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김씨 외

2011.11.08 02:25

박영숙영 조회 수:2028 추천:105

나주 김씨

나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운발(雲發)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라가 망하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을 범공으로 귀의하였는데 그가 입산전 두 아들을 고려조에서 예우하여 장자 운발은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나주군으로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삼았다.

나주 김씨의 후손은 대대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며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월당 대경(坮卿)을 들수 있다. 그는 1326년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당세에 이름을 날렸으며 한때 목운 이색(李穡)과 함께 나주 안로현에서 유배 생활을 겪기도 했다.

조선때 와서는 일경의 손자 정준(廷儁)이 정종때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부총제를 지냈으며 정준의 둘째 아들은 김종서의 사위가 되었다. 정준의 현손 경석(景錫)은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1555년 호남지방에 왜구가 침입하자 방어사로 종질(從姪) 적(滴)과 함께 영암포에서 무찔렀으며, 적의 아들 충수(忠秀)는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어 호조참판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는 부인과 함께 순사하여 나라에서 그의 고향 공주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그외 학자로 이름난 덕수(德秀), 공조좌랑 복남(福南)을 비롯하여 부호군 세빈(世彬)이 유명하다.

낙안김씨

시조 김수징(金粹澄)은 신라 제26대 경순왕의 제 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11세손인 영고(永固)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명종조에 감무(監務)로 있으면서 국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에 오르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낙안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고창군 성내면 부덕리 엄동에 낙흥단(樂興壇)을 모아 매년 음2월 13일에 향사하고 있다.

낙안김씨는 조선 초엽 지금의 승주군 낙안을 중심으로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훈을 세운 양혜공(襄惠公) 김빈길장군을 증조로 섬기고 있다. 그는 1394년(태조3) 전라 수군첨절제사로서 왜선 3척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잠시 유배되었다가 곧 풀리고, 1401년(태종즉위) 3도 수군절제사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세자부사 가 되고, 1405년 김해에서 싸우다가 순사했다. 진안의 화천사(華川祠)에 제향되었다.

무열공(武烈公) 김광습(金光襲)은 고려 명종·신종 양조에 걸쳐 벼슬이 금오위대장 검상사인 검교대장 좌승상에 올랐고, 김윤견(金允堅)은 문과에 올라 조정대부 사재경 이부상서를 지내고 상장군에 올랐다.

김지겸(金之謙)은 충선왕 때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경화공주(慶華公主)의 명으로 정동성(征東省) 사무를 맡아 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김효자(金孝慈)는 광록대부 판각문하평리를 지냈고, 김남정(金南正)은 병부상서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규(金糾)는 판각참찬 예문관 제학(提學)에 올랐고, 김수(金隋)는 충정왕 때 강릉존무사를 지내고 낙천군(樂川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충민(忠愍)으로 내려졌다. 그는 예문(藝文)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들 양평공(良平公) 김미(金彌)도 출중한 인물이다. 우왕 3년에 진사에 합격, 전객시승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낸 뒤 공안부윤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공간공(恭簡公) 김주(金湊)는 문과에 급제, 성균직강으로 정추(鄭樞)등이 신돈(辛旽)을 탄핵하다 투옥된 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비서감승을 거쳐 우왕 때 사헌집의, 지신사, 밀직제학을 역임하고, 공양왕 초에 문하평리 겸 대사 헌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예문춘추관 태학사, 좌복야를 겨쳐 신도궁궐조성도감 도청으로서 종묘·궁궐 신축에 공이컸다. 1397년 문하시랑 찬성사·서북면 도찰리사로 왜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공민왕 때 영남루를 창건하였다.

김함(金涵)은 우왕 2년에 문과에 올라 대호 부사와 평리를 지냈고 왜구와 싸우다 순절하였다.

