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김씨 외

2011.11.08 02:12

박영숙영 조회 수:1645 추천:102

개령김씨

시조 김현선(金玄繕)은 고려조에 장군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혹은 경주인으로 전할 뿐 세계를 알 수 없다.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에는 그가 개성김씨로 시조로 기록되어 있고,<개성김씨세보(開城金氏世譜)>에 고려조의 인물로 현기(玄器), 현덕(玄德)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조 김현선은 그들과 형제간으로 개성김씨에서 분적,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본관을 개령(開寧)으로 한 것 같다.

개성김씨

개성 김씨 시조 용주(龍株)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문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으로 책록되었고 개성부사를 거쳐 평장사를 역임한 후 개성군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은 의성 김씨에서 분적하여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손자 준(畯)은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 예종때 평장사를 역임하였으며 준의 세 아들중 차남 지경(之慶)이 상서를 지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滉)이 조선 명조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거쳐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아우 유(濡), 지(漬)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삭녕에 주둔하여 학행으로 유명했으며 조헌(趙憲)등 우수한 제자를 배출, 세상 사람들이 어촌선생이라 불렀다.

조선의 이름난 화가로 상의원 별제에 이른 응환(應煥)은 정종 12년 왕명으로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일본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가다 부산에서 죽었다. 이때 김홍도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여 장사를 치른 후 혼자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외 화가로 이름난 득신(得臣)은 인물화를 잘 그려 심사정(沈師 正)ㆍ정선(鄭敾)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로 불리웠고 그의 동생 석신(碩臣)은 풍속화로 유명했다.

결성김씨

결성김씨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이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녕김씨 시조 김시홍의 10세손 김연의 둘째아들 김예철의 후손으로 전하는 상주파 외에 <김씨분종보>에 의하면 이조판서를 지낸 김달손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가 있다. 후손들이 본관을 결성으로했다. 평북 위원군 화창면 문명리에 살던 위원파는 6·25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유실하여 중간 계대를 상고할 수 없다.

경산김씨

시조 김인궤(金仁軌)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8자 일선군(一善君) 추(錘:善山金氏 시조)의 아들 위옹(渭翁:三陟金氏 시조)의 9세손 윤성(允成)의 맏아들로서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전법총랑(典法摠郞), 호군전객령(護軍典客令)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이부상서, 좌복야, 상장군등을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육화(育和)를 1세조로, 본관을 경산(慶山)으로 하여 삼척김씨(三陟金氏)에서 분적했다.

고려 말의 김룡(金龍)은 이 집안을 대표하는 인물로 1세조 육화의 7세손이며 고려조에 문하시랑(門下侍郞), 태자태사(太子太師)등을 지낸 영수(英秀)의 증손이다. 그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녘으로 몽진할 때 중랑장으로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고,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해적의 노략질을 금하도록 교섭했다. 또 정료위(定遼衛)에 사신으로 가서 고가노(高家奴)와 수교를 맺는 등 외교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전고대방(典故大方)>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조에 찬성사를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김이(金怡)를 시조로 하는 춘양김씨(春陽金氏)가 있는데, 김이의 상계가 경산김씨의 시조 인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혈족이면서도 이의 출생지가 복주(福州)의 속현 촌양이기 때문에 사적(賜籍)지는 경산이나 출생지인 춘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춘양김씨가 경산김씨의 분적종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한 김한(金翰)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경산김씨가 문헌에 보인다.

경주(慶州) 김(金)씨


김알지계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인 경주김씨는 파계가 복잡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서로 계통을 알지 못하는 분파를 포함하여 대충 8∼9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파로는 은설공(殷設公)파, 태사공(太師公)파,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 영분공(永芬公)파, 호장공(戶長公)파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역사상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은설공파와 태사공파가 으뜸이며, 경주김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6명의 재상과 3명의 왕비가 모두 이 두파에서 나왔다.

은설공(殷設公)파


은설(大安君)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로 전한다. 이 은설공파는 고려 때의 장군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는 피가 대표적이다.

