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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2010.10.02 09:19

오연희 조회 수:11194



필립얀시 [-g-alstjstkfkd-j-]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
작자 필립 얀시-Philip Yancey-
옮긴이 윤종석
출판부: 한국기독학생회(IVP: InterVarsity Press)
1997 초판
1999 한국어 출판

마음에 담고 싶은 구절들 모음


l        은혜가 주어지는 상태는 악보의 꾸밈음 만큼이나 찰나적인 것이다.
l        리쳐드 니버( N. Richard Niebuhr)는 말했다.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여태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는 이가 있을 때 발생한다”
l        헬라어로는 ‘카리스’(Charis) 라는 은혜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기쁘다, 즐겁다’는 뜻의 동사가 나온다. 내 경험상 사람들이 교회를 생각할 때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짐짓 거룩한 체하는 자들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란 잘못을 청산한 후에 가는 곳이지 있는 모습 그대로 가는 곳이 아니다. 은혜보다 도덕이 먼저 인 것이다. 그 창녀는 말했다. “교회요! 거긴 뭐 하러 가요? 그러잖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예요.”
l        이 창녀의 말이 가슴을 찌르는 것은 교회의 약점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교인들 중에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천국을 향한 여정의 기쁨을 놓지는 이들도 있고, 현대 ‘문화전쟁’ 이슈에 관심을 갖느라 비은혜 세상에 은혜의 안식처라는 교회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도 있다.
l        “은혜도” 개구리처럼 해부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는 사이 생명을 잃고 만다. 한마디로 나는 은혜를 설명하기보다는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l        아이작 디네센은 ‘바베트의 만찬’을 단순히 멋진 식사 이야기가 아니라 –베푸는 자의 부담으로 거저 받는 선물-의 비유로 쓴 것이 분명해진다. 친해 하는 여러분, 은혜가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다가 감사로 인정하면 그뿐입니다.
l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 교회라는 그릇 안에서 물 찬 술처럼 묽어지고 있다. 슬픈 일이지만 이 은혜에 갈급한 세상에 교회가 내보이는 비 은혜가 또 하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베트에 만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빵으로 만든 죽이나 먹으러 모인 우중충한 사람들 처럼 보일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l        일부 교회에서 그들이 만난 것은 수치심, 형벌에 대한 위협, 정죄 의식 들이다. 한 마디로, 은혜를 찾아 들어선 교회에서 비은혜만 받고 가는 것이다.
l        나의 삶도 동물의 촉수처럼 뻗쳐 오는 비은혜와의 싸움이다. 판단하려는 본능따위와 싸우고 있다. 부패한 은혜가 풍기는 악취에 비하면 지옥의 유황불 냄새는 아무것도 아니다.
l        우리는 비은혜의 연기가 자욱한 울 안에 살고 있다. 은혜란 성취가 아닌 선물로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세상, ‘2등은 없다’는 세상에서 오는 은혜는 얼마나 쉽게 사라지고 마는가!
l        죄책감은 은혜에 대한 갈망의 표출이다.
l        풀러 신학교 교수 루이스 스미디즈(Lewis Smedes)는 수치심과 은혜의 관계를 주제로 책을 한 권 썼다.제목 (Shame and Grace) 그의 경우 “죄책감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를 지배한 것은 딱히 DEJS 죄와 연결 지을 수 없는, 내가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느낌이었다. 내게 용서보다 더 필요한 것은, 설사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받아 주시고 소유로 삼으사 품어 주시고 인정하시며 절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확신이었다.”
l        스미디즈는 파괴적 수치심의 3대원인으로 세속문화와 은혜 잃은 종교와 용납 없는 부모를 꼽는다. 세속 문화의 기조는 사람이란 외모도 기분도 능력도 늘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용납 없는 부모 –“넌 창피하지도 않니!”- 는 자식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합격 점에 이룰 수 없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l        “은혜는 뜻밖에 찾아온다( Grace Happens). 많은 경우 로맨틱한 사랑은 순수한 은혜에 가장 근접한 경험이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매력 있고 괜찮은 상대로 보아 주는 사람이 있다. 나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 용서를 비기도 전에 감싸주는 사람, 옷 입을 때 내 생각을 하는 사람, 나 중심으로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기독교적 감각이 뛰어난 좀 업다이크( John Updike)나 위커 퍼지(Walker Percy)같은 현대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 성관계를 은혜의 상징으로 택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l        신앙-그렇게 문제가 많고 비은혜를 일삼는 나쁜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인간이 뜻밖의 순간에 외부로부터 오는 값없는 선물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이다…..새로운 법이 통하는 또 다른 세계에 억척스레 희망을 둔다. 인간은 사랑에 굶주리며 자란다. 너무 깊어 표출이 안 될 뿐, 신의 사랑을 갈망하며 산다.
