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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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마음을 따스하게 2

2004.12.11 07:15

오연희 조회 수:373 추천:118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신경림의 시 가운데 "가난한 사랑 노래" 란 것이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두려움이 없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라고 이어지는 절창(絶唱)이
가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로 끝날 때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저주 받은 것일까. 복 있는 것일까.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는 가난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자라는 사람이 많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모질게 자존심을 갉아먹는
가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늘어나는 일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 듯하다.

가난의 기억을 떠올리면 두 개의 장면이 있다. 아마 초등학교
일 학년 때 늘 얻어 입기만 하던 옷이지만 그날따라 유일하게
입을 만하던 옷이 팔꿈치가 헤어져버렸다. 어쩌다 보니
도심의 잘나간다는 학교에 다니게 된 처지라 학교에만 가면
아이들의 옷차림에 기가 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고 혀가 도르르 말려 말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때 엄마가 천을 오려 덧대고 팔꿈치와 무릎에 아플리케를
수놓아 주시면서 했던 말씀이 새롭다. " 우리 집은 물건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가득 차서 부자인 게야. 이웃집 언니 옷도
얻어 입고 떨어지면 덧대어 입고 그러면서 나라 살림도 염려하고,
우리보다 더 없는 사람도 위로하고 그러는 게야.

워낙 어릴 적 이야기라 말이 꼭 이대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부자라는 말은 오랫동안 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나는 엄마의 말에 용기백백하여 아플리케로 위장한 떨어진 옷을
입고 당당하게 학교로 갔다.

두 번째 사건은 중학생이 된 다음 일이다. 집이 큰가. 작은가,
옷이 좋은가 아닌가로 아이들끼리 서로 차별하던 초등학생 시절과
달리 가난이 직접적인 차별이 된 일은 없었다. 워낙 변두리 학교에다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성적"이라는 막강한 기준이 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밥을 굶는 아이나 공납금을 못내어 쫓겨 가는
아이들이 있어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아이 가운데 하나가 무단결석을 하기 시작했다.
담임의 지시로 그 아이네 판잣집을 방문한 나는 피난살이보다 더
허술한 집과 병들어 누운 그 아이의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를 만나고
충격을 받았다. 아이는 어디 갔는지 없고, 할머니는 곡기 끊은 지
좀 된 모양으로 "먹을거리 구하러 나갔는데 안 오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쯤엔 우리 집엔 가난은 면했지만 배고픈 일이 세상에서
제일 눈물나는 일이라 기억이 생생하던 나는, 얼른 집으로 달려와
우리 할머니가 숨겨둔 밀가루 포대를 훔쳐 그 집으로 도로 갔다.
수제비도 끓어 할머니께 드시게 하고, 청소 하면서 한나절이
지난 다음에야 연탄 두장 쌀 봉지를 안은 친구가 나타났다.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밀가루 한 포대 들여놨어" 라며 부엌 쪽을 가리켰다.

그 다음 일어난 사건을 정말 평생 잊지 못한다. 부엌으로 들어간
그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밀가루를 들고 나오더니,
정말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밀가루를 내 머리위에 쏟아버린 것이다.
나는 덩어리져서 끈적끈적해지기까지 한 허연 밀가루를 귀신 몰골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한 이틀 내 방에 틀어박혀버린 듯 하다.

내가 그 아이에게 한 짓은 그 아이 입장에서는 팔꿈치 헤어진
옷을 사정없이 놀려대던 내 어린 시절의 철없는 동무들과
진배없는 짓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아이는 밥과 자존심 가운데서
후자를 택한 것임을 깨닫기까지 짧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두 사건은 내게 빵과 평화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오랜 숙고를 만든 사건이다. 가난하다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는지 모르진 않을진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가난하기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그러니, 내가 가져다
준 밀가루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뭉개버리는 폭력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_<샘터 12월호> 중에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