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눈 /박 용 래

2009.01.14 14:48

박영숙 조회 수:336 추천:115

저녁눈 /박 용 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박용래(1925~1980) 시인은 과작의 시인이었다. 그는 우리말을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기워 시를 써냈다. 그의 시는 가난한 것과 세상이 거들떠보지 않는 작고 하찮은 것들을 세필(細筆)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돌보았다.

'저녁눈'을 읽으면 허름한 말집(추녀를 사방으로 삥 두른 집)에 앉아 '탁배기'를 한 잔 하고 있는 박용래 시인이 보이는 듯하다. 말집에는 마차꾼과 지게꾼이 흥성흥성하고,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온 나귀와 노새가 급한 숨을 내쉬느라 투루루 투레질을 하고, 누군가는 구유에 내놓을 여물을 써느라 작두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해는 떨어지고 추운 밤은 오는데 눈발은 삭풍에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호롱불 불빛을 받으며 떠도는 눈발을, 조랑말의 정처 없는 걸음처럼 난분분한 눈발을, 여물 써는 소리처럼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붐비다'라고 써서 목탄화처럼 평면적인 풍경에 동선(動線)을 끌어넣는가 하면, 한 곳 한 곳 짚어가던 시선을 들어 올려 퀭한 빈터로 옮김으로써 시의 공간을 일순에 넓게 확장하는 재주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물러나 앉아 늦은 저녁 눈발 내리는 그 풍경을 하나의 '공터'로 읽었을 것이다. 마차꾼과 지게꾼의 떠도는 삶과 내일이면 또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그네들의 노심초사와 나귀와 노새의 공복(空腹)을 읽었을 것이다.

박용래 시인은 술판에서 엉엉 잘 울던 마음 여린 시인이었다. 천진하게 잘 울어 '눈물의 시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용래 시인과 절친했던 소설가 이문구는 '박용래 약전(略傳)'이라는 글에서 박용래 시인의 잦은 눈물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박용래 시인이 생전에 살았던 대전시 오류동 17번지의 15호를 찾아가면 "감새/ 감꽃 속에 살아라"라고 노래했던 선한 그가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다시 살고 있을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4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6
73 석류의 말/ 이해인 박영숙 2010.02.25 439
72 나뭇잎 하나가/ 안도현 박영숙 2009.11.03 437
71 [스크립]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박영숙 2009.12.09 437
70 광야/이육사 박영숙 2009.01.14 436
69 그대의 행복 안에서/칼릴지브란 박영숙영 2011.02.20 433
68 {스크랩}봄비 같은 겨울비 박영숙 2010.02.17 432
67 어떤 관료 - 김남주 박영숙영 2011.02.28 428
66 [스크랩]인생의 그리운 벗 박영숙 2009.11.13 427
65 [스크랩] 속옷/김종제 박영숙영 2011.04.04 425
64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딘 스테어(85세, 미국 켄터키 주에 사는 노인 박영숙영 2010.12.22 425
63 Like the Blooming Dandelion on Earth/흙 위에 민들레 자라듯 박영숙영 2012.01.21 423
62 귀천/천상병 박영숙 2009.01.14 417
61 [스크랩] 너에게 띄우는 글/이해인 박영숙영 2011.04.27 415
60 도 종 환/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할 표현들 박영숙 2009.11.13 413
59 빈집/기형도 박영숙 2009.01.14 410
58 이해인/존재 그 쓸쓸한 자리 중에서 박영숙영 2011.09.16 406
57 [스크랩]ㅡ가을에/정한모 박영숙영 2011.03.23 406
56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박영숙 2009.01.14 406
55 [스크랩] 황홀한 고백 /이해인 박영숙영 2010.11.30 402
54 호 수 /정지용 박영숙영 2010.11.30 402
53 [스크랩] 우정/이은심 박영숙 2009.11.13 397
52 가을에게 박영숙 2009.11.03 395
51 [스크랩]ㅡ불밥/김종제 박영숙영 2011.01.30 386
50 고갈비/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6.03 381
49 스크랩 ㅡ가정/ 박 목월 박영숙영 2011.03.23 381
48 스크랩 ㅡ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U. 샤퍼 박영숙영 2010.11.30 379
47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 펌글 박영숙 2009.03.11 368
46 스크랩 ㅡ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용혜원 박영숙영 2010.11.30 366
45 No Title 무제/ 신규호 박영숙영 2013.05.30 362
44 [스크랩] 꽃피우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359
43 [스크랩]ㅡ그리워 한다는 것은/이효텽 박영숙영 2011.03.23 358
42 김춘수 '꽃' /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57
41 목마와 숙녀/박인환 박영숙 2009.01.14 356
40 문학서재 입주를 축하! 환영! 종파 이기윤 2008.11.30 356
39 [ 스크랩]가끔은 애인같은 친구 박영숙 2009.08.27 356
38 용서 / U.샤펴 지음 박영숙 2010.06.09 356
37 스크랩 ㅡ 그대는 꿈으로 와서/-용혜원- 박영숙영 2011.02.17 354
36 [스크랩] 참 좋은 당신 /김용택 박영숙영 2010.11.30 353
35 사슴/노 천 명 박영숙 2009.01.14 352
34 moon sails out / 달이 떠오르니 박영숙영 2014.02.05 351
33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박영숙 2009.01.14 349
32 묵화(墨畵)/김 종 삼/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49
31 스크랩 ㅡ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박영숙영 2010.11.30 346
30 [스크랩}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박영숙 2009.09.28 345
29 ♡*미주문학동네 입주 환영*♡ 잔물결(박봉진) 2008.10.05 345
28 '풀'/ 김수영 박영숙 2009.01.14 341
27 성탄절 이주희 2008.12.20 339
» 저녁눈 /박 용 래 박영숙 2009.01.14 336
25 동천 /서정주/출처 다움 고요 박영숙 2009.01.14 335
24 [스크랩] ▶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는다 박영숙영 2010.12.13 335
23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박영숙 2009.01.14 334
22 편지 / 김 남조 박영숙 2010.07.01 333
21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박영숙 2009.01.14 332
20 남해금산 /이성복 박영숙 2009.01.14 332
19 동반자/ Companionship 박영숙영 2012.01.11 329
18 부화孵化 / 김종제 박영숙영 2010.12.10 329
17 스크랩 ㅡ사랑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328
16 근원설화 ㅡ김종제ㅡ 박영숙영 2011.07.16 327
15 스크랩 ㅡ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브라우닝 박영숙영 2010.11.30 325
14 스크랩 ㅡ좋은글 ㅡ하얀 겨울이 그립습니다 박영숙영 2010.12.02 323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49
어제:
63
전체:
885,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