l        많은 종교적 단어와 마찬가지고 은혜도 의미가 걸러져서 내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을 정도였다.
l        나는 음악을 통해 처음으로 은혜를 알았다. 심신이 온통 혼란스럽고 세상이 뒤죽박죽이었지만 나는 거기서 구름처럼 홀가분하고 나비 날개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은혜와 경이의 숨겨진 세계를 보았다.
l        나는 자연 속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자연이 모든 생물체에게 현태와 자리를 내주는 확실하고 지당한 방식이 참 좋았다. 세상에는 웅장함도 있고 위대한 선도 있고 기쁨의 자취도 있다는 증거를 보았다.
l        그때쯤 나는 사랑에 빠졌다. 하루아침에 심장이 가슴에 담아 둘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올랐다. 신학용어로 ‘일반 은총’을 경험한 것이다.  루이스 (C.S. Lewis) 는 “만나 보지 못한 꽃송이의 향기, 들어보지 못한 곡조의 메아리, 밟아보지 못한 나라의 소식”을 향한 깊은 갈망을 일깨워 주는 것을 “은혜의 물방울”이라 했다.
l        확신컨대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된 것은 은혜 잃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변색된 낱말들을 되찾기 위함이다. 전혀 가식 없이 신앙을 내 속도대로 키워 갈 수 있게 해준 마음씨 좋고 지혜로운 사장 해럴드 마이라(Harold Myra)를 만났다.
l        천지에 벚꽃이 만발한 5월의 트래버스 시티, 소녀의 황금빛 사냥개가 테니스 공을 찾아 벚꽃이 흐드러진 나무 숲속을 달리는 장면.
l        은혜간 넘치는 예수님의 비유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함정이나 올무가 없다. 그러나 지금도 그 파격적인 메시지를 접할 때 마다 비은혜의 구름이 하나님에 대한 내 시각을 얼마나 무참히 흐려 놓는지 새삼 깨닫곤 한다.
l        은혜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개인적인 것이다.
l        분명 예수님은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비유들을 주신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고자 비유를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l        예수님이 은혜의 비유로 무리의 마음을 파고드는 그 순간에도 바리새인은 주변에 서서 투덜대며 이를 갈고 있었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들보다는 ‘진실한’ 이들을 훨씬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l        은혜가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달려 있는 것임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다.
l        나는 내 친구가 고통스럽게 어둠 속을 응시하며 두터운 유리창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l        은혜는 산수가 아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다.
l        한가지 의미심장한 것은 이 비유를 공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해질 무렵 끼여든 품꾼이 아니라 온종일 고생한 자들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책임감 있는 일꾼으로 여기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주인의 엉뚱한 처사에 당황한 당시의 청중과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품삯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다는 비유의 핵심은 딴전이다. 우리 중 공로대로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l        은혜는 세간에 통하는 회계원리로 격하될 수 없다. 계산 일색의 비은혜 세계에는 자격에서 남을 앞지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은혜의 세계에는 자격이라는 말 자체가 소용없다.
l        은혜는 소위 하나님에 대한 딜레마를 해결해 준다.
l        우리가 은혜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불의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는 만인의 본능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바베트의 만찬처럼 은혜란 받은 이에게는 값없는 것이지만 주는 이에게는 전 소유가 다 들어가는 것이다.
l        사회학에는 거울 자아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아내, 아버지,상사 등)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말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성경말씀을 진실로 믿는다면, 거울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l        내 인생의 그래프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들쑥날쑥 선악을 오가는 기복이 아니라 선으로만 향한 올곧은 직선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선하심이 순간의 시점에 응집되어 영원의 효력을 내신 것이다.
