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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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자녀친구, 부모친구'-그 후의 이야기

2006.10.27 05:12

오연희 조회 수:914 추천:186

작년 봄 한국 방문길에 미국오기 직전에 살았던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필자의 아이들이 뛰놀던 놀이터 앞에 이르니 지난 시간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졌다. 아파트 길 건너 아이들이 잠시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나며 엄마들끼리 어울려 애들 학교교실 청소하러 가던 일 선생님께 돈봉투 바치러 갈 때의 떨떠름했던 기분 운동회 날의 활기찬 풍경 등등… 이런저런 감회에 젖었다.

무엇보다 아파트 아래위층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분들과 아파트 주위를 조잘거리며 뛰어다니던 동네 아이들의 얼굴이 떠 올랐다. 그리웠다.

3년 전 딱 이맘때쯤 바로 이 지면을 통해서 '자녀친구부모친구' 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때 글 속에 등장했던 아이가 있다.

"다섯 살인 필자의 아들이 아파트에서 가장 절친하게 지내는 바로 아랫집에 사는 아들의 볼을 물었다. 살이 유난히 많은 그 아이 볼에 필자 아들의 잇빨 자국이 고스란히 피멍이 되어 나타났다. 이웃집 엄마는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녔고 그 잇빨 자국이 없어지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그런데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그 후로도 변함없는 진실된 이웃의 정을 나누어 주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이웃으로 필자의 가슴에 남는 것은 그 어머니의 너그러움과 참을성 때문이다."

당시 그 반대의 입장에 처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참으로 옹졸한 마음을 품었던 필자에 비해 마음의 깊이가 훨씬 성숙했던 내 추억 속의 그 이웃과 그리고 그 아들이 그리웠다. 사택이었던 그 아파트에 몇 해 같이 살다가 그 이웃가정이 먼저 아파트를 떠나 여러 번 거처를 옮겼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족이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어 연락이 끊겨 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변했을까…한국방문 스케쥴이 빡빡해 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국에 들어왔지만 그 이웃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어디 한번 찾아보자' 마음을 굳혔다. 그 이웃 분의 한 친구가 아파트 근처에서 약국을 하고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 났다. 마침 한국 갈 일이 생긴 남편에게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어느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그 친구의 말을 전해주었다. 학교 이름을 알았으니 일단 성공이었다.

인터넷을 사용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00중학교가 그리 여러 곳에 있는 줄 몰랐다. 실망스러운 내용들만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만 둘까 하다가 다음날 다시 찾아 보았다. 한참을 헤매던 중 경기도에 있는 00 중고등학교 사이트 교직원 명단에서 눈에 익은듯한 이름 앞에 딱 멈췄다. 가물가물하던 그 댁 아빠 이름이 되 살아났다. 즉시 학교로 전화를 했다.

"OOO 선생님 계세요?"

지금 없다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미국이며 이런저런 사연으로 통화를 좀 하고 싶다고 했더니 당장 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가슴이 왜 그리도 벅차던지 호흡을 가다듬었다. 분명 그때 그 목소리였다.

"나…나에요…"

"누구…"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어떻게…세상에…어떻게 알구…어떻게…"

'어떻게'만 연발했다.

올 봄 필자는 00 중고등학교 사택에 살고 있는 그 이웃분과 교정 안을 거닐며 십오년이라는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울다 웃다 깔깔거리다 왔다.

모든 인연에는 크든 작든 넘어야 할 고비가 오기 마련인가보다. 오해의 벽을 넘거나 이해의 폭을 넓히거나 간에 그 고비를 뛰어넘지 못하면 틀어져 버리는 인연이 된다. 아무리 아이의 일이라 하더라도 부모의 태도에 따라 관계는 달라지게 된다.

상대에게 아픔을 주었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또 미안해 하는 그 마음을 받아주는 너그러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인터넷사이트를 통해서 찾아낼 수 있었다는 말을 들은 그 이웃은 그날부터 컴맹탈출을 선언했다. 이제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옛정을 이어가고 있다.


신문발행일 :2006.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