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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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목욕 같이 간 사이잖아요'

2005.10.03 03:28

오연희 조회 수:525 추천:62


미국 살면서 1세인 부모와 1.5세나 2세인 자녀들과는 문화차이로 인하여 부딪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목욕문화가 우리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은 편이다.

목욕탕과 함께 있는 화장실 바닥에 물내려가는 구멍이 없어 불편했고. 매일의 샤워에 한번 사용한 수건은 빨래 통으로 직행하는 것이 낭비로 보였는데 이젠 이곳 생활에 많이도 익숙해졌다.

이곳 방식대로 편안해 지긴 했지만 어쩌다가 한국 가면 공중목욕탕 가서 묵은 때를 시원하게 벗기고 오는 것이 꼭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되었다.

요즘은 한국의 목욕문화도 많이 달라졌지만 필자의 어린시절 엄마 따라 공중목욕탕에서 몇 시간씩 보내고 난후 목욕탕 문을 열고 나올 때의 그 상쾌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답답한 탕 안에서 고만고만한 딸 넷의 때를 모두 벗겨주던 엄마가 생각나면 그리움이 와락 밀려온다.

때 안 밀겠다고 징징대면 뻥튀기 사주겠다고 달래가며 온몸이 벌겋토록 닦아주시던 어머니 여든을 바라보시는 요즘은 관절염으로 팔이 많이 아프시다.

제 작년 한국 갔을 때는 그 시원찮은 팔로 기어이 내 등을 밀어 주며 즐거워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엄마 앞에서는 옷을 스스럼없이 벗는 나와는 다르게 필자의 딸은 어디서든 문을 꼭꼭 닫고 옷을 갈아입는다. 엄마를 향해 닫혀있는 딸의 마음 같아 섭섭함을 느낀 적도 있다.

한국식 목욕탕이 곳곳에 있는 LA로 이사 온 지가 4년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딸이 그리고 아빠와 아들이 서로 등을 밀어주던 예전의 그 정겨운 광경이 너무도 아름답게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절실해졌고 아이들에게 슬슬 운을 떼기 시작했다.

옷을 다 벗고 들어가는 한국식 목욕탕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아들과 딸은 "잘 다녀오세요" 하면서 기겁하듯이 자리를 피해버린다.

우리 목욕문화의 아름다움을 내세우며 몇 번 더 권했더니 아직은 아니라는데 왜 그러냐며 짜증을 내길래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몇 주전 수영복 입은 딸과 함께 목욕탕에 들어온 어느 엄마를 본 순간 바로 저거구나 싶어 방학을 맞아 집에 온 딸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첫날만 무사히 넘기면 알아서 옷을 벗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마침 음악을 전공하는 딸이 오랜 연습으로 인하여 어깨가 결린다고 했다. 바로 이때다 싶어 몸을 풀어주는 데는 한국식 사우나가 그만이라며 설득을 시작했더니 "비키니는 입고" 라는 단서를 붙이고 딸이 따라 나섰다. 겉옷 안에 비키니를 입고 나서는 폼이 완전히 수영장가는 분위기다.

목욕한 후의 그 산뜻한 기분을 맛보면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비키니 입은 딸과 함께 탕 안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탕 속에 들어앉아 노닥거리니 딸도 엄청 좋은 모양이다. 소금탕 쑥탕 열탕 골고루 데리고 다니며 기분을 맞춰주니 그 동안 안 하던 속 이야기도 마구 쏟아진다.

그렇게 달콤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쯤 한 아줌마가 기세 등등한 태도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 오더니 수영복을 입고 들어오면 어떡하냐고 심하게 나무랐다. 우리는 탕 안에 쥐구멍이 없나 찾아봐야 될 지경으로 무안했다.

얼른 끝내고 나가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곧 이어 두 사람의 때밀이 아줌마가 한꺼번에 들이 닥쳐서는 더 심하게 퍼부었다. 목욕문화 극복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결국 그 중 한 분이 우리의 사정을 전해 듣고 세 명이 마구 몰아 세운 것에 대해서 사과를 표명했고 필자 또한 목욕탕측 입장을 이해하게 되어 마음을 풀게 되었다.

하지만 딸에게 또 가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 주가 지난 후 혹시나 해서 은근히 딸의 심중을 떠보았더니 의외로 반응이 괜찮다.

온 몸을 푸근하게 감싸주는 뜨끈한 탕 속에서 엄마랑 수근 대던 시간이 좋았던 모양이다. 눈치만 보고 있었더니 비키니 입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문을 꼭 닫고 옷을 갈아 입던 딸이 이젠 엄마가 있으면 문닫을 생각을 안 한다. "얘는 문도 안 닫고.." 하면 "목욕 같이 간 사이잖아요." 하며 킥킥 웃는다.

ohyeonhee@hotmail.com


신문발행일 :2005. 10.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