l        하나님은 은혜-충격과 반전으로 의외의 결말을 낳기에 으뜸인 단어-의 새로운 계산법을 도입하신다.
l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l        나는 하나님께 가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든다. 은혜는 본능에 상반된 낯선 자유의 소리로 들려서 날마다 은혜의 메시지를 듣는 귀를 달라고 다시 기도해야 한다.
l        가계의 DNA에 박힌 영적 결함처럼 비은혜는 끊지 못한 사슬을 타고 전해져 내려간다.
l        은혜는 불공평하다. 이는 은혜의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다. 그러나 은혜는 공평함의 문제가 아니다.
l        가정 국가 기관 할 것 없이 비은혜는 상호 적대의 원인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l        용서란 비본성적 행위이며, 아내는 그 뻔뻔스런 불공평에 항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서란 언제나 설교로 듣는 것보다 어렵다. 우리는 상처를 거듭 되새긴다. 자기 행동을 장황하게 합리화한다.
l        예수님은 불의한 행위를 용서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으로 달아 놓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는 용서와 남에게 베푸는 용서를 명백히 하나로 묶어 두셨기 때문이다.
l         용서에도 은혜처럼 무자격 과분함 불공평이라는 묘한 특성이 있다.
l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우리는 기도라는 매체를 통해 적에게 다가가 곁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 적의 변호 역을 맡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축복하고 선대했다고 해서 그들이 악한 핍박과 착취를 중단할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분명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다치게 하거나 이길 수 는 없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한…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주고 있다.
l        그래도 불의를 용서한다는 건 어딘가 불공평해 보이죠. 용서와 정의 사이에서 진퇴양난이에요….그러나 정작 용서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옳은 것이다.
l        예수님은 정의의 모든 혹독한 요구를 친히 그 무죄한 몸에 지사 비은혜의 사슬을 영원히 끊으셨다.
l        은혜의 모험을 뒤로 하고 비은혜의 안전으로 내닫는 것이다.
l        용서란 정의와 자비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저울을 하나님 손에 놓아드리는 것이다.
l        용서하지 않을 때 나는 과거의 감옥에 갇히며, 변화의 잠재력은 완전 차단된다. 그것은 통제권을 타인 즉 원수에게 내어 준 뒤 혼자서 과오의 여파를 당하는 운명을 자초하는 것이다.
l        정의에는 선하고 의롭고 합리적인 힘이 있다. 반면 은혜의 힘은 다르다. 은혜는 세상에 물들지 않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초자연적 힘이다.
l        한 사람의 기침에 버스에 탄 승객이 다 감염되는 것이다. 그러나 약은 백신처럼 한번에 한 사람씩 투여해야 한다.
l        용서가 없이는 과거라는 괴물이 언제 동면에서 깨어나 현재를 삼킬는지 모른다. 나아가 미래까지도.
l        정책은 반대했지만 사람은 적대하지 않았다.
l        본질상 예수님은 애지중지 지켜온 구약의 불량품 사절 원리를 무효화하고 대신 “우리는 다 불량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쨌거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는 은혜의 새로운 규정을 제시하신 셈이다.
l        이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내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부정한 세상 속을 활보하며 거룩함의 근원이 될 수 있다.
l        은혜는 세상이나 사회를 통째로 바꾸지는 않지만 그 공기를 한결 풍성하게 한다.
l        언뜻 보기에 은혜라는 말은 자유주의를 대충 용인해도 좋다는 압축 표현 같기도 하다. 다 같이 잘 지내서 안 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은혜는 다르다. 신학적 뿌리를 추적해 보면 은혜에는 자기 희생의 요소, 즉 비싼 대가가 포함되어 있다.
l        우리는 자신의 분노와 정욕은 그냥 넘어가면서 남의 살인과 간음을 욕하는 데는 얼마나 빠른가! 우리 대 저들이 될 때 은혜는 죽는다.
l        예수님은 사람을 보실 때 하나님의 원래 빚으시고 의도하신 모습으로 보셨다. 먼지와 때의 껍질을 뚫고 이면의 본 모습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더러운 표층을 꿰뚫는 사랑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실 수 있었다.
