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溪 朴堧(난계 박연1378-1458)

2011.11.08 01:03

박영숙영 조회 수:1474 추천:104

蘭溪 朴堧(난계 박연1378-1458)의 墓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산 49-1

박연은 137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밀양 박씨이고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이다.

생원시와 문과급제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세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난계 박연은 1405년(태종5) 28세에 생원이 되었고 34세 1411년(태종11) 때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를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하자 난계를 관습도감 제조로 임명하여 음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1425년(세종7) 관습도감의 악학 별좌로 2월부터 시작하여 1430년(세종12) 12월에 걸쳐 한권의 악서가 만들어졌으나 음악에 대한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지 않아 악률 사용법 조차 없어질까 염려되어 악서의 편찬이 시급함을 느끼게 된 바 그는 즉시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보법 및 악기의 그림을 실어 한권의 악서를 만들었는데 이 책은 예조 봉상시 악학관습도감 아악서에 각각 한권씩 소장되어 있다. 박연은 많은 아악기를 제작하였는데 석경을 비롯하여 생포, 방경, 훈축, 토악, 대고, 영고, 뇌고, 노고, 죽독, 건고, 편종 등 모두 옛 제도에 맞도록 제작, 혹은 개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악기 제작보다는 여러 악기의 율조에 더 의의가 있는 것이니 악기의 조율이 완전히 되어야 비로소 139개의 악기합주가 깨끗한 화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악기의 율조에 필요한 것은 편경인데 경은 돌로 만든 것으로 쇠로 만든 종같이 춥고 더운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 음이 불변하기 때문에 이에 다른 여러 악기가 조율된다.

또한 편경의 율조에 필요한 것은 12율관인데 편경은 율관으로 조율되어야 하며 율관 제작에 필요한 것은 거서(기장이라는 곡식이름)였다. 세종 7년에 마침 기장이 해주에서 나오고 경석이 경기도 남양(현재 화성군)에서 나와 같은해 8월에는 예조의 요청에 의하여 채석해다가 시험 제작하였고 1427년(세종9) 5월 드디어 12매 한틀의 완성을 보았다. 이 편경은 중국 황종의 경을 표준하였고 웅진에서 산출된 기장으로 삼분손익법에 의하여 12율을 제작한 것이다.

또한 세종실록 59권(세종15)에 의하면 박연의 감독하에 세종 8년 가을부터 세종 10년 여름까지 종묘와 영녕전 및 제사에 통용할 편경과 등가에 쓸 편경, 특경 등 528매를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경은 중국의 경보다 더 잘 맞는다고 하였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였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하도록 하였고, 1431년(세종13) 박연은 남급 정양과 함께 조회 악기를 제작하여 왕에게 올렸고 정월하례에 새로 제정된 아악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는데 이 때의 궁중의식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매우 찬연한 것이었다.

세종은 그들에게 새로 만든 아악의 공으로 안마를 하사 하였다. 그 뒤 회례아악의 시작되어 1433년(세종15) 정월 1일 근정전에서 회례연이 있었을 때 융안지악, 서안지악, 휴안지악, 문명지곡 등 새로운 아악 또한 제향의 악이 모두 주나라 제도에 의거한 것인데 옛제도에 대하여 약간의 착오가 있어 이를 상소해서 바로 잡았고 종묘의 악 뿐 아니라 사직, 석존, 원구단, 적전, 선잠, 선농, 산천 등의 모든 제사악에 대해서도 옛제도와 틀린 것을 지적하여 정정하여 세종 20년대의 종묘악을 처음으로 정통적인 아악으로 확립하게 된 것이다. 세종 15년 7월에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되어 아악에 종사한 일도 있으며 그후 그는 공조참의와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1445년(세종27) 박연은 67세의 노인으로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가는 성절사로 다녀와서 인수부윤, 중추원 부사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1453년(단종원년) 수양대군에 의하여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계유정난 때 아들 계우가 처형되었고 박연은 3조에 걸친 원노였다는 점을 참작하여 화는 면했으나 파직되었다.

