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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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뜨거운시골 따스한추억"

2003.10.03 04:15

오연희 조회 수:484 추천:53

뜨거운 시골  따스한 추억(1)



  라디오나 TV에서 살인적인 더위라고 아우성을 치던 한국의 여름 날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미국 오신 친정 부모님께선 한동안 LA 사시는 오빠네 계시다가 나의 집에도 다니러 오셨다.
  첫날은 미국 사는 셋째 딸 어떻게 해놓고 사나 집 안밖을 요모조모 살피시며 마냥 즐거워 하셨다.  하지만 다음날 유난히 더위를 타시는 친정어머니께선 미국땅이 이리 넓고 넓은데 어째 이리 고약한 동네에서 사느냐고 한마디 하실 땐 슬그머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자동 온도 조절기를 맞춰놓고 24시간 켜놓은 에이컨이 한번의 쉼도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전기료 좀 절약할까 하여 에어컨을 꺼놓은 채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가는 날은 숨이 컥컥 막혀서 사람이 죽겠는데 뭔 돈이람 하며 당장 에어컨 끄고 나간 것을 후회하곤 했다.
  하루 종일 집안에 켜놓은 에어컨 탓인지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서 친정아버님은 가끔씩 밖에 나가서 몸을 덥히고 들어오시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님은 바깥의 후끈한 더운 바람 들어온다고 얼른 문닫으라고 성화셨다.
친정 어머님의 그 말씀을 들으니 살을 에이는 추운 겨울 밤 시골의 작고 어두운 안방 아랫목에 앉아계시던 외할머니께서 바깥 찬바람 들어온다고 “퍼뜩 문닫으래이...” 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했다.
한국의 그 매섭던 찬바람처럼 미국의 후끈한 더운 바람도 에어컨을 하루 종일 가동해야만 하는 엄청난 더위 앞엔 구박덩어리가 된 것이었다.  친정 어머니 말씀마따나 고약하게도 더운 시골에 와서 렌트 살게 된 집의 주인이었던 미스터 라이트를 처음 만난 날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근처 중학교의 수학 선생님이었던 미스터 라이트씨는 가슴에 털이 부숭부숭하니 웃통은 걸치지도 않은 채 짧은 반바지 하나 달랑 걸치고, 금발머리 고무줄로 질끈 묵고, 한쪽 귀엔 커다란 링으로 된 금 귀걸이를 달랑 달고, 발가락이 갈라지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그리고 ‘멜라니’라는 엄청나게 큰 개를 끌고는 나타난 것이다.
한국의 학교 선생님 이미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웬 건달놈인가 싶어서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더위에 옷 매무새 갖춰가며 사는 것이 뭔 실속 없는 일인가 싶어 그냥 편할 데로 생각하다 보니 큰 길가에 수영복차림으로 활보하는 아줌마의 모습도, 젖무덤만 살짝 가린 채 샤핑몰을 활보하는 여자들의 모습도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찌던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몸이 끈적하니 갑갑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에어컨이 고장 난 것이었다.   밤새 몸을 뒤척이다가 다음날 아침 바로 미스터 라이트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연락을 받자마자 오늘 내로 기술자를 집으로 보낼 것이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고쳐질 때까지 모든 경비를 부담할 터이니 우리 가족 모두 호텔에 가서 지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호텔비를 지원하겠다는 주인아저씨의 연락을 받곤 어리벙벙해졌다. 언뜻 얼마 전 시카고의 엄청난 겨울 추위로 인해서 사람들이 얼어 죽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미스터 라이트는 더위도 비상사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렌트사는 입장에선 무엇보다 주인의 즉각적인 조치를 보며 그의 마음씀이 참으로 고맙게 여겨졌다.
주인 아저씨의 아내인 미시즈 라이트는 음악 선생님이었는데 50년 이상 된 피아노를 4대나 집안에 두고 그것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를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의 아이들에게 자랑하곤 했었다. 그럴 때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듯한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아이들이 바이올린으로 그 도시의 청소년 오케스트라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더욱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혹 만날 기회가 생기면 함께 피아노를 치며 노래도 하고 가끔 영어도 가르쳐 주면서 참으로 따스한 집주인과 렌트 사는 가족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미국에서도 가장 더운 애리조나의 한 조그만 도시에 살면서 우리 가족은 그 엄청난 더위에 점점 익숙해져 갔고 여러모로 살기 좋은 동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유난한 더위 때문에 좋은 환경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미국 와서 처음 살게 된 곳이라, 그리고 이웃들과도 소록소록 정이 들다 보니 사람 사는 것이 별거냐 싶은 맘이 들었다.  도시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30분 정도면 어디든지 다다를 수 있는 작고 조용한 도시였다.
초등학교 2학년과 4학년이었던 내 아이들은 과외를 시킬만한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교할만한 또래 한국 애들도 드물어 애들이나 엄마인 나나 그리 조급한 마음 없이 느긋한 미국의 시골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공짜 스쿨버스가 애들을 집 문앞까지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고 하니 난 나대로 애들 학교 간 동안 마음 놓고 공부하러 다닐 수가 있었다.
그 곳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뭔가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곤 했지만 아무래도 영어가 짧으니 그냥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이웃 분께서 라이프 케어 센터(Life Care Center)라는 곳에서 자원봉사자가 필요한 듯 하니 한번 가보라고 귀띔해주었다. 집에 하루 종일 있어봐야 영어가 느는 것도 아니고 미국인들 틈에서 부대끼다보면 한마디라도 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라 뭔가 보람도 있을 것 같아 선뜻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라이프 케어 센터에서의 첫 날은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고 그리고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까 봐 긴장한 가운데 쭈뼛거리다가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미국 땅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도 기뻐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 곳은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으신 분들이 사시는 날 동안 치료와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시는 곳으로 병원과 양로원을 겸한 정부소속 치료센터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2편에 계속




