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2009.01.14 14:55

박영숙 조회 수:569 추천:117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물은 선하다. 물은 그 자체로 흐르는 모습이다. 흐르는 에너지이다. 물은 작은 샘에서 솟고, 뿌리에게 스미고, 하나의 의지로 뭉쳐 흐르고, 환희로 넘치고, 작별하듯 하늘로 증발하고, 우수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다시 신생의 생명으로 돌아와 이 세계를 흐른다.

우리가 태어나고 사귀고 웃고 슬프고 울고 아득히 사라질 때에도 물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에 왔으며 우리보다 먼저 사라졌으며 우리보다 먼저 다시 태어났으니, 유한한 우리에게 물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물은 불과 흙과 공기와 더불어 이 세계가 온존하는 한 온존할 것이다. 해서 물은 모든 탄생과 소멸을 완성하며, 그 자체로 소생하고 순환하는 생명이다.

이 시를 읽을 때면 '선한 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이 어떤 부정과 대립이라면 물은 그마저도 끌어안는 어떤 관용. 물은 사랑. 자주 침묵하지만 한 번도 사랑을 잊은 적이 없는 마음 큰 이. 우리도 서로에게 물이 되어 서로의 목숨 속을 흐를 수 없을까.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을까. 물과 같고 대지와도 같은 침묵의 큰 사랑일 수 없을까.

강은교(62) 시인이 '사랑法'이라는 시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중략)//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라고 노래했듯이.

강은교 시인은 1968년에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초기에 발표한 시들이 강한 허무 의식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를 '허무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녀의 시는 민중적인 서정에도 가 닿고, 사소하고 하찮은 생명들을 끌어안기도 하는 등 아주 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느 해엔가 그녀가 시의 낭송과 울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속 질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시 치료' 공연을 하는 것을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다. 그때에도 지금에도 강은교 시인은 이 세계의 순례자로서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해 생명수를 구해오는 바리데기의 현신이다.[문태준 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4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6
133 When You are Old 그대 늙었을 때/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3.02.22 1777
132 비스와바쉼보르카 / 두번은 없다 박영숙영 2019.03.24 1212
131 [스크랩] 꽃잎 인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1209
130 들길에 서서 - 신석정 박영숙 2009.07.10 857
129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 번역:피천득 박영숙영 2012.01.21 819
128 그날이 오면/심훈 박영숙영 2012.03.12 801
127 행복/유치환 박영숙영 2011.02.21 794
126 동지 팥죽의 유래 박영숙 2009.12.23 779
125 길 잃은 날의 지혜/박노혜 박영숙 2009.11.18 773
124 When death comes 죽음이 오면 / 메어리 올리버 박영숙영 2014.02.05 759
123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박영숙 2009.07.10 748
122 초 혼 (招魂)- 김소월 - 박영숙 2009.07.10 745
121 Drinking Song 술 노래 / 예이츠 박영숙영 2013.02.22 732
120 님의친묵/한용운 박영숙 2009.01.14 710
119 푸쉬킨(Alexandr Sergeevitch Pushkin) (1799.6.6~1837.2.10) 박영숙영 2011.04.27 698
118 울긋불긋 단풍을 꿈꾸다 박영규 2009.10.25 695
11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박영숙영 2012.03.12 690
116 사슴/노천명 박영숙영 2012.03.12 659
115 겨울바다/김남조 박영숙 2009.01.14 652
114 서릿발/ 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2.07 631
113 "시" '아네스의 노래'/영화 <시 詩>가 각본상을 박영숙영 2011.02.28 616
112 산문(山門)에 기대어/송수권 박영숙 2009.01.14 612
111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박영숙 2009.11.13 609
110 새벽 /설램과 희망을 줍는 기다림 박영숙 2009.08.13 608
109 봄은 간다- 김 억 - 박영숙 2009.07.10 597
108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박영숙 2009.07.10 586
107 마음 /김광섭 박영숙영 2012.03.12 576
106 직지사역/ 박해수 박영숙 2009.12.16 576
»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박영숙 2009.01.14 569
104 I have a rendezvous with Death 나는 죽음과 밀회한다 박영숙영 2014.02.05 563
103 그 날이 오면 - 심 훈 - 박영숙 2009.07.10 546
102 꽃/박두진 박영숙영 2012.03.12 539
101 바위 /유치환 박영숙영 2012.03.12 539
100 [스크랩]ㅡ목단 꽃 그리움/이상례 박영숙영 2011.04.24 534
99 어머니의 손맛 박영숙 2009.12.23 532
98 잘익은사과/김혜순 박영숙 2009.01.14 532
97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하늘의 천 박영숙영 2013.02.22 527
96 낙 엽 송/황 동 규 박영숙 2009.11.03 527
95 대설주의보/최승호 박영숙 2009.01.14 517
94 간(肝)/ 윤동주 박영숙영 2011.03.24 516
93 가을비/- 도종환 - 박영숙 2009.07.10 516
92 푸른곰팡이 산책시 /이문재 박영숙 2009.01.14 514
91 청춘/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 박영숙영 2014.10.12 510
90 어떤 생일 축하/법정 박영숙 2010.08.31 509
89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도종환 박영숙영 2011.02.28 507
88 봄은 간다 / 김억 박영숙영 2012.03.12 502
87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498
86 하늘의 천/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1.09.29 496
85 [스크랩]즐거운 편지 /황동규 박영숙영 2010.11.30 487
84 시와 언어와 민중 의식 (한국문학(韓國文學) 소사 에서) 박영숙 2009.08.20 483
83 [스크랩]삶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아라 박영숙 2009.09.28 481
82 하루의 길 위에서 /이해인l 박영숙영 2011.07.06 475
81 Dust In The Wind(먼지 같은 인생) -Kansas(캔사스) 박영숙영 2014.02.07 475
80 산정묘지/조정권 박영숙 2009.01.14 473
79 청 산 도(靑山道)- 박두진 - 박영숙 2009.07.10 456
78 The Moon / 신규호 박영숙영 2013.12.19 455
77 스크랩] 어느 봄날의 기억 박영숙 2009.04.23 451
76 한 해를 보내며/이해인 박영숙영 2010.12.28 449
75 [스크랩] 안부 박영숙 2009.11.13 445
74 [스크랩/인생은 자전거타기 박영숙 2009.12.09 444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48
어제:
84
전체:
883,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