그는 늙어서 이런 비운을 당하게 되자 고향인 영동에 내려와 있다가 1458년(세조4) 3월 23일 81세에 돌아가니 그 유해는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안장되었으며 영조 43년에 문헌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 박 연

음악가 박연(朴堧)은 고려 우왕 4년인 1378년 8월 20일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고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문헌이다. 난계라는 호는 그의 정원에 난초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난계는 석경ㆍ편경 등의 아악기를 만들었으며 향악과 아악ㆍ당악의 악보ㆍ악기ㆍ악곡을 정리하고, 악서(樂書)를 편찬했다. 조선 초 태종ㆍ세종 때에 궁중 음악을 정비해, 국악의 기반을 구축한 인물이다.

박연은 1405년(태종 5년) 28세에 생원시에 급제한 후 1411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에 임명되었다. 교리는 정5품 벼슬이다. 그 후 박연은 집현전 교리로 일하면서 전악서를 찾아가 음악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러면서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1418년에는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의 문학이 되었다. 이때 박연이 가르친 세자가 바로 뒷날 세종대왕이 된 충녕이었다.

박연은 때때로 충녕에게 피리를 불어 들려주고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훗날 세종은 박연을 관습도감의 악학별좌의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하여 박연은 어릴 때부터 품어 온 음악에 대한 남다른 정열을 마음껏 발휘할 수가 있었다.

1431년, 정월 초하룻날 근정전에서 처음으로 조회 아악이 연주되었다. 여기에는 박연이 새로 만든 편경과 편종, 그 밖에 개량한 악기가 동원되었다.   박연은 종묘 아악에 쓸 악기를 만들어 종묘악을 완성했다. 그 제례악은 오늘날까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여지고 있다.

1433년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파직되기도 했다. 다시 아악에 종사, 공조 참의·중추원 첨지사를 거쳐 중추원 동지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중추원 부사를 역임했다. 단종 원년에 예문관 대제학을 마지막으로 지냈다.  

1456년에 '사육신사건'에 세 아들 중 막내 아들인 박계우가 관계되어 죽음을 당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피리로 달래던 박연은 1458년(세조 4년) 3월23일 81세를 일기로 향리 영동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피리를 잘 불었던 박연은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영동의 초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지금도 고향인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국악축제’가 열려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으로 < 난계유고 >와 < 가훈(家訓) >이 있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는 "난계사당"과 그의 묘소가 있다. 밀양박씨 후손들이 난계를 비롯 6위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도 있다.

박연의 유고집인 시문집은 1822년(순조 22)에 박연의 16대 손인 박경하가 펴냈으며, 발문은 김조순과 김노경이 썼다. 내용은 시·소·잡저이고 부록으로 시장이 있다. 시장은 유학이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들의 시호를 정할 경우 의논하여 임금에게 아뢸 때,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을 말한다. 임금이나 직위가 높은 관리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리는 신도비명도 실려 있다. 이 가운데 39편의 상소문은 거의가 악기·음률·악제 등 음악에 대한 것들로 < 세종실록 >에서 뽑아 낸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903년(광무 7)에 후손인 박심학이 수집하여 다시 편찬했다. 조선 전기 세종 때의 음악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밀양박씨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신라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8대군중 박언침으로부터 세계가 이어져, 단일 본관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박씨는 중시조 언침이 밀성대군에 봉해진 연유로 해서 본관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문하시중공파, 8세손 언상 도평의사공파, 8세손 언인 좌복야공파, 8세손 언양 밀직부사공파, 8세손 천익 판도공파, 8세손 을재 좌윤공파로 크게 6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박씨로 분적하는 등 10여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각 계통별로 인맥을 살펴보면, 종파인 8세손 언부가 문하시중과 도평의사를 거쳐 밀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 영균(永均)을 비롯한 13개 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의 후손에서는 맏아들 원(元)의 계통과 밀성군에 봉해졌던 척(陟)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은 고려 우왕때 대사성과 밀직제학을 거쳐 뒤에 공신에 올랐으며, 문종때 경흥부사 거겸(居兼)은 의중의 손자이며 경빈(景斌)의 아들로 성종때 밀산군에 봉해졌다.

조선 정종의 부마로 지돈령부사에 오른 갱의 7세손 정원(鼎元)이 평안도사를 역임했고, 그의 종손 신규(信圭)는 호조판서를 지낸 후 청백리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 공민왕때 사헌부규정을 역임했던 현(鉉)은 평장사 효신(孝臣)의 8세손으로 조선개국과 더불어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 부사를 거쳐 안변부사로 나가 임지에서 생을 마쳤다.