김순웅의 12대손에 김균이란 이가 있다. 그는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 등에 올라 좌찬성을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만 세 사람의 상신(相臣 : 재상급 신하)과 숱한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김종순(金從舜)은 김균의 손자로써 세조 때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 : 결백한 관리)에도 뽑혀져 있는데, 그 자손에서 대대로 어질고 훌륭한 신하가 잇달아 나왔다. 그의 아들 치운(致運)은 이조참판, 치운의 아들 천령(千齡)은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며, 천령의 아들 만균(萬鈞)은 중종 대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판서,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명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명원(命元)이 선조 때의 좌의정이다.

김명원(金命元)은 이퇴계의 문인(門人)으로 명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란공신(平亂功臣)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호조·예조·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그는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겸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공을 세우고 우의정이 되었다가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유학에도 깊었으며, 특히, 병서(兵書)와 궁마(弓馬)에 능했다. 그의 아들이 수렴(守廉)이며, 손자가 남중(南重)이다.

김수겸은 인조 때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역임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김남중은 광해군 때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효종 때 공조·예조·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김주신(金柱臣)은 만중의 손자다. 숙종 때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내면서 어진 관리라고 칭찬을 받았다. 그의 딸이 숙종의 비(妃 : 仁元王后)가 되자 국부로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총관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또 문장에도 뛰어났다. 김주신의 손자로 정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효대(孝大)의 아들이 사목(思穆)이다.

김사목(金思穆)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부승지, 호조참판을 거쳐, 정조 때 대사헌(大司憲)과 황해도·경기도·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김?집(金?集)은 사목의 손자다. 그는 헌종 때 좌참찬(左參贊), 의금부도사(義禁莩事)등을 역임했으며, 역사학에 밝았다. 김창희(金는昌熙)는 정집의 아들로써, 고종 때 벼슬에 올라 호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임오군란때는 청나라에서 온 사신을 맞는 영접관이 되고, 뒤에 공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역임했다. 김영작(金永爵)은 김사목(金思穆)의 조카로써 철종 때 대사헌·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시와 글에 능하며 소정집(邵亭集)이 전한다. 김홍집(金弘集)은 바로 영락의 아들이다. 그는 개화파(開化派)의 거두(巨頭)로써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면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뒤 사임했다. 그 뒤 동학혁명의 혼란을 틈타서 침투한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1∼2차 친일 내각이 성립되자 그는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써 갑오경장의 혁신정책을 수행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직후 제 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자 그는 단발령 등 과격한 개혁정책을 폄으로써 국민대중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은 국민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갖가지 사회제도의 개혁과 양력 사용, 종두법 및 우편제도의 실시 등은 우리 나라 근대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사공(大師公)파


고려말의 절개가 굳은 신하로 유명한 김자수(金自粹)는 태사공의 8대 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상시(左常侍 : 정 3품)에 이르렀다가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안동에 은거했다. 뒤에 조선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나라(고려)망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영유(金永濡)는 자수의 손자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지내고 황해도·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성종 때 두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개유 등을 지냈다. 김임(金任)은 김자수의 증손으로 사사를 지냈고, 세필(世弼)은 自의 현손으로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사화(士禍)때 마다 임금의 잘못을 규탄하다가 유배 되었다가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홍랑(金弘郞)은 자수의 8세손이다. 그는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그의 자손에서만 3명의 재상과 왕비 한사람이 나와 은설공파의 좌의정 김명원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김흥경(金興慶)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승지·대사간 등을 거쳐 경종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되었으나,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고,이듬해 우참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영조의 탄평책(蕩平策)에 반대 했다가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한개(金漢 )은 흥경의 아들로써 영조의 딸과 화순숨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도총관 제조(提調) 등을 지냈는데, 글씨에 뛰어나 八법을 다 잘써 애익주문(哀謚州文)을 자주 썼다. 김석주(金碩柱)는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김한개(金漢 )의 아들이요. 김석주(金碩柱)의 아들이 노경이다. 김노경(金魯敬)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 육(六)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순조 말엽에 권력을 전횡했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헌종 때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숨졌으며, 철종 때에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글씨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들이 김정희다.

