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 정호승

2014.06.18 20:45

박영숙영 조회 수:193 추천:27

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그는 /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 주지 않고
뿔뿔히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 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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