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by 박경숙 posted May 1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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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느님의 사랑에 눈 뜨여 그분을 우주만물을 섭리하시는 내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기까지 어머님은 나의 하느님, 나의 우주이셨다.  

나는 어머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6남매 중의 막내였으며, 더구나 충청도의 작은 읍 소재지였던 고향을 떠나 서울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때가 내 나이 만 10세가 채 안되었던 어린 나이, 그야말로 어머니의 사랑에 한창 젖어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머님은 내 유일한 사랑의 존재로 계실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 시절엔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은 내 문학적 기질에 대한 최초의 자극이 되었으며, 어머니는 내 표본의 여성상이이시기도 했다.

항상 조촐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하루종일 집안 일을 하시던 어머니, 어릴 때부터 남달리 느끼는 것이 많아 말도 많던 내가 어머니께 여러 가지 말씀을 드릴 때면 다만 빙그레 웃으실 뿐 과묵하기만 하시던 어머니.

유달리 음식솜씨가 좋으시고 한때 정치 일선에 서셨던 아버지의 내조와 자식 기르기에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어머니는 내겐 만능박사요, 영원히 내가 흠모해야 할 분으로 생각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에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부모님과 헤어져 살던 나는 잠시 고향집으로 돌아가 있다가 결혼으로 인해 또 집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이민을 떠나던 날, 유난히 헤어져 산 세월이 다른 자식보다 긴 막내딸을 이제는 더 먼 곳 미국 땅으로 보내야하는 것에 공항에서 통곡하시던 어머니. 이미 골 깊은 주름을 얼굴에 새기시고 여윈 어깨를 들썩이며 출국로로 들어서던 내 무거운 발걸음 뒤에서 어머니는 한없이 울고 계셨다.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한 채 떠나온 낯선 이민 생활에서 때때로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눈물에 절게 만들었다. 연로하신 데다 건강도 몹시 나쁜 편이셨기 때문에 떠날 때 공항에서 우시던 그 모습이 내가 뵙게된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더 그리웠다.

그러던 중 모 기업의 뉴욕지사에 나와있던 큰오빠의 도움으로 나는 한국을 떠난지 몇 해만에 뉴욕공항에서 어머니와 상봉했다. 미리 뉴욕에 와 계시던 어머니는 케네디 공항에서 나를 덥석 끌어안으셨다. 뼈만 남으신 어머님의 앙상한 등을 쓸며 이제는 내가 안아드려도 부족한 어머니의 여위심과 늙으심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를 안아주시던 어머니, 나를 키우시던 어머니는 이제는 초라하게 퇴색해가고 계셨다. 오직 나를 만나기 위해 불편하신 몸으로 그 긴 비행시간을 견디고 오셨다며 그 세월사이 나 또한 늙어가고 있음에 어머니는 안타까워 하셨다. 어머니에게 나는 언제나 젊고 아름다운 막내이기를 바라셨던지 전에 비해 탄력을 잃은 내 손과 볼을 어루만지시며 내내 섭섭해 하셨다. 나는 내 품에 안겨드려도 시원치 않은 어머니의 좁고 마른 가슴에 기대어 젊은 날 풍만했던 어머니의 젖가슴에 기대던 어린 시절의 내가 되고 싶었다.  

미국에 오신 김에 구경을 시켜드리겠다며 먼길을 달려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지치신 상태였다. 그러나 남편과 내가 구경욕심에 어머니에게 푸른 비닐로 된 우비를 입혀 폭포 가운데로 관광을 하는 배에 탔을 때, 폭포의 거대한 물살에 넋을 잃은 젊은 우리들 뒤에서 어머니는 틀니를 빼고 토악질을 하며 괴로워하셨다. 겨우 견디다 배에서 내리셨을 때 혈압이 한껏 오른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옷을 입으신 채 그만 설사를 주르르 하시는 것이었다. 남편이 주차장으로 자동차를 가지러 간 사이, 나는 어머니를 근처 잔디밭에 모시고가 배를 탈 때 입었던 우비를 깔고 눕혀드렸다. 그리곤 젖은 몸이 걱정되어 그 위에 다른 비닐우비를 덮어드렸다. 아! 비닐요 이불을 덮고 이국 땅 잔디밭에 초라하게 누우셨던 어머니는 마치 산 사람 같지 않게 창백하기만 하셨다.

겨우 정신을 차리신 어머니를 호텔 방으로 모시고 와 목욕을 시켜드리자니 정갈한 성격에 실수하신 것이 부끄러우신 듯 한사코 혼자 씻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더니 오랜만에 어미 등 좀 밀으라며 나를 부르셨다. 살아있는 육신으로서 이미 빠질 기름기는 다 빠진 것 같던 어머니의 마른 등을 밀며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혔던 폭신함과 아늑함을 회상해 보았다. 참말 인생무상이 느껴졌다.  

나는 아기를 씻기듯 어머니를 오래오래 씻겨드렸다. 정말 어머니는 그 순간 내 아기였다.  어머니 앞에 아기였던 나는 이제 아기가 되신 어머니를 씻겨드리고 있었다. 인생의 유한함을 알고 있던 나였지만 모든 것이 허무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은 혈육의 정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그 아픔보다도 몇 배나 큰 아픔이었다.  

새삼 한없이 크신 하느님의 존재가 느껴져 왔다. 너무나 크셔서 차리리 안 계신 것 같은 하느님, 너무나 큰 사랑이셔서 때론 작은 인간의 가슴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 같은 하느님의 사랑...... 나는 그 순간 어머님께 사랑을 바래왔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 평생 사랑의 진을 빼고 빼내어 껍질만 남으신 어머니께 이제는 내가 사랑을 드려야할 때인 것이었다. 그것도 이제껏 내가 어머니께 바래오던 그런 혈육의 사랑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어머니께 드려야 할 때였다.  

열흘간의 해후를 마치고 어머니와 헤어질 때 나는 어머님의 앙상한 몸을 끌어안고 기도했다.  이제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짓기보다는 어머니의 여생이 하느님과 함께 사는 평화의 삶이 되어 돌아가신 그후엔 천국에 이르시기를 소망했다.  

어린 시절 나의 우주였던 어머니, 내 하느님이었던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웠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을 배우고 이제 어머니의 늙으신 모습 안에서 인생의 유한성을 절감하며 더 깊이 하느님의 사랑에 기대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그 늙고 기운이 쇠진하신 모습 안에서도 내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주고 계셨다.
                                           [미주카톨릭다이제스트] 1996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