김정희(金正喜)는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設書), 검열(檢閱), 암행어사(暗行御史) 등을 거쳐 헌종 때 대사성·이조참판에 이르렀는데,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3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는 등 정치적으로 많은 풍파를 겪었다. 그는 스물네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당세의 거유(巨儒)들과 사귀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했고, 서예(書藝)에 있어서는 역대 명필의 장점을 연구하여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어 전무후무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림에 있어서는 난초와 대, 그리고 산수가 뛰어났고, 사실(寫實)보다는 품격(品格)을 위주로 남종화(南宗畵)의 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북한산비(北漢山碑)가 종래에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것이라는 설을 부인하고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밝혀냈다. 그는 아호가 추사(秋史), 완당(玩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 백여개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순조 때 형조·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시와 글에도 뛰어났던 김어응(金魚應)은 노경과 4촌간이며, 그의 아들 김도희(金道喜)는 헌종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김한구(金漢耉)는 영조의 국부(그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貞純王后)로써 어영대장을 지냈다. 이 밖에도 순조 때 우의정에 오른 김귀주(金龜柱), 영조 때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김유경(金有慶) 등이 있다.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

중종 때의 학자인 김정(金淨)은 정랑(正郞) 효정(孝貞)의 아들로써 대표 인물인데, 그는 중종 2년에 문과에 급제, 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했다. 조광조(趙光組)와 더불어 미신의 타파, 향약(鄕約)의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시와 글에도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했다.

호장공(戶長公)파

고려 인종 때의 명신(名臣)이요 사학자로 유명한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이 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 때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있으면서 국부 이자겸(李資謙)이 군신(君臣)의 예의를 지키지 않으므로 이를 충고 했고,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했으며,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로써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난을 평정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오르고 뒤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을 마쳤다. 그는 문장으로도 이름을 떨쳐 당시의 송나라에까지도 크게 알려졌음은 물론 음악에도 퍽 능했다고 한다. 태위(太尉)의 벼슬을 지낸 부?은 그의 형이고 사공(司空)을 지낸 부의(富儀)는 그의 아우이다. 삼형제가 모두 당대의 손꼽힌 학자이고 명신으로써 함께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계림김씨

시조 김구사(金九思)는 경순왕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鐘)의 17세손이다. 그는 숙천부사를 지내고 계림부원군에 봉해진 김종(金琮)의 손자로 벼슬은 승정에 이르렀다.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그가 계림김씨 시조로 되어있다. 1805년(순조5) 대전두후평복(大殿痘後平復)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김경리(金璟履)의 본관이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계림(鷄林)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손들이 경주김씨에서 분적, 본관을 계림으로 한 것 같다.

고령김씨

시조 남득(南得)은 고려때 전리좌랑을 지낸 선(宣)의 아들로 고려 충해왕 1년에 진사가 되어 감찰집의를 거쳐 공민왕때 양광도 안렴사를 역임하고 판개성 부사문하평리에 올랐다. 그후 원나라에 가서 예부상서를 명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에 책록하고 고양부원군으로 봉하여 득어영남지의라고 사명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득의 아들 무(畝)가 대사간을 지냈으며 그의 4명의 아들도 모두 벼슬에 올라 나라에 충성했다.
장남 사행(士行)은 세종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거쳐 사복시정, 둘째 사문(士文)은 사헌부의 집의를 역임했으며 사충(士忠)과 사신(士信)도 승지와 군수를 지냈다. 사행의 맏아들 자숙(子肅)은 세종 11년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추천되어 형조참의에 이르렀고, 자숙의 아들 형생(型生), 장생(莊生), 양생(楊生) 3형제도 모두 벼슬을 역임했다. 장생의 아들 수는 중종 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군수를 지내고 진주목사를 거쳐 순천부사를 지낸 후 절충장군등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남득(南得)의 6세손 수문(秀文)은 중종 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후 종성에 침입한 야인들이 사람을 납치해 가자 영달만호로서 역전하여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왔다. 명종 10년 을묘왜변때는 제주목사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에 특진하였고 명종 1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걸쳐 호인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수문의 조카 면(沔)은 조선의 이름난 의병장으로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이며, 경원부사를 역 임한 세문(世文)의 아들이다. 정구와 가까이 지내며 이황문하에서 성리학을 연마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사퇴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 곽준, 문위(文緯)등과 거창,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금산, 개령간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에서 대치, 공격해 오는 적의 선봉을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 또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고 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 전라도의 의병과 함께 금산, 개령에 진주, 선산이 적을 칠 준비를 마치고 돌연 병사했다. 후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외 군자감정을 지낸 연과 판결사 양이 있고 무과에 급제하여 지훈련원사를 역임한 결(潔)이 유명하다. 자는 영조 18년 무과에 급제하고 하동군수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후 어영별장에 이르렀다.

