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山門)에 기대어/송수권

2009.01.14 15:08

박영숙 조회 수:612 추천:115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1975년>

***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질 뻔했다. 송수권(68) 시인이 서대문 화성여관 숙소에서 이 작품을 백지에 써서 응모를 했는데, 잡지사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의 원고"라며 휴지통에 버렸다. 당시 편집 주간이었던 이어령씨가 휴지통에 있던 것을 발견해 1975년 '문학사상' 지면에 시인의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일화로 '휴지통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고, 발표 이후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를 애타게 호명하고 있지만, 이 시는 남동생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悲歌)였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비어 있는 맞은편을 망연히 바라보았을 그 시방(十方)의 비통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 죽은 동생의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을 드러낸다.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등의 역동적인 문장은 적극적인 환생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산문(山門)은 속계(俗界)와 승계(僧界)의 경계이고, 이승과 명부(冥府)가 갈라지는 경계인 바, 산문에 기대어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송수권 시인은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어오면서 황토와 대(竹)와 뻘의 정신에 천착해 왔다. 그는 '곡즉전(曲卽全·구부러짐으로써 온전할 수 있다)'을 으뜸으로 받든다.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추억이 있고, 들숨이 있지요.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공간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애지고 막막'하게 하지만 남도 특유의 가락과 토속어의 사용으로 슬픔과 한을 훌쩍 넘어서는 진경을 보여준다.  [문태준 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4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6
133 ♡*미주문학동네 입주 환영*♡ 잔물결(박봉진) 2008.10.05 345
132 문학서재 입주를 축하! 환영! 종파 이기윤 2008.11.30 356
131 성탄절 이주희 2008.12.20 339
130 아름다운 성탄절입니다. 장태숙 2008.12.24 295
129 '풀'/ 김수영 박영숙 2009.01.14 341
128 남해금산 /이성복 박영숙 2009.01.14 332
127 즐거운 편지/황동규/출처 다움고요이야기 박영숙 2009.01.14 321
126 김춘수 '꽃' /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57
125 동천 /서정주/출처 다움 고요 박영숙 2009.01.14 335
124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박영숙 2009.01.14 332
123 묵화(墨畵)/김 종 삼/출처 다움고요 박영숙 2009.01.14 349
122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박영숙 2009.01.14 349
121 사슴/노 천 명 박영숙 2009.01.14 352
120 대설주의보/최승호 박영숙 2009.01.14 517
119 저녁눈 /박 용 래 박영숙 2009.01.14 336
118 빈집/기형도 박영숙 2009.01.14 410
117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박영숙 2009.01.14 334
116 목마와 숙녀/박인환 박영숙 2009.01.14 356
115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박영숙 2009.01.14 569
114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박영숙 2009.01.14 406
113 님의친묵/한용운 박영숙 2009.01.14 711
112 겨울바다/김남조 박영숙 2009.01.14 652
111 귀천/천상병 박영숙 2009.01.14 416
110 푸른곰팡이 산책시 /이문재 박영숙 2009.01.14 514
» 산문(山門)에 기대어/송수권 박영숙 2009.01.14 612
108 잘익은사과/김혜순 박영숙 2009.01.14 532
107 산정묘지/조정권 박영숙 2009.01.14 473
106 광야/이육사 박영숙 2009.01.14 436
105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 펌글 박영숙 2009.03.11 368
104 스크랩] 어느 봄날의 기억 박영숙 2009.04.23 451
103 가을비/- 도종환 - 박영숙 2009.07.10 516
102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박영숙 2009.07.10 749
101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박영숙 2009.07.10 587
100 들길에 서서 - 신석정 박영숙 2009.07.10 857
99 청 산 도(靑山道)- 박두진 - 박영숙 2009.07.10 456
98 초 혼 (招魂)- 김소월 - 박영숙 2009.07.10 747
97 봄은 간다- 김 억 - 박영숙 2009.07.10 597
96 그 날이 오면 - 심 훈 - 박영숙 2009.07.10 546
95 새벽 /설램과 희망을 줍는 기다림 박영숙 2009.08.13 608
94 시와 언어와 민중 의식 (한국문학(韓國文學) 소사 에서) 박영숙 2009.08.20 483
93 [ 스크랩]가끔은 애인같은 친구 박영숙 2009.08.27 356
92 [스크랩]삶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아라 박영숙 2009.09.28 481
91 [스크랩}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박영숙 2009.09.28 345
90 울긋불긋 단풍을 꿈꾸다 박영규 2009.10.25 695
89 가을에게 박영숙 2009.11.03 395
88 나뭇잎 하나가/ 안도현 박영숙 2009.11.03 437
87 낙 엽 송/황 동 규 박영숙 2009.11.03 527
86 [스크랩] 우정/이은심 박영숙 2009.11.13 397
85 [스크랩]인생의 그리운 벗 박영숙 2009.11.13 427
84 [스크랩] 안부 박영숙 2009.11.13 445
83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박영숙 2009.11.13 609
82 도 종 환/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할 표현들 박영숙 2009.11.13 413
81 길 잃은 날의 지혜/박노혜 박영숙 2009.11.18 773
80 [스크립]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박영숙 2009.12.09 437
79 [스크랩/인생은 자전거타기 박영숙 2009.12.09 444
78 직지사역/ 박해수 박영숙 2009.12.16 576
77 어머니의 손맛 박영숙 2009.12.23 532
76 동지 팥죽의 유래 박영숙 2009.12.23 779
75 {스크랩}봄비 같은 겨울비 박영숙 2010.02.17 432
74 석류의 말/ 이해인 박영숙 2010.02.25 439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12
어제:
63
전체:
885,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