특히 그는 성리학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으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현(鉉)의 손자 사경(思敬)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 겸 상장군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아들 침이 공민왕 때 전의판사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개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강생(剛生)의 손자로 세조때 정난이등공신에 책록되어 응천군에 봉해진 중손(仲孫)은 공조를 비롯한 4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에 개봉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남이 부사를 지냈고, 차남 미(楣)는 대사간과 예조참의를 거쳐 여지승람을 편찬했으며 시문에 현달했고,

막내 건(楗)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으로 5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밀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찬성공 신생(信生)의 현손 영(英)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주역(周易)·천문·지리·의술 등에 능통했으며, 무예에 뛰어나 용맹을 떨침으로서 중세의 명인으로 이름났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이 있었다.

어느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를 타고 남소문을 지나는데, 골목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부르므로 그가 말에서 내려 따라가니 집이 깊숙한곳에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그 여인은 그를 대하자 홀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귓속말로 "공의 풍채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인하여 비명에 죽겠소" 하였다.

무슨 뜻인가를 따져 물으니 미녀는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입은 옷과 타고온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갖고 살아온지가 해포가 되었습니다. 항상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많으므로 두려워 탈출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는 칼을 빼어 들고서 잠을 자지않고 있었는데, 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으로부터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큰 밧줄이 내려왔다. 그는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자를

업고 몇 겹의 담을 뛰어넘어 나와서는 여인이 붙잡는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달려 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와 무인의 노릇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고, 옷자락이 잘린 옷을 보이면서 항상 손자들에게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는 낙동강변에서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고 한다.

밀성군 광영의 손자인 낙촌공 충원(忠元)은 명종때 단종의 원령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 군수를 자청하여 부임해 가기도 했으며 그뒤 중종실록과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선조때 우찬성·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로 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이 세도가인 윤원형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한 계현(啓賢)이며, 계현의 손자가 영의정에 오른 승종(承宗)이다.

광해군의 폭정 속에서 영상에 올랐던 승종은 항상 오리알만한 큰비상을 차고다니며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이물건이 없어서 되겠는가"하며 광해군의 비리적 행동에 진정하지 못하고 흐느끼며, 폭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그는 아들 자흥(自興)을 불러 마음속에 있는 바를 써놓고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했다.

복야공파 언인(彦仁)의 후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악성>으로 손꼽히는 연(堧)이 뛰어났다.

삼사좌윤 천석(天錫)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종초에 문과에 급제한 연은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편경(編磬)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조정의 조회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하는 등 궁정 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조선 실학의 태두 제가(齊家)는 19세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덕무, 류득공, 이서구 등과 더불어 <시문4대가>로 일컬어졌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북학의(北學議)를 작성하여 기구와 시설의 개편, 불합리한 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 연암 박지원의 열녀 함양 박씨전

내가 안의현으로 부임한 다음해의 일이다.

바야흐로 새벽에 몇사람이 청사앞에 모여서 수군거리며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라고 물으니 “통인 박상효의 조카딸이 함양으로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지아비 3년상을 치르는 날 약을 먹고 죽게 되어 급히 구해달라고 하는 전갈이 왔으나 상효가 숙직이라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급히 가보라” 하고, 저녁에 “함양과부가 살았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들으니 벌써 죽었다고 합니다”라고 하니, 나는 그저 탄식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모든 아전을 불러놓고 “함양에 열녀가 났다는데, 너희들중 그녀의 신상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아전이 말하였다.

“박씨의 집은 대대로 이 고을 아전이었는데 아버지 상일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의 어미도 죽자 그녀는 조부모한테 자라 나이 열아홉에 함양 임술증의 아내가 되었으나 초례를 지른
뒤 반년이 채 못되어 술증이 죽었으므로 박씨는 예법대로 초상을 남편의 치르고 시부모에게도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양 고을 사람들이 어짐을 칭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과연 그 행실이 이제야 드러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건대 초상을 당하고 죽지 아니한 것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요, 장례가 끝나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소상(小祥)을 치르기 위해서요, 소상이 끝나고도 죽지 아니한 것은 대상이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대상이 끝나고 모든 상기(喪期)가 다 지나자 곧 지아비 죽는날, 그 시각에 맞추어 죽었으니 어찌 열녀가 아니겠는가.  