l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으로 본다는 것이다”
l        그러나 은혜를 그렇게 무차별적인 말로 표현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해진다. 어떻게 용서가 코앞에 있음을 아는 친구를 설득해서 중대한 과오를 범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l        ‘은혜남용’이 묵인과 용서를 혼동한 데서 오는 것이라 설명한다. “악을 묵인하는 것은 그냥 무시한 채 악을 선 보듯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란 베푸는 편 못지않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된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l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폴 투르니 박사는 이것을 정신의약 용어로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의식된 죄는 제해 주시나 억압된 죄는 의식으로 끌어내신다.”
l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장면에 가슴이 덜컹하는 것은 내가 본성상 죄를 지은 여자보다는 바리새인 편에 더 잘 서기 때문이다. 나는 자백보다 부인에 훨씬 능하다. 체면의 옷자락으로 죄를 가린 채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은 절대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다.  이 여자처럼 겸손히 두려워 떨며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두 손을 벌릴 때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l        받으려고 손 벌린 자세, 그것이 곧 내가 말하는 은혜의 ‘손잡이’이다.
l        자유를 얻으려면 바리새인의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현장에서 잡힌 여자의 무력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l        폴투르니는 “자신에 대해 가장 철저히 절망한 신자일수록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가장 절실히 고백한다. 다니엘루(Danielou) 신부의 말처럼 “죄의식을 가진 자는 오히려 성인이다. 죄의식은 영혼이 하나님을 느끼는 정도를 재는 척도다”
l        회개의 필요성에 동의하겠지만 실제로는 은혜의 허점을 악용하여 우선 당장 욕심대로 하고 나중에 회개하려는 속셈을 품었다.
l        ‘내가 하고 싶은 일이잖아. 물론 잘못인줄 알지. 하지만 못할게 뭐 있어? 나중에 언제든지 용서 받을 수 있는데’ 그 생각은 점점 커져서 그를 사로잡고 급기야 은혜는 ‘색욕거리’가 되고 만다.
l        성경은 어디까지나 은혜를 죄악에 맞서는 치유의 힘으로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의 권면처럼 우리는 “은혜…에서 자라가야”하지 않는가?
l        우러터 트로비쉬(Walter Trobisch)는 말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지만 일단 그분이 받아주시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l        “전적인 기쁨의 자아 부인, 예수 그리스도 및 영적 지도자를 향한 절대 복종” 사람들은 스승에게 복종하면 자유인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된다면 비웃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노예 됨 이야말로 진정 기적적인 해방이다.
l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은 죄 중에 지금까지 건재하지 않는 것, 날마다 더 나를 포로로 삼지 않은 것, 또 다른 죄를 불러오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의 참 복종의 대상인 그분은 당신이 노예가 되기 위해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족쇄의 고리를 끊어 신다.
l        나는 처음 접한 하위문화에서 복음을 따로 떼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슬프게도 내 친구들 중에는 중도에 포기해서 끝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이 많다. 편협한 교회가 길을 막은 셈이다.
l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비은혜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거짓된 순결을 추구하는 율법주의는 은혜 기피증에서 비롯된 교묘한 꾀임을 알았다. 율법을 달달 외우면서도 얼마든지 그 핵심을 모를 수 있다.
l        톨스토이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외면적 규율 내지 도덕주의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l        외면적 계율을 믿는 사람은 기둥에 매달린 호롱불 아래 서 있는 사람과 같다. 주변이 온통 빛이지만 그 반경 밖으로는 더 이상 발 딛을 곳이 없다. 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혹은 길고 혹은 짧은 막대에 호롱불을 매달아 들고 있는 사람과 같다. 발 앞의 불빛이 언제나 미지의 땅을 비추어 성큼 발을 내딛게 한다.
l        위선의 해결방안은 완벽 아니면 정직 두 가지 뿐이다. 완벽은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다. 회개에 이르는 정직이다.
l        탕자의 비유; 무책임한 동생과의 비교에 바빠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
l        진심으로, 도덕적으로 열심히 살려고 했으나 그 정도가 지나쳐 광신의 지경에 이를 판이었다.자유와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이 갈수록 사라졌다…
l        신앙의 경쟁은 처음엔 최선의 동기로 시작했더라도 결국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엉뚱한 쪽으로 가게 만든다. 그 자체가 은혜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은혜의 입구는 올바른 행동이나 거룩함이 아니요. 오직 회개뿐이다. 죄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은혜다.
