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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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너의 아들이'

2005.09.13 04:00

오연희 조회 수:591 추천:82

아들 아이가 어느날 백인 친구인 Peter의 아빠는 Peter 을 "Hey! Friend!"라고 부르는데 우리 아빠는 아들에게 "난 네 친구가 아니란다" 라고 했다며 권위적인 아빠에 대한 반감을 슬며시 비췄다. 아들을 "친구"라고 불러주는 Peter 아빠가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아들이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는 "아빠 밥 먹었어요?"하고 물으니 어른한테는 "밥 드셨어요? 라고 해야 한다며 부드럽게 타이른다. 아들이 대뜸 다른 친구들은 그냥 "아빠 밥 먹었어?" 하며 말을 놓는데 자신은 엄마 아빠한데 늘 존칭어를 써 아이들이 이상하게 여긴다며 한마디 덧붙인다.

전화를 끊은 후 남편은 아들에게 못다한 말을 필자에게 한다. 원래는 "진지 드셨어요?" 라고 해야 하지만 그건 너무 지나친 것 같아 한수 낮춘 것이라며 존대말에 대한 유익론을 들먹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미국에 온 필자 아들의 한국어 실력은 참 어설픈 편이다. 한국 학교 열심히 보낸 덕에 의사소통에는 별 무리가 없지만 조금 어려운 단어나 존칭어에 대한 훈계라도 나올듯한 분위기이면 어떻게 이 순간을 모면하나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존대말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아들이 토요 한국학교를 다닌다는 어느분에게서 들은 사연이 생각난다.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고 있기에 아이가 한국말을 배우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열심히 한국학교에 보냈다. 힘들지만 조금씩 늘어가는 맛에 아들도 보람을 느끼고 부모도 흐뭇해 하던 차에 어버이날을 맞았다.

아들은 한국말로 어버이 은혜에 감사하다는 사연을 구구절절 써 내려갔다. 문장실력도 그만하면 괜찮고 맞춤법도 문법도 틀린 곳이 거의 없는 어버이의 노고에 감사 드리는 편지를 읽으며 아들이 너무도 대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너의 아들이…".라는 말에 '뜨악'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우리 자녀들의 한국말 표현에 얽힌 사연을 내놓을라 치면 배꼽 잡을 만한 사연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말하는 아이들의 재미있는 표현에 대한 경험을 나누는 자리는 늘 웃음 바다가 된다.

하지만 자녀들이 성장할수록 부모님들의 바람은 커져 간다. 영어는 당연히 잘해야 하고 거기에다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알아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부터 장래를 위한 이중언어의 유용함을 들어 한국말을 배우게 하려는 부모와 토요일은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자녀들과의 신경전을 경험한 가정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말 따라가기도 버거운데 존칭어까지 신경 쓰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 이라는 분도 있다. 하지만 잘하는 한국말은 아니더라도 존칭어를 넣어서 말하는 아이를 보면 흐뭇한 것은 사실이다.

영어는 말속에 들어있는 호칭이 거의 수평 관계다.

반면에 수직관계를 나타내는 한국말의 존칭은 때로 사람 사이에 거리감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미국식을 따른다며 아들이 아빠를 친구 대하듯이 이름을 부른다던가 아빠가 "헤이 친구" 하고 아들을 부른다고 진정한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대화가 통한다는 면에선 친구 같은 부자간 또는 모녀간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임과 권한의 관계면에서 생각해보면 "친구" 라는 말이 그리 편안하게 받아 들여 지지가 않는다. 부모나 자식이라는 각자의 위치에 맞는 책임을 다하면서도 어떤 공통화제나 공통의 취미 앞에선 친구 같은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라면 가장 이상적일 것 같다.

영어로 생각하고 공부하고 꿈꾸는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더구나 존칭어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 마음이 통하면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친구라고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친구라는 말의 우리만의 개념을 고집하기도 점점 힘들어 지고 있다. 미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콘트롤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흙이 말랑말랑할 때는 원하는 모양의 그릇으로 만들기가 수월하지만 단단하게 굳어버린 후 바꾸려면 깨지고 만다.

요즘 필자는 깨져버릴 것 같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들이랑 줄 당기기 하고 있는 중이다.





신문발행일 :2005. 0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