양혜공(襄惠公) 김빈길은 낙안김씨 인물 중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다. 1394년(태조3) 왜구를 섬멸하고 전라도 수군절제사로 있을 때 도내 각 요충지에 만호(萬戶)를 두어 병선을 정박시키면서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대의 식량이 충족되도록 하였다. 1405년 김해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낙안은 현재 민속 마을로 지정되어 있으며, 승주(昇州)의 낙안성은 김빈길이 축조한 것이란 설이 있다. 김가외(金可畏)는 봉열대부 첨지통례문사(僉知通禮門事)를 지냈고, 특히 세종과는 내외종 6촌간으로 6촌계를 만들어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정익은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때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충직과 청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남양김씨

시조 김적의 선계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 의종때의 인물로 국난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경기도 남양의 산중으로 은거했다고 하나 그의 선계와 그 후 250여 년 동안의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그의 후손 김약해(金躍海)가 조선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우고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남양(南陽)으로 하였고 약해의 아들 계(桂)는 1437년(세종19)에 출생, 김종직(金宗直)과 동문학으로 성종때 진사가 되었으나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정주(定州)로 유배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에게 죄가 가중되어 전 가족이 평북 정주군 마산면 원동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입북한 김계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평북 박천군 용계면 은봉동 은봉산에 있다.

김계의 5세손 김장유(金長孺)는 1561년(명종16) 임거정(林巨正)이 난을 일으키자 의병을 이끌고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당안공파(棠岸公派) 파조 김언량(金彦良)은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계해두(桂海杜) 등과 창의하여 역전 끝에 순절했다. 송암공파(松菴公派) 파조 김경록(金景祿)은 1619년(광해군11)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명(明)나라의 원군으로 의주까지 갔다가 모친상을 당해 돌아왔다. 그 후 이괄(李适)의 난에 창의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 심양(瀋陽)까지 갔다왔다.

순절공파(殉節公派) 파조 김응록(金應祿) 또한 병자호란 때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아들 여상(汝商)과 함께 능한산성(凌漢山城) 싸움에서 순절했다.

남원김씨

시조 김사지(金四知)는 경순왕 부(傅)의 제 8자 추(錘:一善君)의 8세손 중(仲)의 셋째 아들이다. 본관을 남원(南原)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이조 때 조방장을 지낸 김경로(金敬老),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한 김기욱(金基郁)으로 이어져 왔다. 후손들이 평안북도 초산군 송면 및 함경남도 고원군 등지에 세거하다가 6·25동란 때 월남하면서 보첩과 가장(家狀)등 모든 문헌을 봉지하지 못하여 중간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자료에 의하면 평북 초산군 송면 송정동에 18호, 함남 고원군 상산면 주당리에 27호가 분포 거주하였는데, 동란 때 남하하여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포김씨

남포김씨(藍浦金氏)는 주로 평북 철산 등지에서 집단을 이루고 살다가 6·25 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봉지하지 못해 그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신라김씨2000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 의하면 시조 김전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지만 연대와 행적 및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김시중(金始重)의 아들 성일(聲一)이 1729년(영조5)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김성일을 시조로 하고 있다. 또 성일의 고조인 김충길(金忠吉)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김여용(金礪用)의 아들 봉서(鳳瑞)는 1741년(영조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평북 철산군 철산면 영산동에 65가구, 철산군 서림면 연산동에 48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평김씨

시조 김창협(金昌協)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인 양주김씨(楊州金氏) 시조 김원보(金元寶)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와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남평군(南平君) 김기홍(金器弘)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전한다. 1930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 공덕면 괴전리에 35호가 살고 있었다. 후손 김규진(金圭鎭)은 조선 말기의 서화가로 이름이 높다.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으로 대수는 알 수 없으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기범(起範)의 아들이다. 8세에 장인 이소남(李小南)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서화의 명적을 연구, 10여년 만에 귀국했다. 글씨는 전서·예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하여 묘경을 이루었으며, 그림은 산수·화조를 잘 그렸고, 특히 난죽이 절묘했다. 그는 왕세자의 사부가 되어 세자에게 서법을 가르쳤고, 서화연구회를 창설, 서화연구에 공헌했다. 후에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 심사위원을 지내며 때때로 경향 각지에서 전람회를 개최하여 예술 발전에 공이 컸으며, 벼슬은 시종관을 지냈다. 김규진의 작품으로 저서 난죽보, 서법진결, 육체필론과 글씨에는 미륵불, 천하기절, 법기보살, 금수강산, 대웅전, 백마장강, 촉석루, 가야산해인사, 보신각, 희정당대조전, 태극전이 있으며, 그림으로는 외금강만물상도, 해금강총석정도, 소상대죽도, 대부귀길상도 등이 있다.