뜨거운 시골 따스한 추억(2)



영어도 변변찮고 정식직원도 아니다 보니 그리 책임감을 가져야 되는 비중 있는 일은 주어지지 않았고, 몸이 불편한 분들의 휄체어를 몰고 산책을 시켜주거나 식당에 모시고 가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주는 일들을 했다.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엔 종이 꽃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하면서 만들어 본적이 있는 일이라 어머니날엔 혼자서 카네이션 수백 송이를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 내서 직원들을 놀래켜 주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한 시간엔 여자 환자들 손톱에 메니큐어를 칠해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왜 환자들에게 메니큐어를 칠해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시키는 일이기에 나의 친척할머니라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그들과 의자를 마주보고 앉아 한 사람씩 그녀들의 손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정성껏 메니큐어를 칠해주었다. 그녀들의 손을 잡고 메니큐어를 칠하는 동안 잡은 손의 체온을 통해서 서로를 느끼며 마음을 열게 되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곤 하곤 했다.
내가 그곳에서 본 환자들 중에 가장 젊어 보였던 30대의 그녀는 손가락에 큰 다이야 반지를 끼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반지에 눈길이 멈추자 그 반지는 자신의 남편이 해준거라며 환한 웃음으로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자신의 사연을 들려 주었다.  
아들 딸 낳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근육이 죽어가는 불치의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정부 혜택을 받으려고 이혼을 했으며 이혼 후 남편과 자신의 두 아이들이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한다며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물론 이혼 후 그 남편은 재혼을 해서 자신의 두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내 가슴에 젖어 들었다. 난 그녀의 손톱에 그녀가 선택한 새빨간 메니큐어를 나의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칠해주었다.
병원 복도에 나가면 늘 많은 환자들이 붐볐다.  그분들 중 휠체어에 몸을 간신히 지탱했지만 늘 빙긋이 웃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다정하고 선해 보이셨던 할아버지가 계셨다. 다리가 한쪽 없으신 그 인상 좋으신 할아버지에게 ‘하이!’ 하고 인사를 하면 반가워 하시며 내 손을 꼭 잡으시고 한참을 바라보셨는데 너무 쎄게 잡아서 어찌나 아프던지 다음부터는 멀찍이 다니곤 했다.
어느 날 그 할아버지가 침대에다가 똥을 싸서는 온데다 뭉개놓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런 일을 도맡아 하는 간호원이 쏜살같이 달려가서 할아버지를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서 뒤치닥거리를 하는 모습을 멀건이 보고 있었더니 매니저 아줌마가 어제 돌아가신 몇 분의 옷이 저쪽 봉지에 있으니까 좀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옷들이 봉지 안에 들어 있었지만 바로 어제 죽은 사람의 옷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섬뜩하고 잠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왠지 그 할아버지도 머잖아 이렇게 옷을 벗어 놓고 떠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 할아버지 일로 정신없이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데 유난히 눈에 뜨이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얼굴 표정이 어찌나 오만하고 당당해 보이던지 오며 가며 슬그머니 피하곤 했다. 