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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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주례사

2010.02.04 04:30

문태준 조회 수:641 추천:92

결혼식에 다녀왔다. 잠깐 짬이 나서 범어사엘 들렀다. 성보박물관에서는 동산 스님의 친필이 눈에 띄었다. “참고 기다려라”는 짧은 문구였다. 동산 스님은 의대생 시절 “마음의 병은 누가 고치는가?”라는 뜻밖의 질문을 받고 출가를 결행했다. 백용성 스님의 제자였고, 성철 스님의 스승으로 고승이었다. 스님은 바람에 댓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대나무 숲을 우러러 보았지만, 혜안이 없는 까닭에 사철 창해(蒼海) 같은 대나무 숲 곁에 우두망찰 서 있다 그 근처 이제 막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동백나무로 시선을 옮기고 말았다. 큰 물 덩어리인 바다와 바다 표면에 일어나는 잔물결에 대해 생각했다. 말하자면 계절은 잔물결 같은 것 아니겠는가. 혹은 우리의 소소한 감정이란 입춘을 맞아 한 해 만에 터뜨리는 동백 꽃망울 같은 것 아니겠는가.

이 런저런 생각을 하다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어떤 설렘에 휩싸인다. 신부와 신랑이 막 내딛는 첫걸음도 나를 설레게 하지만, 주례사를 들으면서 상념에 달떠서 있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주례사는 일가(一家)를 이룰 신혼부부와 하객들에게 경건함과 아울러 폭소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나는 평소 갖고 있다. 내가 결혼할 때 주례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두 젊은이의 결혼에 동의할 수 없는 분은 지금 당장 저 이층 창문 바깥으로 뛰어 내리십시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 들른 결혼식의 주례사는 인상적이었다. 신랑의 대학교 은사인 주례는 지도교수라는 인연을 맺은 만큼 평생 신랑에 대해 애프터서비스를 해드리겠노라고 했다. “신랑에게 하자가 발생하면 밤 12시에라도 당장 나에게 전화를 하세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런 말씀들이 이어졌다. “사랑은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큰소리를 지르지 마세요. 경어체로 햇살처럼 말하세요. 미주알고주알 따따부따 하지 말고 문을 닫고 나와서 숨을 크게 내쉬세요. 한순간이라도 울지 마세요. 휴일 오후에 ‘뭘 드시겠어요?’라고 아내가 물을 때 ‘아무거나’라며 우유부단하고도 퉁명스럽게 말하지 마세요. 단둘이 있을 때는 보는 사람 없으니 유치하게 노세요.”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구에게나 결혼 이후에는 주머니 속에 송곳이 들어 있는 것만 같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바다에 일어나는 잔물결은 얼마나 잦은가. 그러나 한 시인은 눈을 감기 전 평생 병이 잦았던 본인을 돌보면서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지척에서 있어준 아내에게 바치는 눈물의 시를 마지막으로 남기기도 했다.

결 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제각각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금번 결혼식에 다녀오면서 좀 다른 맥락이 있지만 한용운 시인의 말씀이 떠올랐다. “잘라 말하면, 보고 보지 않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이기고 이기지 않음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오늘이 입춘이고, 새봄에는 신혼부부들이 축복 속에 탄생할 것이고, 우리는 하객이 되어 그들을 격려할 것이다. 더 멋진, 유머를 폭죽처럼 터뜨리는 주례사를 기대하면서. 나만의 결혼식 때를 겹쳐 떠올리면서.

필자 :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