남해김씨

남해김씨(南海金氏)의 시조는 김태진(金泰辰)이다.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掌隷院直長)을 지냈다. 그가 남해에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남해로 하였다. 김태진은 본디 광산김씨의 후예다. 그의 증조인 김극신(金克愼)은 조선 연산군 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관계에 나아갔으나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시조인 김태진으로부터 4세손까지는 남해에 복고했고, 5세손인 김의경(金義慶)부터 9세손 김낙운(金洛雲)대까지는 김포군 하성면에 세거하였다.

능주 김씨

능주(綾州)는 지금의 전남 화순군 속면이다.

시조 김계원(金繼元)은 안주(安州)에서 살았다. 그의 큰아들 명하(鳴夏)의 자는 성숙(成叔)이고, 1657년(효종8)생으로, 1695년(숙종21) 평안도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통례(通禮)에 이르렀다. 작은아들 명은(鳴殷)의 자는 용녀고, 1660년(현종1)생으로, 1687년(숙종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동지중추에 이르렀다. 1930년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함북 길주군 웅평면 용남동에 23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길주로 입북했는지, 또 본관을 능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달성김씨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달성김씨(達城金氏)의 시조 김담(金淡)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진사를 지냈다고만 되어 있어 여타 사적이나 연대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 또 전후 세계와 본관을 달성으로 하게된 연유도 밝힐 수 없으며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나타나지 않아 후손들의 집성촌도 알 수 없다.

해남, 당악 김씨

시조 김인(金忍)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3자 명종(鳴鍾)의 19세손이다. 그는 오위도총부(五衛都憁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내고 태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리고 전라도의 수영(水營)이 무안현 대굴포(務安縣大掘浦: 현 함평군 학고면 대곡리)에 있을 때 좌막(佐幕)으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20리쯤 올라온 나주군 마산면 귀업리(현 나주군 왕곡면 송죽리 귀업부락)에 터를 잡아 세거지를 마련했다 한다.

본관은 그의 증조 김남보(金南寶)가 고려 말에 병부상서를 지내고 조선개국 후 해남(海南)으로 은거하였기 때문에 해남 또는 당시의 지명인 당악(棠岳)을 따서 당악김씨(棠岳金氏)라고도 한다. 시조의 묘소는 전남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 있으며, 음력 3월 3일에 향사한다.

당악김씨는 수군계(水軍系) 집안으로 큰 인물은 내지 못했다. 외손인 박순(朴淳)이 정승 자리에 14년간 있으면서 전남 선비들의 정계 진출에 크게 공헌했는데도 당악김씨만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시조 인의 손자 종(琮)이 정언(正言)을 지냈는데, 이 분이 전남의 조선조 인맥에서 중조(中祖)라고 할 수 있는 사암(思菴) 박순의 외조부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당악김씨의 세거지인 귀업(龜業)은 쑥밭이 되고 많은 인명 피해를 당했으며 원경(元慶)의 아들 준(浚)은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23년만에 돌아와서 다섯 아들을 두어 이 집안의 중심을 이루었다. 원록(元祿)의 손자 만영(萬英)은 학문이 높아 남평(南平)의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고 죽은 후에 풍산사(楓山祠)에 제향되었다.

당진, 통진 김씨

당진김씨(唐津金氏)의 시조 김자진(金子盡)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 희조(希祖)의 7세손이라 한다.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 의하면 확실한 세계는 알 수 없으나 그는 1382년(우왕8) 문과에 급제하여 선공서령 보문각 대제학(繕工署令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도강군(道康君)에 봉해졌다.

한편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의하면 대안군 은열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상장군을 지낸 익지(益之)를 시조로 하고, 그의 손자 안경(安敬)과 자익(子益)을 파조로 하는 통진(通津)김씨가 있는데 당진김씨와 동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관을 당진으로 하게 된 유래는 확실한 설명이 없다.

담양김씨

시조 김삼준(金三俊)은 경순왕의 일곱째아들인 언양김씨(彦陽金氏) 시조인 김선(金鐥)의 후손으로 1486년(성종1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장령·김제 군수 등을 지냈다.