고산김씨

시조 김환(金紈)은 윤옥(潤屋)의 아들로서 1510년(중종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는 사실 외에 다른 문적(文蹟)이 없어서 연원과 전후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의하면 이 씨족이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일곡리에 29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고산김씨(高山金氏)는 황간김씨(黃澗金氏)와 동원이거나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고산김씨 시조도 김환이라 되어 있고 또 황간김씨 시조 역시 김환이라 되어 있으며,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김환의 본관이 황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에는 황간이었는데 중간에 고산으로 개관을 하였거나 아니면 고산·황간을 병용하였던 것 같다.

고성김씨

시조 김말로왕은 김수로왕의 막내동생으로 설화에 의하면 구지봉에 다섯 형들과 함께 탄강하여 소가야국을 창건하고 도읍을 고성으로 정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고성으로 하였다.

가문을 이어온 대표적 인물은 김말로왕의 34세손으로 조선의 태조때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삼도수군 도절제사에 오른 빈길이 유명하다. 그는 태조 7년 멸악산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병조 판서,정헌대부를 거쳐 검교정승을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되어 낙안의 삼충사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희량은 조선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 부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희량의 동생 문량은 음보로 사직이 되어 태조 6년 문관에 급제하여 부사,도사를 지내고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니면서 외교적 공을 세워 예문관 교관을 지낸후 이조판서에 올랐다.

후손 경현은 이만주의 난에 어유소를 도와 공을 세우고 함길도 순문중군을 역임한 후 가선대부가 되었다.
세웅은 세조 13년에 이시애의 난에 북청하여 공을 세워 노성 현감을 지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선조때 왜적을 격퇴하여 수문장에 오른 사홍과 순천부사를 지낸 우추가 유명하다.

그외 효자로 이름난 복광은 향당에서 효행비를 세울 정도로 효행이 뛰어나, 성리학에서 평생을 바친 학자 민환과 함께 고성 김씨를 빛나게 하였다.

고양김씨

시조 김용한(金龍翰)은 경순왕의 후손이라 전한다. 그는 김진찬의 아들로 1755년(영조3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직강·정랑을 지냈다.

문헌이 없어 전후 세계를 알 수 없고, 또 본관을 고양(高揚)으로 하게 된 연유도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이 평남 평원군 동암면 용삼리에 21호가 살고 있었다.

공주김씨

시조 김의손(金義孫)은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김지대(金之岱)의 9세손이다.

<공주김씨세보(公州金氏世譜)> 에 의하면 경순왕의 제4자 은열(殷說)의 8세손 지대가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로 오산군(鰲山君:오산은 청도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청도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지대의 8세손 호강공(胡剛公) 김점(金漸)의 둘째아들 의손은 조선조에서 예조참판을 지내고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다. 의손에게는 여의(麗儀), 일동(逸東), 응동(應東),용(龍), 구(龜), 타, 봉(鳳), 기(麒)등 아들 8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용, 구, 타는 아버지의 작위를 따라 공주김씨로 분적하였고, 그 나머지는 청도김씨를 계승했다고 한다.

