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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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여행기2) 붉은 속살이 보인다 12/29/03

2004.11.15 10:49

오연희 조회 수:482 추천:77

여행 둘째 날이다.

어젯밤엔 그랜드캐년 두 시간 못 미쳐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 Flag Staff 에 있는 한 모텔에서 가족여행 첫날밤을 보냈다. LA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흰 눈이 온 도시를 환하게 밝혀 주었고 성탄과 연말연시를 맞아 장식해 놓은 온갖 모양의 라이트들이 여행기분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기분 좋은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딸의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아빠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가족 여행시엔 필히 더블침대가 두개 있는 작은 방하나를 얻어서 복닥거리다가 아빠랑 아들이 그리고 딸과 엄마가 한 침대를 사용하게 된다. 집에서는 제각기 자기 방이 있어 불편을 모르는 아이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을 알게 된다.

멕도널드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그랜드캐년 쪽으로 향했다. 길가엔 한국의 고풍스런 분위기와는 다른, 싱거운 키다리처럼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군데군데 큰 화재의 흔적인양 새까맣게 탄 소나무가 10년 전에 보았던 그대로 흉하게 남아 있었다. 캐년이 가까워 올수록 눈은 더욱 많이 쌓였지만 바람이 없어선지 공기는 포근했다. 목적지에 다다를 때쯤 지역 방송국에서 보내주는 라디오 채널에서 베에토벤의 “영웅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주차장에 파킹된 차들의 번호판을 보니 멀리 동부쪽 차들뿐만 아니라 캐나다 퀘백에서 온 차도 있었다. 아이들은 둘이서 무슨 내기라도 하는지 멀리 다른주에서 온 차들을 발견하면 주이름을 먼저 큰 소리로 불러본다. 그리곤 승리한양 으슥하는 모습이라니…다큰 녀석들이 하는 짓은 쯔쯔 하면서도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에 덩달아 행복했다.

캐년의 가장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들이 엄청 바글거렸다. 10년 전 처음 보았을 때 그 웅장함에 받은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역시 다시 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캐년의 겉모습만 보았다면 이번엔 혈기 넘치는 붉은 속살 속의 섬세한 근육, 혈관, 실핏줄까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더욱 자세히 보려고 절벽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하니 조심하라면서 내 옷을 덜석 잡기도 하고 길이 미끄러우니 몸을 낮추라는 둥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톡톡히 하는 아들을 보니 10년 전 생각이 떠올랐다.

애들에게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조바심 내던 풋내기 엄마였었는데...
이젠 아이들이 엄마 조심하고 연신 조바심이다.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