언양김씨에서 분적한 연원과 본관을 담양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언양으로 되어 있고, 또 족보 세계에 그의 아들 난무(蘭茂)·송무(松茂) 형제 중 난무는 달성계이고, 송무는 언양계로 되어 있어 난무의 후대에서 개성으로 입북하여 조상의 선향인 담양을 본관으로 한 것으로 짐작케 한다.

당악김씨

시조 김락(金樂)은 신라 신무왕의 5세손 무력(武力)의 아들로서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통합삼한공신1등으로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지고 식읍 3천호를 받았으며, 대아찬에서 원보(元甫)겸 대장군으로 승진되었다. 927년(태조10) 7월에 대량성(大良城)을 쳐서 강주(康州)등 제성(諸城)을 획득했다. 그 해 10월, 공산(公山)의 동수(桐藪) 전투에서 견훤군에게 포위당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태조를 덤불에 숨기고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왕의 수레를 대신 타고 격전하다 전사했다. 익대효절광위갈충위사전망공신 1등에 추봉,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940년(태조23) 공신당(功臣堂)을 설치, 벽상에 도형하였고,994년(성종13)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022년(현종13) 대구의 사우가 표충사(表忠祠)로 사액되고, 1052년(문종2) 삼중대광 당악현 개국공(唐岳縣開國公)에 추봉되었으며, 1120년(예종15) 예종이 그와 신숭겸을 추도하여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그리하여 후손이 태조가 사적한 당악(唐岳)을 본관으로 했다. 시조의 묘소는 평안남도 중화의 도로동( 老洞)에 있다고 하나 남북이 가로막혀 향화를 받들지 못하고 있다.

대구김씨

시조 김달(金達)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 중시조인 김방경(金方慶)의 제4자 론의 증손이다. 그는 원래 경북 대구 도화촌(道化村)에 거주하던 무과(武科) 출신으로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난 때 함경도 길주로 유배당하자 자손들이 배소로 따라가 그곳에 정착하면서 조상들의 세거지였던 대구(大邱)를 본관으로 삼았다.

대구김씨는 원래 무관 가문으로 조선조 5백년을 통해 시조의 아들 여연(麗淵)·부형(富亨) 형제의 후손들이 함경도와 평안도에 분거하면서 국경 수비에 기여하였고,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해 있을때에 전 가문이 충성을 다바쳐 숙종조에 충의 가문으로 포상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대구김씨는 우리나라 동·서북 지방에서 벌족을 이루고 살다가 해방 후에 4백여 가구가 월남, 종친회를 구성하여 친목을 다지고 있다.

덕산김씨

시조 김량(金亮)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진사에 합격, 후손들이 본관을 덕산(德山)으로 했다. 그 외에 김충한(金沖漢), 김준신(金浚臣)의 후손, 또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의 분파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덕수김씨

덕수김씨(德水金氏)는 해풍김씨(海豊金氏)와 동원이면서 해풍김씨가 족보를 창간할 때 덕수 지방에 거주하던 지파가 참여하지 못했다가 후일에 자기들끼리 족보를 간행하면서 중간세계를 밝히지 못한채 본관을 거주지인 덕수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덕수김씨세보(德水金氏世譜)>에는 해풍 부원군 김숭선을 시조로 하고 중간셰계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김수연을 1세조로 하였다. 한편 <해풍김씨세보>에는 김수연을 시조 숭선의 8세손으로 정리하고 있어 이 두 집안의 족보는 본관만 다를 뿐 시조와 연원이 동일하다. 이에 대해 해풍김씨측에서는 고려 말의 사회적 혼란과 조선 개국 당시의 변혁, 그리고 해풍현과 덕수현(지금의 개성, 풍덕)의 지역적 혼란, 그 후에 닥쳐온 임진왜란 등 여러 난리를 겪는 동안 모든 문헌이 소실되고 혈족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각기 가승만 만들어 가지고 내려오던 중 1764년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후손들의 가승과 세단(世單)등을 수집하여 1791년 제1차 세보(世譜)를 창간할 때 참여하지 못한 혈손들이 후일에 족보를 간행하면서 상계를 밝히지 못한 채 거주지를 본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강김씨

시조 희조(希調)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와 병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을 지내고 도강백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도강으로 하였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계대를 상고할 수 없어 원경,을경,일,을상등 동본 4파로 분류하여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의 개국공신 회련(檜鍊)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서설(瑞設)은 절도사를 거쳐 강계부윤 등을 지내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원종공신에 녹선되었다. 약묵(若默)은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52년 한산군수로 제임하면서 선정으로 표창을 받고 뒤에 집의,목사,내자시정등을 역임하였다.