공주김씨는 의손을 시조로 하고, 용을 공주파(公州派), 구를 평양파(平壤派), 타를 곽산파(郭山派)의 1세조로 하고 있다. 용은 후손이 공주에 살았기 때문에 공주파, 구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공주의 부전촌(浮田村)에서 평양성 밖의 인현리(仁賢里)로 이거하였기 때문에 평양파, 타는 예조정랑을 지내고 청주로부터 곽산으로 이주하여 곽산파라 하였다.

공주김씨는 비록 역사는 짧지만 문과 급제자 10명, 공신 1명을 배출하여 관서지방의 저족(著族)으로 꼽힌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해군 때 부차(富車)의 전투와 인조 때 정묘호란 당시 순절, 오열사(五烈祠)에 제향된 김룡(金龍), 김무의(金務義), 김천경(金天慶), 김응철(金應哲), 김응삼(金應參)등을 들 수 있다. 김룡과 그의 종질 김무의는 1618년(광해군10) 명군(明軍)과 연합하여 건주위(建州衛)을 치기 위해 명나라에 원병을 파병할 때 김응하(金應河)의 막료로 참전, 심하(深河)에서 전사했다. 김천경과 그의 재종제 응철·응삼 등은 인조조 정묘호란 때 능한산성(凌漢山城)을 지키다가 동시에 순절했다.

광산(光山) 김(金)씨

광산(光山) 김(金)씨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가문중의 하나이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대제학 7명을 낳았는데 그들 모두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한 사람의 자손이다.대제학 7명을 배출한 씨족은 광산김씨 말고도 전주(全州) 이(李)씨와 연안(延安) 이(李)시가 있으나, 한 사람의 자손에서만 7명이 나온 예는 광산김시 뿐이다.

또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 아들 신독제(愼獨齊) 김집(金集)이 다같이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로써 이조 중기 이후 손꼽히는 석학중에는 이들의 제자가 많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본관별로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남양홍시, 안동김씨, 청주한씨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또 그의 후손에서 조선시대에서만 상신·대제학·청백리·왕비 등이 나왔다.

광산 김씨 정유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세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 에는 신라 49 대 헌강왕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선계는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고, 다만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시조 김흥광은 당시 신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를 떠나, 광주 서일동에 자리를 옮겨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평장사를 8명이나 역임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평장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손에서는 시조 흥광의 아들 식(拭)이 신라에서 각간을 지냈고, 손자 길(佶)은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준(埈)은 길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에 이르렀으며, 책(策)의 아들 정준(廷俊)도 1035년(정종 1) 전중시어사를 거쳐 1043년(정종 9) 재사시랑 평장사, 동년 11 월에는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양감(良鑑)은 정준의 아들로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ㆍ좌간의대부에 이어 서북로 병마사를 지내고, 1074 년(문종 28) 태복경으로 사은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082 년(문종 36) 좌복야에 올라 중서시랑 및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1087 년(선종 4) 판상서 호부사를 거쳐 수태위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약온(若溫)도 고려의 명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문하시중까지 역임하였다.

의원(義元)은 양감의 아들이며 약온의 동생으로 일찍이 문과에 올라 23세에 조호부 도감판관을 거쳐 감찰어사로 연천에서 여진족을 물리쳐 공을 세워 1122 년(예종 17) 병부시랑이 되고,이어 호부상서, 지추밀원사, 문하평장사에 이르러 치사하였고 그의 아 들 광중(光中)은 간의대부와 비서감을 역임하였다.