*. 고령 박씨-어사 박문수

암행어사 박문수(조선조 숙종17년,1691출생)는 고령 박씨로 지금의 평택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증조부는 이조판서(박장원)를 지낸 명문 출신이다.

박문수는 영조의 절대적인 후원에 힘을 입었으며, 후일 도승지, 호조판서, 병조판서, 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문학은 물론 재정에도 밝고 무예도 있는 천재였다. 그러나 암행어사 출도시 탐관오리는 벌벌 떨고 백성들은 열화같이 그를 반겨 지금도 암행어사 박문수로만 남아있다.  

박문수(朴文秀.1691-1756)는 본관이 고령(高靈)이며 도승지, 어영대장, 병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박문수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활달한데다 기지와 유머가 풍부했다.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한 박문수는 워낙 강직한 성격으로 바른말을 잘해 대중의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벼슬길에서는 기복이 많았다.

끝내 정승에 오르지 못한 것도 너무 흑백이 분명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 탓이었다. 그가 죽자 영조는 시호를 내리도록 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바른 말에 얼마나 넌더리가 났던지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해 <직간공(直諫公)>으로 지어 올렸다. 그를 아꼈던 영조가 이를 보고 껄껄 웃으며 <충헌(忠憲)>으로 고쳤다.

박문수는 암행어사 때 탐관오리를 내려치고 민생을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함경도에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는 경상도의 양곡을 실어다 이재민을 구호했다.

당시 그는 조정의 허락이 내려지기 전에 혼자의 결정으로 양곡을 풀었다. 주위에서는 나중에 말썽이 되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러나 그의 과단성 있는 결정이 없었다면 이재민 구호는 제 때 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소신이 남달랐던 그는 재정에 밝아 이 분야에서도 공적을 남긴다.

호조판서로 있을 당시 그 때까지 원칙도 없이 필요할 때 마음대로 쓰던 궁중의 경비를 일정한 원칙에 따라 지출토록 제도를 만들었다.

평소 박문수의 거리낌 없는 바른말을 좋아했던 영조는 박문수가 책정해 온 항목별 궁중 예산을 보고 더 줄이라고 격려했다. 국가 재정과 왕실 가계가 엄밀히 구분되지 않고 운영되던 당시 그가 만든 제도는 예산회계 제도의 효시가 된다.

영조는 왕위에 있는 동안 박문수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박문수의 고집과 강한 개성 때문에 벌어진 마찰을 감싸주고 그의 재주와 능력을 펴도록 해준 것이다.

박문수는 조정에서 임금 앞에서 허리만 굽힐 뿐 고개를 쳐들고 임금을 쳐다보았다.

다른 대신들이 박문수의 이 같은 행동이 불손하다고 탄핵했다. 그러나 영조는 “영성군(박문수)의 말이 옳으오. 군신 간에 너무 어려운 듯이 부복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 앞으로는 고개를 들고 임금을 바라보도록 하시오”하고 박문수 편을 들었다.

살얼음판 같은 벼슬길에서 박문수가 그 재능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영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문수는 군정과 세정에 밝았다. 저서로 <탁지정례(度支定例)>와 <국혼정례(國婚定例)>가 있다. 글씨는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있다.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 고령박씨 종중 재실에서는 박문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재실 안에는 박문수가 사용한 유품과 영정이 있다.

박문수의 손자인 박영보가 쓴 <수부정기>와 <박문수 일대기> 등의 전적도 보관하고 있다.

박문수의 묘소는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은적산에 있다. 수 많은 풍수사들이 최고의 명당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대나 유감스럽게도 어사 박문수의 묘는 명당이 아니다.  

