가 돈다. 그래도 짐이 줄어 헐렁헐렁해진 집 안 구석구석으로 기가 마구 통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살림살이, 이것들도 언젠가는 버려지겠지. 쓸쓸한 생각이 든다. 문득 소설가 박경리의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버릴 거 다 버리고 최소한의 것만 갖고 있으면서 느끼는 홀가분함 같은 것이 아닐까.

갖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은 나에게는 참으로 먼 얘기로만 들렸는데, 조금 알 것도 같다. 몸에 밴 소비성이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단순하게 사는 연습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미주 중앙일보 2014.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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