주정(周鼎)은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 권지병마녹사에 오르고 1264 년(원종 5)에 문과에 장원하여 이부시랑 등을 거쳐 1278 년(충렬왕 4) 행종도감사가 되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좌부승지가 되었다. 대린(大鱗)의 아들 연(璉)은 충렬왕 초에 경상도 도지휘사로 동정하려 할 때 출정을 앞둔 어느 날 밤 차고 있던 금어가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스스로 해몽하기를 "내 몸에 계급이 떨어졌으니 패전의 징후다" 하고 출정장군을 사퇴한 명신으로 그후 첨의시랑ㆍ찬성사를 역임하였다.
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어사를 거쳐 영암부사를 지내고 1271 년(원종 12) 진도에서 패한 삼별초가 제주로 몰려들자 안찰사 권단의 명으로 2백 명의 관군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아들 태현(台鉉)은 1275년(충렬왕 원년) 15세로 감시에 수석 합격, 이듬해 문과에 급제, 판도총랑, 우승지를 거쳐 1302년 밀직부사가 되었다. 1302년(충열왕 28) 성절사로 원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 황제의 것은 우리 군주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여 중서성의 허락으로 행재소에 가게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는 그 충성을 크게 치하하였으며, 뒤에 원나라로부터 정동행 중서성 낭중을 임명 받았으며, 지밀직사사, 판삼사사를 거쳐 충숙왕 때 중찬에 이르렀다. 저서에 <동국문감>이 있다. 사원(士元)은 찬성사를 역임한 연의 아들로 고려 충선왕 때는 첨의찬성사를 역임하였다.

문정공 태현(台鉉)의 아들 광재(光載)는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으로 사복시승을 거쳐 도관정랑에 올랐다가 1344 년(충혜왕 복위 5) 충목왕이 즉위하자 판도판서ㆍ밀직부사 등을 역임하고 충정왕 때 참의평리ㆍ전리판 서 등을 지냈다. 공민왕 때 어머니가 죽자 여막을 짓고 거상하여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로 정표를 세우려 하였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능통한 첨(瞻)은 판도판서를 역임한 회조(懷祖)의 아들로 1376 년 (우왕 2)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응교를 지냈으며 음률에 밝아 아악을 교정하고 의례에도 정통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황주에 은거하며 끝까지 절개를 지킨 약시는 두문동 칠십 이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 순조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국광(國光)은 감찰을 지낸 철산(鐵山)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어 감찰ㆍ지평 등을 역임하고 1467 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병조판서로서 평정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좌찬성에 이르러 광산군에 봉해졌다. 세조가 죽자 신숙주 등과 워상이 되어 서정을 맡았고 의정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1471 년(성종 2) 좌리공신 1 등이 되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세조의 명으로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경국대전>을 편찬하였다. 그의 동생 겸광(鎌光)은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세조 때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군기감정 및 우부승지를 거쳐 1471 년(성종 2) 좌리공신이 되어 광성군 에 봉해졌다.

예몽(禮蒙)은 1432 년(세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중시와 발영시에 등제하고 이조 및 공조판서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대대로 석학과 명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한 기호학파의 대가 장생(長生) 은 광산 김씨의 우뚝선 인물이다.

조선의 학자이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1548 년(명종 3) 대사헌을 역임한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 8문장가의 한 사람인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을 전수 받고,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전승시켜 조선 예학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 를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7 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 김씨의 전성기를 누렸다. 1578년(선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창릉 참봉ㆍ순릉 참봉 등을 거쳐 동몽 교관ㆍ정산 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 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군사감 첨정, 1597년 남야 부사 등을 역임. 이듬해 안성 군수로 있다가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 전부가 되었다. 1602년(선조 35) 청백리에 녹선, 3년 후 익산군수를 지내고, 1609 년(광해군 1) 회양(淮陽) 철원(鐵原)의 부사를 역임, 1613년 계축옥사에 심문 받았으나 무혐의로 누명을 벗은 뒤 관직을 사퇴, 연산에 은퇴하여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보직, 사업ㆍ상의원정 등을 거쳐 이듬해 집의, 공조참의, 부호군을 지냈다. 그후 다시 사퇴, 낙향했다가 특명으로 16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 고 다음해 행호군에 보직,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로 군량미 조달에 힘쓰며 청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했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향리에서 교육에 전심했다.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론을 깊이 연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하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유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고 안성의 도기서원, 연산의 돈암서원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집은 18세에 진사가 되고 참보에 이르러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 한때 은퇴하였으나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으로 등용되어 지평ㆍ집의를 거쳐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공서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 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 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장생의 아들 반(槃)은 집의 동생으로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3(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전적을 거쳐 형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여섯 명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 때 대사성을 지내고 효종 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에 추봉되어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 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를 거쳐 형조참의ㆍ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에 올랐다. 1674(현종 15) 예조참판때 죽은 인선왕후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을 주장했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이 채택되자 양성에 유배되었다.