우리나라 박씨의 본관은 문헌에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조 또는 중시조가 밝혀진 것은 70본 내외이다. 이 중 주요 본관은 밀양(密陽)·반남(潘南)·죽산(竹山)·함양(咸陽)·순천(順天)·고령(高靈)·무안(務安)·충주(忠州)·상주(尙州)·창원(昌原)·음성(陰城)·영해(寧海)·영암(靈巖)·진원(珍原)·고성(固城)·울산(蔚山)·운봉(雲峰)·춘천(春川)·비안(比安)·강릉(江陵)·월성(月城)·태인(泰仁)·면천(沔川)·삼척(三陟)·문의(文義)·장성(長城) 등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의 56대 세계(世系)는 박(朴)·석(昔)·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다.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과 일성왕 대에서 갈라진다.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면천·강릉 등으로 분파된다. 비안·우봉(牛峰)·이산(尼山)·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다.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경애왕 대에서 다시 갈라진다.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밀성대군파(밀양·반남·진원박씨 등), 고양대군파(고령박씨), 속함대군파(함양·삼척박씨 등), 죽성대군파(죽산·음성·고성박씨), 사벌대군파(상주·충주박씨), 완산대군파(전주·무안박씨), 강남대군파(순천·춘천박씨 등), 월성대군파(경주박씨)의 8대군파와, 국상공파(울산박씨)로 분파되었다.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하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다.

고령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둘째 아들인 고령대군 박기언을 시조로 한다. 고령박씨는 7세손 때 크게 번성하면서 어사공파, 부창정공파, 주부공파로 나누어진다. 오늘날 고령박씨의 인구는 많지 않다. 그러나 60여 개의 박씨 본관 가운데서 주축을 이루는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충주. 순천. 무안 등 소위 < 8박 >의 하나로 꼽힌다.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인 박문수는 숙종 17년 경기도 진위현(지금의 평택)에서 이조판서를 역임한 박장원(朴長遠)의 증손이자 영은군(靈恩君) 박항한(朴恒漢)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8살 때 아버지가 죽자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유성현 학하리 외가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었다.

본래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여 벼슬길에서 기복이 많았던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3세 되던 경종 3년(1723)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직에 올랐다가 이듬해에 병조정랑(정5품)이 되었으나, 노론이 집권하던 영조 원년(1724) 34세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영조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사서로 재임용되어 영남의 암행어사로
나가면서 부정한 관리를 많이 척결하면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경종이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이 잔병치레만 하다가 재위 4년만에 죽고 1724년 세제인 연잉(영조)군이 왕위를 잇자 전국 각지에서는 경종이 독살되었으며, 숙종의 자식도 아닌 영조를 내세워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자들에 의한 반역이라는 벽서와 흉서가 난무하였는데, 드디어 영조 4년(1728) 3월 청주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모반〉이 발생하였다.

이인좌는 숙종 연간에 영의정을 지낸 남인 권대운의 증손이자 유명한 윤휴의 손자 사위였는데, 그는 신임사화로 득세하였던 소론들이 영조의 즉위로 노론에게 밀려나자 남인들을 중심으로 영조 즉위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경상도에서 정희량(鄭希亮), 평안도에서는 평안병사이던 이사성(李思晟), 전라도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朴弼鉉), 총융사 김중기(金重器)등이 소현세자의 손자인 밀풍군 탄(坦)을 옹립하기로 하였으나, 소론인 대신 최규서(崔奎瑞)의 밀고로 모반사실이 누설되었다.

그 이튿날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자칭하면서 모반에 나서서 청주성을 함락하고 충청 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살해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안성.죽산으로 북상하다가 병조판서 오명항(四路都巡問使 吳命恒)을 토벌대장으로 한 관군에게 패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사성은 거사 직전에 체포되고 박필현은 전주로 진격하다가 이인좌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로 피신하였지만 후에 경상도 상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정희량도 이인좌의 거사 5일 뒤에 안음현에서 거사하여 거창,합천,함양,안음 4개군,현을 점령하였으나 경상감사 황준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토벌되었다.

어떻든 박문수는 사로도순문사로 임명된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분무공신 2등에 올라 영성군(靈城君)이 되었는데, 그 후 영조 6년(1730)에는 참찬관이 되었다가 다시 호서지방의 어사로 나가서 굶주린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였다.

그후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에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51세 되던 영조 17년(1741)에는 어영대장이 되었다가 다시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서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구제하였는데, 왕 21년에 다시 한양으로 와서 어영대장에 재임명되었다.