그외 학자로 이름난 후진(後進)은 일찌기 이항의 문하에서 경서와 역서를 연구하고 임진왜란때 이귀(李貴)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많은 군량을 바쳤다. 도언(道彦)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과 병조좌랑등을 지내고 1624년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의금부 도사로 평정하여 분무공신일등에 녹훈되었다.

한말의 우국지사 영상(永相)은 학자로도 명망이 높았으며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국가의 운명을 한탄하며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이 주는 노인 은사금을 거절하고 독립을 역설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천술(天述)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여 우물에 투신자살한 애국지사이다.

동래김씨

시조 김흥도(金興濤)는 신라 김씨의 분적종으로 경순왕 부(傅)의 후손이라고만 전해질 뿐 혈연 계보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조에 이조참의를 거쳐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나갔다가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안변(安邊)으로 유배된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눌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마지막 임지였던 동래를 본관으로 삼았다. 파계는 5세 덕붕(德鵬)·덕린(德麟) 형제 대에서 두 파로 분류되지만 덕붕은 후사가 없어 덕린의 아들 수(洙)가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오늘의 동래김씨들은 모두 김덕린의 혈손인 셈이다.

시조의 4세손 선략장군(宣略將軍) 응현(應鉉)의 아들 덕린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덕린의 아들 김렴(金濂)과 김세진(金世珍)은 숙질간으로 각각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참봉 김여집(金汝鏶)의 아들 수함(守咸)은 김렴의 증손으로 이 집안 유일의 문과 급제자이다. 그는 1755년(영조31) 함경도과(咸鏡道科)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찰방(察訪)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등주김씨

등주김씨(登州金氏)는 본관을 같이 쓰는 중국계 귀화족과 신라계 분적종으로 구분된다. 중국계 귀화족의 시조 김장생(金長生)은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하여 등주(登州:지금의 安邊)에 정착,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등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다른 한 계통의 시조 김식(金軾)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장군공파(將軍公派) 김순웅의 13세 손인 계림군 김균의 장자인 맹성(孟誠)의 증손자로 전해지고 있으나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김중정(金重貞)의 아들로 무과 출신이며 판관(判官)을 지냈다고 하지만 연대와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만경김씨

시조 김희제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만경의 군산도(群山島)에서 살았으나 선조가 상선(商船)을 따라 개성으로 가서 살면서 관적을 개성으로 했다. 그는 충청도 안찰사를 거쳐 장군이 되고, 1221년(고종8) 의주분도 장군(義州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금나라의 우가하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했다. 1226년 서북면 병마부사로 있을 때 의주·정주지방에 쳐들어온 우가하의 군대를 물리치고 압록강을 건너 석성(石城)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이듬해 전라도 순문사로 있을 때 최우(崔瑀)가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무고를 믿고 사람을 나주에 보내어 체포하려 하자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후손들이 선대의 세거지였던 만경(萬頃:現 金城의 속면)을 본관으로 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 공덕면 병공리에 40호가 살고 있었다.

무장김씨 1

무장김씨(茂長金氏)는 전북 옥구와 황해도 장연에 각각 분산 거주해 왔으나 그 선계에 대해서는 신라계 혹은 가락계로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1925년에 옥구(沃溝)에서 발행한 <무장김씨세보(茂長金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충절공(忠節公) 김선(金璇)은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장사가 무장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그의 아들 충(庶)이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자진(自珍)은 대사헌을 지내고 옥구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그 후손이 옥구에 세거하게 되었고, 둘째 자무(自武)는 박팽년(朴彭年)의 사위로 부제학을 지내다가 1456년(세조2) 사육신이 화를 당할 때 연루되어 해주의 어차리(馭車里)에 은거, 종적을 감추게 되자 그 후손들이 장연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같은 혈족이면서 옥구와 장연으로 분산되어 4백여년이 지나도록 왕래가 막혀 전연 모르고 지내오다가 1841년 장연파 문중에서 옥구로 찾아가 같은 혈손임을 확인하고 1925년 비로소 통합된 족보를 발간하였다고 한다.