조선의 이름 난 소설가 만중(萬重) 은 익겸의 유복자로 자는 중숙(重叔)이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자원, 정언,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삼남의 진정을 조사했다. 이듬해 겸문학ㆍ헌납을 역임, 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 참의, 1683년 공조 판서,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이듬해 지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 사실까지 겹쳐 처벌됨을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에 유배, 1688년 방환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에 유배, 여기서 <구운몽>을 집필한 후 병사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구운몽>도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 이라는 문학관을 피력했다. 1706년(숙중 32) 효행에 대해 정표가 내려졌다. 시호는 문효(文孝)다.

조선 초기 한호(韓濩)ㆍ양사언(楊士彦)ㆍ안평대군과 함께 4대 서가로 유명한 구(絿)는 현감을 역임한 계문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정자를 거쳐 부제학에 이르러 기묘사화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에서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로 불렀다.

그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만수(萬壽)는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 아우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
덕령 은 붕섭의 아들이며, 조선의 병장이며, 자는 경수(景樹), 붕섭(鵬燮)의 아들이다. 광주 출신. 성혼(成渾)의 제자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의 명령을 받았으며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호익장군의 호를 받았다. 1594년 의병을 정돈, 선전관에 임명된 후 권율의 휘하에 들어거 일본군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ㆍ고성지방을 방어했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수차에 결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을 장살하여 한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는 대신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이던 신경행(新景行)의 무고로 피체,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사실을 부인, 대신들 간에도 찬반 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옥사했다. 1661년(현종 2)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 참의에 추증, 1678년(숙종 4) 벽진서원애 제향되었다. 1681년 병조 판서에 가증, 영조 때 의열사에 재향되었으며, , 1778년(정조 12) 좌찬성에 가증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고종때 대제학을 지낸 영수(永壽)와 판서를 역임한 영덕(永德) 그리고 독립운동가 영숙(永肅)등은 가문의 기백을 지킨 인물들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모음' 박영숙영 2020.01.10 162
공지 박정희/ 외국학자들의 평가 박영숙영 2018.03.01 940
공지 AP종군기자의 사진을 통해 다시 보는 1950~53년 韓國戰爭 박영숙영 2015.07.26 2182
공지 박정희 대통령의 시 모음 박영숙영 2015.07.06 1667
공지 이순신 장군의 어록 박영숙영 2013.02.22 1593
공지 세계의 냉정한 평가 ㅡ박정희 박영숙영 2012.03.14 864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09.09.02 827
공지 슬픈역사 ,기억해야 할 자료들 박영숙 2009.01.26 963
공지 박정희 대통령의 명언 박영숙 2009.01.26 2727
