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김수영

2009.01.14 14:28

박영숙 조회 수:342 추천:105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인 추천시 100편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흔하다. 풀은 자꾸자꾸 돋는다. 비를 만나면 비를 받고 눈보라가 치면 눈보라를 받는다. 한 계절에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한 계절에는 늙고 병든 어머니처럼 야위어서 마른 빛깔 일색이다. 그러나 이 곤란 속에서도 풀은 비명이 없다. 풀은 바깥에서 오는 것들을 긍정한다.

풀은 낮은 곳에서 유독 겸손하다. 풀은 둥글게 휘고 둥글게 일어선다. 꺾임이 없는 ‘둥근 곡선’의 자세가 풀의 미덕이다.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풀은 솔직한 육필이다. 풀은 ‘발밑까지’ 누워도 발밑에서 일어선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으므로 풀은 이제 벼랑을 모른다.

새날이 왔다. 새날을 받고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제에 있다. 어제의 슬픔과 어제의 이별과 어제의 질병과 어제의 두려움 속에 있다. 그러나 어제의 곤란은 어제의 곤란으로 끝나야 한다. 열등은 어제의 열등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심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은 만 명의 적이 와도 무서움이 없으며 물러섬이 없을 것이다. 자존(自尊)과 자립(自立)의 에너지가 우리의 자성(自性)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 일어서고 있다는 믿음, 넓고 큰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는 믿음, 우리는 이 다짐으로 새날을 살아야 한다. 눈사태를 뚫고 산정(山頂)을 찾아가는 산악인처럼.

타계한 해에 발표된 ‘풀’은 김수영(1921~1968)의 마지막 작품이고, 우리 시대 100명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시이기도 하다. 올해로 40주기를 맞은 김수영은 전위적 모더니즘으로, 4·19 혁명 이후에는 참여시(詩)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시는 사람들 가슴 속에 눕고 울고 일어서며 푸르게 살아 있다.

문태준·시인


문태준 시인은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으며 동서문학상·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등이 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5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6
130 사랑은/김남주 박영숙영 2010.11.30 271
129 저무는 꽃잎/도종환 박영숙영 2010.09.24 283
128 A winter Song 겨울노래 / 신규호 박영숙영 2014.01.05 287
127 [스크랩]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박영숙영 2010.11.30 293
126 아름다운 성탄절입니다. 장태숙 2008.12.24 295
125 Duskㅡ황혼 박영숙영 2012.08.22 300
124 스크랩ㅡ이제는 더이상 헤매지 말자 /바이런 박영숙영 2010.11.30 302
123 가을 오후 / 도종환 박영숙영 2010.11.11 304
122 즐거운 편지/황동규/출처 다움고요이야기 박영숙 2009.01.14 321
121 꽃잎/도종환 박영숙영 2010.09.24 323
120 스크랩 ㅡ좋은글 ㅡ하얀 겨울이 그립습니다 박영숙영 2010.12.02 323
119 스크랩 ㅡ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브라우닝 박영숙영 2010.11.30 325
118 근원설화 ㅡ김종제ㅡ 박영숙영 2011.07.16 327
117 스크랩 ㅡ사랑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328
116 부화孵化 / 김종제 박영숙영 2010.12.10 329
115 동반자/ Companionship 박영숙영 2012.01.11 329
114 남해금산 /이성복 박영숙 2009.01.14 332
113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박영숙 2009.01.14 332
112 편지 / 김 남조 박영숙 2010.07.01 333
111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박영숙 2009.01.14 334
110 [스크랩] ▶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는다 박영숙영 2010.12.13 335
109 동천 /서정주/출처 다움 고요 박영숙 2009.01.14 335
108 저녁눈 /박 용 래 박영숙 2009.01.14 336
107 성탄절 이주희 2008.12.20 339
» '풀'/ 김수영 박영숙 2009.01.14 342
105 ♡*미주문학동네 입주 환영*♡ 잔물결(박봉진) 2008.10.05 345
104 [스크랩}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박영숙 2009.09.28 345
103 스크랩 ㅡ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박영숙영 2010.11.30 346
102 묵화(墨畵)/김 종 삼/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49
101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박영숙 2009.01.14 349
100 moon sails out / 달이 떠오르니 박영숙영 2014.02.05 351
99 [스크랩] 참 좋은 당신 /김용택 박영숙영 2010.11.30 353
98 스크랩 ㅡ 그대는 꿈으로 와서/-용혜원- 박영숙영 2011.02.17 354
97 사슴/노 천 명 박영숙 2009.01.14 354
96 용서 / U.샤펴 지음 박영숙 2010.06.09 356
95 [ 스크랩]가끔은 애인같은 친구 박영숙 2009.08.27 356
94 문학서재 입주를 축하! 환영! 종파 이기윤 2008.11.30 356
93 목마와 숙녀/박인환 박영숙 2009.01.14 356
92 김춘수 '꽃' /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57
91 [스크랩]ㅡ그리워 한다는 것은/이효텽 박영숙영 2011.03.23 358
90 [스크랩] 꽃피우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359
89 No Title 무제/ 신규호 박영숙영 2013.05.30 362
88 스크랩 ㅡ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용혜원 박영숙영 2010.11.30 366
87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 펌글 박영숙 2009.03.11 368
86 스크랩 ㅡ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U. 샤퍼 박영숙영 2010.11.30 379
85 스크랩 ㅡ가정/ 박 목월 박영숙영 2011.03.23 381
84 고갈비/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6.03 381
83 [스크랩]ㅡ불밥/김종제 박영숙영 2011.01.30 386
82 가을에게 박영숙 2009.11.03 395
81 [스크랩] 우정/이은심 박영숙 2009.11.13 397
80 호 수 /정지용 박영숙영 2010.11.30 402
79 [스크랩] 황홀한 고백 /이해인 박영숙영 2010.11.30 402
78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박영숙 2009.01.14 406
77 [스크랩]ㅡ가을에/정한모 박영숙영 2011.03.23 406
76 이해인/존재 그 쓸쓸한 자리 중에서 박영숙영 2011.09.16 406
75 빈집/기형도 박영숙 2009.01.14 410
74 도 종 환/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할 표현들 박영숙 2009.11.13 413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36
어제:
90
전체:
885,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