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최승호

2009.01.14 14:46

박영숙 조회 수:517 추천:99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983년>

***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어디서 오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머언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리는 김광균의 눈이 있는가 하면, 쌀랑쌀랑 푹푹 날리는 백석의 눈이 있다. 기침을 하자며 촉구하는 김수영의 살아있는 눈도 있고, 희다고만 할 수 없는 김춘수의 검은 눈도 있다. 괜, 찮, 타, 괜, 찮, 타, 내리는 서정주의 눈도 있고, 갑작스런 눈물처럼 내리는 기형도의 진눈깨비도 있다.

그리고 여기 '백색계엄령'처럼 내리는 최승호(54) 시인의 눈이 있다. 1980년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의 시대였고 폭압의 시대였다. 그는 '상황 판단'이라는 시에서 '굵직한/ 의무의/ 간섭의/ 통제의/ 밧줄에 끌려다니는 무거운 발걸음./ 기차가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터널 속처럼 불안한 시대'라고 일컬었다. 그의 시는 선명하고 섬뜩하게 '그려진다'. '관(觀)'과 '찰(察)'을 시 정신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현실을 '보면서 드러내고', 자본주의와 도시문명을 '살피면서 사유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은, 굵게 힘차게 그치지 않을 듯 다투어 몰려온다. 눈보라의 군단이다. 도시와 거리에는 투석이 날리고 총성이 울렸으리라. 눈은 비명과 함성을 빨아들이고 침묵을 선포했으리라. 백색의 계엄령이다. 쉴 새 없이 내림으로써 은폐하는 백색의 폭력, 어떠한 색도 허용하지 않는 백색의 공포! 그 '백색의 감옥'에는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꺼칠한 굴뚝새'가 있고, 굴뚝새를 덮쳐버릴 듯 '눈보라 군단'이 몰려오고, 그 군단 뒤로는 '부리부리한 솔개'가 도사리고 있다. 분쟁과 투쟁, 공권력 투입, 계엄령으로 점철됐던 시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골짜기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칠 때 그 눈발을 향해 날아가는 굴뚝새가 있었던가. 덤벼드는 눈발에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췄던가. 꺼칠한 굴뚝새의 영혼아, 살아있다면 작지만 아름다운 네 노랫소리를 들려다오! 다시 날 수 있다면
짧지만 따뜻한 네 날개를 펼쳐 보여다오! [정끝별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5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6
73 석류의 말/ 이해인 박영숙 2010.02.25 439
72 나뭇잎 하나가/ 안도현 박영숙 2009.11.03 437
71 [스크립]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박영숙 2009.12.09 437
70 광야/이육사 박영숙 2009.01.14 436
69 그대의 행복 안에서/칼릴지브란 박영숙영 2011.02.20 433
68 {스크랩}봄비 같은 겨울비 박영숙 2010.02.17 432
67 어떤 관료 - 김남주 박영숙영 2011.02.28 428
66 [스크랩]인생의 그리운 벗 박영숙 2009.11.13 427
65 [스크랩] 속옷/김종제 박영숙영 2011.04.04 425
64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딘 스테어(85세, 미국 켄터키 주에 사는 노인 박영숙영 2010.12.22 425
63 Like the Blooming Dandelion on Earth/흙 위에 민들레 자라듯 박영숙영 2012.01.21 423
62 귀천/천상병 박영숙 2009.01.14 417
61 [스크랩] 너에게 띄우는 글/이해인 박영숙영 2011.04.27 415
60 도 종 환/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할 표현들 박영숙 2009.11.13 413
59 빈집/기형도 박영숙 2009.01.14 410
58 이해인/존재 그 쓸쓸한 자리 중에서 박영숙영 2011.09.16 406
57 [스크랩]ㅡ가을에/정한모 박영숙영 2011.03.23 406
56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박영숙 2009.01.14 406
55 [스크랩] 황홀한 고백 /이해인 박영숙영 2010.11.30 402
54 호 수 /정지용 박영숙영 2010.11.30 402
53 [스크랩] 우정/이은심 박영숙 2009.11.13 397
52 가을에게 박영숙 2009.11.03 395
51 [스크랩]ㅡ불밥/김종제 박영숙영 2011.01.30 386
50 고갈비/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6.03 381
49 스크랩 ㅡ가정/ 박 목월 박영숙영 2011.03.23 381
48 스크랩 ㅡ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U. 샤퍼 박영숙영 2010.11.30 379
47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 펌글 박영숙 2009.03.11 368
46 스크랩 ㅡ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용혜원 박영숙영 2010.11.30 366
45 No Title 무제/ 신규호 박영숙영 2013.05.30 362
44 [스크랩] 꽃피우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359
43 [스크랩]ㅡ그리워 한다는 것은/이효텽 박영숙영 2011.03.23 358
42 김춘수 '꽃' /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57
41 목마와 숙녀/박인환 박영숙 2009.01.14 356
40 문학서재 입주를 축하! 환영! 종파 이기윤 2008.11.30 356
39 [ 스크랩]가끔은 애인같은 친구 박영숙 2009.08.27 356
38 용서 / U.샤펴 지음 박영숙 2010.06.09 356
37 사슴/노 천 명 박영숙 2009.01.14 354
36 스크랩 ㅡ 그대는 꿈으로 와서/-용혜원- 박영숙영 2011.02.17 354
35 [스크랩] 참 좋은 당신 /김용택 박영숙영 2010.11.30 353
34 moon sails out / 달이 떠오르니 박영숙영 2014.02.05 351
33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박영숙 2009.01.14 349
32 묵화(墨畵)/김 종 삼/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49
31 스크랩 ㅡ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박영숙영 2010.11.30 346
30 [스크랩}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박영숙 2009.09.28 345
29 ♡*미주문학동네 입주 환영*♡ 잔물결(박봉진) 2008.10.05 345
28 '풀'/ 김수영 박영숙 2009.01.14 342
27 성탄절 이주희 2008.12.20 339
26 저녁눈 /박 용 래 박영숙 2009.01.14 336
25 동천 /서정주/출처 다움 고요 박영숙 2009.01.14 335
24 [스크랩] ▶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는다 박영숙영 2010.12.13 335
23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박영숙 2009.01.14 334
22 편지 / 김 남조 박영숙 2010.07.01 333
21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박영숙 2009.01.14 332
20 남해금산 /이성복 박영숙 2009.01.14 332
19 동반자/ Companionship 박영숙영 2012.01.11 329
18 부화孵化 / 김종제 박영숙영 2010.12.10 329
17 스크랩 ㅡ사랑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328
16 근원설화 ㅡ김종제ㅡ 박영숙영 2011.07.16 327
15 스크랩 ㅡ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브라우닝 박영숙영 2010.11.30 325
14 스크랩 ㅡ좋은글 ㅡ하얀 겨울이 그립습니다 박영숙영 2010.12.02 323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11
어제:
48
전체:
885,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