공지 박정희와 맥도널드 더글라스사 중역의 증언 박영숙 2009.01.26 1298
153 고시조 모음 박영숙영 2014.06.18 19227
152 [시조모음 ]<백설이 자자진 골에> 묵은 이색 박영숙영 2014.06.24 11159
151 인생무상에 관한 시조 박영숙영 2012.10.21 9973
150 長恨歌(장한가) - 백거이 박영숙영 2014.09.07 9819
149 가마귀 검다하고/ 이직 박영숙 2009.01.14 8315
148 이순신 장군의 시조 모음 박영숙영 2013.02.22 7176
147 신부 /서정주 박영숙영 2014.02.10 5790
146 간밤의 부던 바람에 / 유응부 박영숙 2009.01.14 4921
145 [스크랩]황진이 시모음 박영숙영 2013.07.05 4189
144 (이 몸이 죽어 가서) - 성삼문 박영숙영 2013.02.22 3868
143 가마귀 싸호는 골에 ~ - 정몽주 어머니 - 박영숙 2009.01.14 3711
142 遊子吟(유자음)-맹교 (중국명시) 박영숙영 2014.05.08 3176
141 내 마음 버혀내여- 정 철 - 박영숙 2009.01.14 2660
140 파초우 /조지훈 박영숙영 2014.05.08 2618
139 가마귀 눈비 마자 ~ 박영숙 2009.01.13 2601
138 간밤에 우던 여흘 /원호 박영숙 2009.01.14 2498
137 靜夜思(정야사) - 이백 (중국명시) 박영숙영 2014.05.08 2402
136 [스크랩]황진이의 삶과 사랑과 시 박영숙 2010.02.14 2209
135 나그네 /박목월 박영숙영 2012.03.12 2171
134 국토서시 / 조태일 박영숙영 2012.03.12 2148
133 서산대사 해탈 시 박영숙 2009.01.14 2060
132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 박팽년 - 박영숙 2009.01.14 2035
131 나주,김씨 외 박영숙영 2011.11.08 2028
130 야설/ 서산대사 박영숙 2009.01.14 1990
129 벽(壁)/ 서정주 박영숙영 2014.05.08 1839
128 이순신장군의 시모음 박영숙 2009.01.26 1839
127 화비화(花非花) - 백거이 박영숙영 2015.05.12 1785
126 (가노라 삼각산아) - 김상헌 박영숙영 2013.02.22 1728
125 도연명~귀거래사 /펌글 박영숙 2010.02.02 1700
» 개성 김씨 외 박영숙영 2011.11.08 1645
123 한산섬 달 밝은 밤에 - 이순신 <우국가> 박영숙영 2010.11.30 1608
122 귀거래사- 도연명 박영숙 2010.02.02 1565
121 스크랩] 시조짓기 첫걸음 (장순하 "시조짓기 교실") 박영숙영 2010.12.22 1509
120 蘭溪 朴堧(난계 박연1378-1458) 박영숙영 2011.11.08 1474
119 최초의 조선 유학생의 비극 /아시안의 서부 개척사 -한국인 유학생- 박영숙 2009.11.05 1456
118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명언/ 펌 박영숙 2009.01.26 1371
117 (청산은 나를 보고) - 나옹선사 박영숙영 2013.02.22 1355
116 왕방연/영월로 유배당한 단종에게 사약을 전했던 금부도사 박영숙영 2012.01.21 1340
115 [스크랩]각설이(리)의 진정한 의미를 아십니까? 박영숙 2009.08.11 1298
114 장부가 / 안중근 박영숙 2008.08.20 1260
113 낙화 / 조지훈 박영숙영 2012.03.12 1221
112 금신전선 상유십이 /이순신장군 박영숙영 2010.11.30 1216
111 노래 삼긴 사람- 신 흠 - 박영숙 2009.01.14 1206
110 이순신장군 전사 소식~선조의 반응 박영숙영 2013.02.20 1184
109 어버이 살아신제 - 정철 - 박영숙영 2013.02.22 1178
108 불멸의 이순신 명랑해전 中 "필생즉사 필사즉생" 박영숙영 2013.02.20 1079
107 성씨유래 설명 박영숙영 2011.11.08 1077
106 진중음 1,2,3,/이순신장군 박영숙영 2010.11.30 1058
105 도산월야영매 / 李滉 이황 박영숙영 2012.07.18 1056
104 녹양이 천만사ㅣ들 / 이원익 - 박영숙 2009.01.14 1054
103 (마음이 어린 후이니) - 서경덕 박영숙영 2013.02.22 1045
102 음악의 귀재, 박연 박영숙 2010.02.14 1032
101 꿈에 뵈는 님이 - 명 옥 - 박영숙 2009.01.14 1019
100 (이화에 월백하고) - 이조년 박영숙영 2013.02.22 988
99 (청초 우거진 골에) - 임 제 박영숙영 2013.02.22 986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11
어제:
62
전체:
885,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