한편 장연에서 살다가 6·25동란 후 월남한 무장김씨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조 김자무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선대의 사적이 유실되어 상계를 밝히지 못한다고 한다. 김자무는 박팽년의 사위로 관직은 제주목사였으며, 장인이 화를 당할 때 연루되어 장연에 은거하면서 무장으로 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동안 족보를 편찬하지 못하다가 1924년에 옥구의 무장김씨와 합보하면서 선계를 김수로왕에게 잇대어 시조를 김선으로 하였지만 이를 고증하기 위해 <신라세보(新羅世譜)>등 여러 문헌을 찾아보았으나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고 기타 <김씨본원세보(金氏本源世譜)>등 여러 문헌에 김알지의 후손으로 밝혀져 있다고 한다.

무장김씨 2

시조 김자무(金自茂)는 원래 무주(茂朱)사람이며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그는 단종조에 제주목사를 지내다가 1456년(세조2) 장인이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가 성삼문(成三問)등 6신과 함께 처형되고 그도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자 황해도 장연으로 도피하여 신분을 감추고 관향도 무장(茂長)으로 바꾸고 은거했다. 그 뒤 숙종 때 사육신이 신원될 때까지 그 후손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겨우 혈맥을 이어 오다가 가야계 무장김씨 선(璇)계에 편입하여 족보를 간행하고 가야계로 행세해 왔다. 그러다가 해방 후 월남하여 여러 문헌을 상고한 바 가야계가 아님이 뚜렷하고 특히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에 의하면 「그는 제주목사로 본래 무주인이었는데 박팽년의 사위로 장인이 단종 손위 때 화를 입자 황해도 장연으로 피신, 본관을 무장으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가야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무 이상의 세계를 가리지 못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그래서 이족의 동성동본이 생기게 되었다.

무장김씨는 4세 김유광(金有光)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연군 11개면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고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는 장연군 대동면 강화군 양사면 등지에 집성촌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주김씨

무주김씨(茂朱金氏)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 국자감 좨주를 지내고 조선 태종 때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러 무주백(茂州伯)에 봉해진 김성(金晟)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무주김씨족보(茂州金氏族譜)》에 의하면 신무왕의 계통이라 하였고, 시조 성은 고려조에 문하찬성사를 지낸 충정공(忠貞公) 김의원(金義元)의 13세손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인 김길(金佶) 이상의 세계는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간 세대가 단종 손위 때 화를 입어 문적이 유실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편《신라김씨분파연원도》에 의하면 무주김씨의 시조는 신무왕의 16대손이고, 길의 13대손이며 의원의 8대손인 남우(南雨)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우가 의원의 8대손(신라김씨연원도)이고, 성은 의원의 12대손(무주김씨족보)이라 하였으니 남우와 성과의 사이 3대가 실전되었는지 아니면 남우와 성과는 전혀 다른 계통인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무주김씨는 수원 등 경기지방에서 살다가 5세 김일(金逸)의 대를 전후해서 충남 홍성의 광천 등지로 옮겨 그 일대를 세거지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2세 김석여(金錫汝)이후 석성·임천 등 부여로 옮겼고, 11세 김사(金獅)는 충남 예산으로 가서 터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6세 김우정(金禹禎)의 후손은 서산의 해미·성연 등지에, 10세 김승서(金承緖)의 후손은 아산의 온양·배방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7세 김숙(金淑)의 대를 전후해서 보령의 청소 등지에 일부가 살게 되었고, 4세 김자무(金自茂)의 후손은 황해도 장연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집안의 인물로는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 검교평리로 의금부 판결사·부제학을 겸직한 김생려(金生麗)와 그의 아들로 세종조에 홍문관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지낸 김규(金葵)가 있다.

이밖에 문종조에 집현전 교리를 지내고 뒤에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동생 한지(漢之)·아들 유인(有仁)과 함께 화를 입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된 김선지(金善之)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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