왕 2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단을 논하다가 충주목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는데, 그 후 세손 정(淀)의 사부를 하다가 28년(1752) 세손이 죽자 그 책임을 추궁 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서 의정부 우참찬(정2품)에 올랐다. 그는 영조 32년(1756)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군정과 세정에 특히 밝았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문수의 묘는 대부분의 풍수가들이 명당이라고 하나 유감스럽게도 명당이 아니며

근처 독립 기념관의 통일동산이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  박문수의 설화

박문수가 과거 보러가는 도중에 과천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다가와 “어디로 가는 길이냐” 고 묻자 “과거보러 한양을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백발노인이 말하기를, “이런 정신나간 사람봤나 과거시험은 이미 이틀 전에 끝났어”라고 말하자, 꿈속에서도 소스라치게 놀란 박문수가 되 물었다. “그럼 시제(詩題)가 무엇이었나요” 라고.

노인이 답하기를 “시제는 ‘낙조(落照)’라고 하는데, 금년 장원에 뽑힌 글은 다음과 같은데 끝 구절은 잊었다”고 하면서 7언절구로된 총 56자 중 끝구절 7자만 제외한 나머지 시를 읊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3일 앞둔 과거시험 날짜에 맞춰 과장에 들어서 긴장된 마음을 가누고 시제를 확인하니 사흘전 꿈속에서 그 백발노인이 현몽해 준 대로 ‘낙조(落照)’가 아닌가.

박문수는 노인이 꿈속에서 읊어준 7구절의 글을 쓰고 마지막 7구가 떠오르지 않아 애를 태우다가 문득 끝구절의 7자를 만들어 시제에 따른 시작(詩作)을 완성해 제출했다.

이 글로 시관(試官)들 사이에서 “사람이 쓴 글이 아니라 귀신의 글이다. 끝구만 인작이다”는 등의 시비가 있었으나 결국 장원급제해 관직에 올랐다. 이후 시기를 맞아 처음 호서(湖西)어사에 제수돼 석양께 천안에 당도했다. 그 때 어느 무덤 앞에서 슬피우는 소복 여인이 있어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슬피우는 이유를 물었다. 그 여인은 “간밤 꿈에 선친의 말이 노랭이 진사의 애비를 묻었으니 원통하다고 해서 실제와 보니 이렇게 되어 있어 하도 기가 막혀 울고 있다”고 말했다.

박 어사는 범인을 찾아 김일수의 시체를 거두어 원 자리에다 후장해 주었다.

이 일화에 얽힌 사연이 비약해 과거 전에 시제와 시구를 일러준 것에 연결이 되기도 한다. 즉, 박문수의 사람됨을 알아차린 김일수의 선명이 미리 현몽을 해서 과거급제케 하면 필연적으로 그 가문에 닥치게 될 한을 풀어주고도 남음이 있어 그 해결사를 박문수로 정해 천안 땅에 오게 했을 것이라는 구전설화에 바탕을 뒀다는 것이다.

그 후 박 어사는 날로 승차하며 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소론의 영수로서 시론(時論)을 바로 잡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잘해 별호가 ‘직간공(直諫公)’이다. 노경에 국풍과 같이 목천(木川)땅 흑성산하에 신후지지를 정해서 봉분을 지으려는 참에 그날 밤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박 대감 저는 김일수 올시다. 30년 전 은혜에 보답하고자 왔다. 대감이 쓰시려는 신후지지는 200년 후 나라에서 긴히 쓸 자리다. 대감의 만년유택은 저쪽 산 너머 은석산 아래의 ‘장군대좌형’의 대지명당이다” 라는 말을 마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박 어사는 현몽을 좇아서 은석산 아래 아우내 장터 위쪽에 자기 신후지지를 정하고 훗날 정명을 다해 타계한 뒤 그의 유택이 지금의 병천 위쪽 은석산 아래로 쓰여졌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문외한이 봐도 명당으로 보이는 목천의 그 자리는 ‘독립기념관’의 터가 됐다. 산도의 아우내 장터는 유관순 열사가 3·1독립운동을 일으킨 역사적인 땅으로 유명한데 그 병천시장은 ‘장군대좌형’의 병졸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고령 박씨들이 설치한 장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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