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박인환

2009.01.14 14:54

박영숙 조회 수:356 추천:116

목마와 숙녀/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시냇물 같은 목소리로 낭송했던 가수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를 옮겨 적던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류' 시인이 되었다.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쓴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강에 뛰어들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마와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페시미즘의 미래'라는 시어가 대변하듯 6·25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수려한 외모로 명동 백작, 댄디 보이라 불렸던 박인환(1926~1956) 시인은 모더니즘과 조니 워커와 럭키 스트라이크를 좋아했다. 그는 이 시를 발표하고 5개월 후 세상을 떴다.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연일 계속했던 과음이 원인이었다. 이 시도 어쩐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일필휘지로 쓴 듯하다. 목마를 타던 어린 소녀가 숙녀가 되고, 목마는 숙녀를 버리고 방울 소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소녀는 그 방울 소리를 추억하는 늙은 여류 작가가 되고…. 냉혹하게 '가고 오는' 세월이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로 요약되는 서사다.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생명수를 달라며 요절했던 박인환의 생애와, 시냇물처럼 흘러가버린 박인희의 목소리와, 이미 죽은 그를 향해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의 애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인 것을, 우리의 시가 조금은 감상적이고 통속적인들 어떠랴. 목마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모라면,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정끝별 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5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6
133 ♡*미주문학동네 입주 환영*♡ 잔물결(박봉진) 2008.10.05 345
132 문학서재 입주를 축하! 환영! 종파 이기윤 2008.11.30 356
131 성탄절 이주희 2008.12.20 339
130 아름다운 성탄절입니다. 장태숙 2008.12.24 295
129 '풀'/ 김수영 박영숙 2009.01.14 342
128 남해금산 /이성복 박영숙 2009.01.14 332
127 즐거운 편지/황동규/출처 다움고요이야기 박영숙 2009.01.14 321
126 김춘수 '꽃' /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57
125 동천 /서정주/출처 다움 고요 박영숙 2009.01.14 335
124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박영숙 2009.01.14 332
123 묵화(墨畵)/김 종 삼/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49
122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박영숙 2009.01.14 349
121 사슴/노 천 명 박영숙 2009.01.14 354
120 대설주의보/최승호 박영숙 2009.01.14 517
119 저녁눈 /박 용 래 박영숙 2009.01.14 336
118 빈집/기형도 박영숙 2009.01.14 410
117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박영숙 2009.01.14 334
» 목마와 숙녀/박인환 박영숙 2009.01.14 356
115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박영숙 2009.01.14 569
114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박영숙 2009.01.14 406
113 님의친묵/한용운 박영숙 2009.01.14 714
112 겨울바다/김남조 박영숙 2009.01.14 652
111 귀천/천상병 박영숙 2009.01.14 417
110 푸른곰팡이 산책시 /이문재 박영숙 2009.01.14 514
109 산문(山門)에 기대어/송수권 박영숙 2009.01.14 612
108 잘익은사과/김혜순 박영숙 2009.01.14 532
107 산정묘지/조정권 박영숙 2009.01.14 473
106 광야/이육사 박영숙 2009.01.14 436
105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 펌글 박영숙 2009.03.11 368
104 스크랩] 어느 봄날의 기억 박영숙 2009.04.23 451
103 가을비/- 도종환 - 박영숙 2009.07.10 516
102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박영숙 2009.07.10 750
101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박영숙 2009.07.10 588
100 들길에 서서 - 신석정 박영숙 2009.07.10 857
99 청 산 도(靑山道)- 박두진 - 박영숙 2009.07.10 456
98 초 혼 (招魂)- 김소월 - 박영숙 2009.07.10 747
97 봄은 간다- 김 억 - 박영숙 2009.07.10 597
96 그 날이 오면 - 심 훈 - 박영숙 2009.07.10 546
95 새벽 /설램과 희망을 줍는 기다림 박영숙 2009.08.13 608
94 시와 언어와 민중 의식 (한국문학(韓國文學) 소사 에서) 박영숙 2009.08.20 483
93 [ 스크랩]가끔은 애인같은 친구 박영숙 2009.08.27 356
92 [스크랩]삶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아라 박영숙 2009.09.28 481
91 [스크랩}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박영숙 2009.09.28 345
90 울긋불긋 단풍을 꿈꾸다 박영규 2009.10.25 695
89 가을에게 박영숙 2009.11.03 395
88 나뭇잎 하나가/ 안도현 박영숙 2009.11.03 437
87 낙 엽 송/황 동 규 박영숙 2009.11.03 527
86 [스크랩] 우정/이은심 박영숙 2009.11.13 397
85 [스크랩]인생의 그리운 벗 박영숙 2009.11.13 427
84 [스크랩] 안부 박영숙 2009.11.13 445
83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박영숙 2009.11.13 609
82 도 종 환/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할 표현들 박영숙 2009.11.13 413
81 길 잃은 날의 지혜/박노혜 박영숙 2009.11.18 773
80 [스크립]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박영숙 2009.12.09 437
79 [스크랩/인생은 자전거타기 박영숙 2009.12.09 444
78 직지사역/ 박해수 박영숙 2009.12.16 576
77 어머니의 손맛 박영숙 2009.12.23 532
76 동지 팥죽의 유래 박영숙 2009.12.23 779
75 {스크랩}봄비 같은 겨울비 박영숙 2010.02.17 432
74 석류의 말/ 이해인 박영숙 2010.02.25 439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43
어제:
90
전체:
885,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