l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 중 교회에 대한 깊은 불신 때문에 오늘까지도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들이 있다. 하위 문화의 온갖 사소한 규율에 묻혀 그만 궁극적인 목표-하나님을 아는 것-를 놓쳐 버린 것이다.
l        만화에서 그리스도인은 타인의 삶을 통제하기 원하는 경직된 도덕주의자로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다.
l         은혜가 빠진 도덕주의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l        1950년대와 1960년대 주류 교단들이 정치 문제에 신경 쓰느라 복음전파를 뒷전으로 하자 교인 수는 반으로 줄면서 교회가 텅 비기 시작했다. 불만을 느낀 많은 교인들은 영적 필요를 채워 주는 메시지를 들으러 복음주의적 교회를 찾아 다녔다. 지금 또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보수파 정책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교인들을 몰아내는 똑 같은 실수를 범한다면 정말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l        유치함과 옹고집이 판치는 세속 좌익의 편협성
l        대중 매체기 종교 우익을 왜곡하며 그리스도인 전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l        ‘마지막 최고의 단어’요 영어에 남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신학 용어인 은혜 역시 많은 단어들이 간 길을 가려는 것인가? 정계에서 은혜란 과연 정반대의 뜻이 되고 말았나?”
l        다른 상화에서 던진 니체의 경고 “용과 싸우다 스스로 용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l        나는 정치와 종교의 혼돈이야말로 은혜의 최대 장벽 중 하나라 믿는다. 루이스는 기독교 역사상 저질러진 범죄는 거의 모두 정교 혼돈의 산물이라 말한 바 있다. 늘 비은혜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정치는 은혜를 내 놓으면 권력을 주겠다면 우리를 유혹해 온다. 그리고 교회는 이 유혹에 저항하지 못한 때가 있다.
l        정치와 손잡은 교회는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휘두르는 경향이 있었다.
l        미래의 역사가들이 1990년대 복음주의 교회를 돌아보며, 세상에 은혜의 향기를 전하는 일이나 지상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별로 한 일이 없으나 다만 “낙태와 동성애 권리의 도덕 전선에서 용감히 싸웠다”고 평한다면 우리 마음이 어떨까?
l        미국역사-적어도 정사-를 보면 교회와 정부는 최근까지만 해도 밀월 관계를 즐겼다.
l        친구에게나 적에게나 기본적인 예의를 똑 같이 지킨다.
l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관여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비둘기처럼 지혜롭고 뱀처럼 순결할’ 때가 너무 많았다. 사회가 교회의 기여를 존중해 주기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선택에 좀더 지혜를 보여야 한다.
l        교회는 하나의 저항 세력 즉 정부의 막강한 위력에 대한 균형 세력으로 존재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정부와 친해질수록 메시지는 그만큼 희석된다. 국가교회로 귀속될 때 복음은 변질된다.
l        정부가 장려할 수 있는 것은 선이지 거룩함은 아니다.
l        정치가 교회에 덫이 된 이유는 권력이 사랑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l        정치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는다. 반대로 예수님의 사랑은 그 선을 끊고 은혜를 베푼다.
l        언행 일치의 작은 훌륭한 모본과 희생적 섬김은 수백만 마디의 입바른 진실의 말에 버금가는 것이다.
l        권력의 사다리는 위로 가지만 은혜의 사다리는 아래로 임한다.
l        루이스의 말처럼 내세를 가장 강하게 의식하고 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도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왔다.
l        어린 나도 주일 아침이면 하나님과 주변 성도들이 보라고 멋지게 차려 입고 예쁜 짓만 골라 가며 했다. 교회가 정직해도 되는 곳임을 전혀 몰랐다. 이제 은혜의 렌즈로 세상을 보니 불완전이야말로 은혜의 선결 조건임을 깨닫는다. 빛은 갈라진 틈으로만 새어 든다.
l        분명 우리에게도 타고난 밝음이 조금은-아무리 조금일지라도- 있을 것이다.
l        상처와 흠집은 은혜가 흘러 드는 틈이다.
l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줄에 매달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매듭을 지어 다시 묶으시고 자연히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 계속 줄을 끊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다시 묶어 우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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