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기형도

2009.01.14 14:50

박영숙 조회 수:410 추천:111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89년>

***

기형도(1962~1989) 시인의 마지막 시다. 1989년 봄호 문예지에서 이 시를 읽었는데 일주일 후에 그의 부음을 접했다. 이제 막 개화하려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 삼류 심야극장의 후미진 객석에서 홀로 맞아야 했던 그의 죽음에 이 시가 없었다면 그의 죽음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초라했을 것인가.

어릴 적부터 살던 집에서 이사를 계획하고 쓰여졌다는 후일담도 있지만 이 시는 사랑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으로 인해 밤은 짧았고, 짧았던 밤 내내 겨울 안개처럼 창 밖을 떠돌기도 하고 촛불 아래 흰 종이를 펼쳐놓은 채 망설이고 망설였으리라. 그 사랑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이 되었으리라. 실은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집은 집이 아니다. 빈집이고 빈 몸이고 빈 마음이다. 잠그는 방향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문을 잠근다'는 것은, '내 사랑'으로 지칭되는 소중한 것들을 가둔다는 것이고 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잠금이자 감금일 것이다. 사랑의 열망이 떠나버린 '나'는 '빈집'에 다름 아니고 그 빈집이 관(棺)을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삶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사랑이기에, 사랑의 상실은 죽음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나직이 되뇌며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하나씩 불러낸 후 그것들을 떠나보낼 때, 부름의 언어로 발설되었던 그 실연(失戀)의 언어는 시인의 너무 이른 죽음으로 실연(實演)되었던가. 죽기 일주일 전쯤 "나는 뇌졸중으로 죽을지도 몰라"라고 말했다던 그의 사인은 실제로 뇌졸중으로 추정되었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오래된 서적')이라 했던 그가, 애써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건만.

그가 소설가 성석제와 듀엣으로 불렀던 팝송 'Perhaps Love'를 들은 적이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맑은 고음이 그의 몫이었다. "Perhaps, love is like a resting place…"로 시작하던 화려하면서 청량했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라는 그의 독백도.[정끝별 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5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6
133 ♡*미주문학동네 입주 환영*♡ 잔물결(박봉진) 2008.10.05 345
132 문학서재 입주를 축하! 환영! 종파 이기윤 2008.11.30 356
131 성탄절 이주희 2008.12.20 339
130 아름다운 성탄절입니다. 장태숙 2008.12.24 295
129 '풀'/ 김수영 박영숙 2009.01.14 342
128 남해금산 /이성복 박영숙 2009.01.14 332
127 즐거운 편지/황동규/출처 다움고요이야기 박영숙 2009.01.14 321
126 김춘수 '꽃' /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57
125 동천 /서정주/출처 다움 고요 박영숙 2009.01.14 335
124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박영숙 2009.01.14 332
123 묵화(墨畵)/김 종 삼/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49
122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박영숙 2009.01.14 349
121 사슴/노 천 명 박영숙 2009.01.14 354
120 대설주의보/최승호 박영숙 2009.01.14 517
119 저녁눈 /박 용 래 박영숙 2009.01.14 336
» 빈집/기형도 박영숙 2009.01.14 410
117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박영숙 2009.01.14 334
116 목마와 숙녀/박인환 박영숙 2009.01.14 356
115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박영숙 2009.01.14 569
114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박영숙 2009.01.14 406
113 님의친묵/한용운 박영숙 2009.01.14 714
112 겨울바다/김남조 박영숙 2009.01.14 652
111 귀천/천상병 박영숙 2009.01.14 417
110 푸른곰팡이 산책시 /이문재 박영숙 2009.01.14 514
109 산문(山門)에 기대어/송수권 박영숙 2009.01.14 612
108 잘익은사과/김혜순 박영숙 2009.01.14 532
107 산정묘지/조정권 박영숙 2009.01.14 473
106 광야/이육사 박영숙 2009.01.14 436
105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 펌글 박영숙 2009.03.11 368
104 스크랩] 어느 봄날의 기억 박영숙 2009.04.23 451
103 가을비/- 도종환 - 박영숙 2009.07.10 516
102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박영숙 2009.07.10 750
101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박영숙 2009.07.10 588
100 들길에 서서 - 신석정 박영숙 2009.07.10 857
99 청 산 도(靑山道)- 박두진 - 박영숙 2009.07.10 456
98 초 혼 (招魂)- 김소월 - 박영숙 2009.07.10 747
97 봄은 간다- 김 억 - 박영숙 2009.07.10 597
96 그 날이 오면 - 심 훈 - 박영숙 2009.07.10 546
95 새벽 /설램과 희망을 줍는 기다림 박영숙 2009.08.13 608
94 시와 언어와 민중 의식 (한국문학(韓國文學) 소사 에서) 박영숙 2009.08.20 483
93 [ 스크랩]가끔은 애인같은 친구 박영숙 2009.08.27 356
92 [스크랩]삶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아라 박영숙 2009.09.28 481
91 [스크랩}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박영숙 2009.09.28 345
90 울긋불긋 단풍을 꿈꾸다 박영규 2009.10.25 695
89 가을에게 박영숙 2009.11.03 395
88 나뭇잎 하나가/ 안도현 박영숙 2009.11.03 437
87 낙 엽 송/황 동 규 박영숙 2009.11.03 527
86 [스크랩] 우정/이은심 박영숙 2009.11.13 397
85 [스크랩]인생의 그리운 벗 박영숙 2009.11.13 427
84 [스크랩] 안부 박영숙 2009.11.13 445
83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박영숙 2009.11.13 609
82 도 종 환/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할 표현들 박영숙 2009.11.13 413
81 길 잃은 날의 지혜/박노혜 박영숙 2009.11.18 773
80 [스크립]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박영숙 2009.12.09 437
79 [스크랩/인생은 자전거타기 박영숙 2009.12.09 444
78 직지사역/ 박해수 박영숙 2009.12.16 576
77 어머니의 손맛 박영숙 2009.12.23 532
76 동지 팥죽의 유래 박영숙 2009.12.23 779
75 {스크랩}봄비 같은 겨울비 박영숙 2010.02.17 432
74 석류의 말/ 이해인 박영숙 2010.02.25 439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43
어제:
90
전체:
885,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