대충 할 일을 마치고 늘 메니큐어를 칠해주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여러 할머니들이 게임도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으려니 아까 그 유난스러워 보이던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보통 때 같으면 지금 들어오신 그 할머니한테 ‘메니큐 어 칠해주랴?’ 하고 물어야 되는데 어쩐지 근접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살짝 밖으로 나가서 자원봉사자를 관리하는 매니저 아줌마한테 은근히 그 할머니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 할머니는 평생 교직에 계셨던 분이며 교장을 오랫동안 했는데 어찌나 혼자 잘났는지 늘 불평에 가득 차 있다면서 이 병원에서도 감당할 사람이 없어 거의 제쳐놓은 분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때까지 몇 명 되진 않지만 내가 만난 미국인들은 정말 친절한 분들이어서인지 그런 부류의 미국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일단 그 할머니에 대해서 대충 알긴 했지만 말을 붙이기가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나의 시원찮은 영어실력을 빈정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 고개를 살짝 들다가 그만 그 할머니의 눈과 마주쳤다. 한 수 내려 깔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을 보니 기분이 착잡해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코쟁이들한테 이렇게 자존심 상해가면서 계속해야 하나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웃음까지 띠고는 그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메니큐어 칠해드릴까요?”하고 물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뜸 “너 미국 왜 왔니?” “너의 나라 돌아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주 짧은 순간 목에서 울컥하는 것이 올라왔다. 하지만 잠시 후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차분해짐을 느꼈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었다.  더욱 바싹 다가가서 슬쩍 손을 잡으려고 하니까 내 손을 탁 밀쳐내는 것이었다.  당황했지만 슬며시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난 그녀의 눈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아이 러브 유” 하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말 마음에 없는 소리인게 분명한데 그 말을 하고 나니 뭔지 모르지만 가슴이 가득 차는 승리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젠 내가 할 것은 다했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잡다한 생각에 잠깐 잠겨있는데 그 할머니가 손을 슬며시 내 무릎 쪽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부드럽게 그녀의 손등을 만져보았다. 80세가 가까워 보이셨던 그 할머니의 손은 검버섯이 피고 쪼글쪼글했지만 무척 따스했다. 아기처럼 손을 내밀었던 그 할머니는 매주 세 번씩 내가 갈 때 마다 많이 기다렸다며 빙긋이 웃었다.
어느 날 우리 가족은 갑자기 다른 도시로 이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 병원의 자원봉사자 담당 책임자에게만 전화 한 통하고 그 곳을 떠났다. 요즘도 가끔 7년 전 그 할머니의 나를 내려 깔던 처음의 눈빛과 그리고 나를 기다렸다면서 웃던 그 선한 눈빛이 떠오른다. 그녀가 생각날 때면 잘난 척 하는 사람이 그 속마음은 가장 외롭고 그리고 따뜻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질끈 묶은 노랑머리에 한쪽 귀걸이 달랑거리던 주인아저씨 미스터 라이트, 고물 피아노 앞에서 행복해 하던 미시즈 라이트, 다이아 반지의 추억으로 아픔을 달래던 30대의 불치병 아줌마, 똥을 뭉개던 외다리 할아버지, 그리고 잊지 못할 그 별난 할머니까지, 내가 살던 그 미국 시골동네는 끔찍하게 뜨거웠지만 늘 내 가슴을 따스하게 적셔주는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2003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