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21세기에 드린 나의 첫 기도

2004.05.02 08:45

노기제 조회 수:549 추천:107

010101 열린 21세기에 드린 나의 첫 기도
노 기제

새 천년을 맞던 작년만 해도 고집스럽게 그저 또 다른 하루로 새날을 시작했다. 요란스럽게 새 천년 첫날을 맞는 많은 무리들을 보며 그 풍부한 정서에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이번 21세기를 여는 첫 날 첫 시간이 특별하게 다가 왔던 것이다.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감정도 일종의 예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동안 난 그런 예의를 많이도 무시하며 살아왔다. 가장 큰 이유는 게으름이었으리라. 귀찮다고 생각하니 그 날이 다 똑같은 그 날이라고 치부하곤 여분의 마음 쏟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나의 그런 거부감을 희석시킨 사람은 리엔이었다.
여고 졸업 후 곧장 미국으로 건너온 중학교 동창인 리엔은 갑작스레 내 가슴을 파고든 인물이다. 왠지 친구라는 단어에 인색해지는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리엔의 입에선 친구라는 말이 나를 향해 잘도 튀어나온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란 수식어도 곧잘 붙어 다닌다. 내겐 아직도 생소한 단어인데.
"사랑한다. 기제, 너는 내 친구니까 얘기할게. 나 말야.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갈 준비는 하고있어."
여기까지는 나도 마찬가지다. 죽을 준비 완료 상태를 다짐하며 사는 삶이란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다. 그러기에 순간 순간에 열정을 쏟고 최선을 다한다.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후회할 일은 하지 않게 된다. 그런 나의 인생철학을 똑 같이 말하는 리엔이 새삼 소중하게 보였다. 곧잘 선심을 쓰듯 이런 일 저런 일 앞질러 해 주다가도 뱃장이 틀리면 금방 화를 내며 따져들곤 하는 것이 리엔의 성격이다. 그런 리엔을 난 도저히 친구로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죽을 준비 운운하는 그 모습에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리엔은 아프다. 약을 몇 가지씩 복용하는 환자다. 병명과 병세를 열심히 설명한다. 쉽게 말하면 뇌 세포의 숫자가 정상인 뇌 세포의 십분의 일 뿐이다.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의사가 기이히 여긴단다. 첨단의학이 주는 약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증상이 심할 땐 석 달 씩 누워있기도 했단다. 꼼짝 못하고 누웠어도 침대가 뺑글뺑글 돌아 아주 심한 멀미를 해야한다고 표현한다. 만약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얼른 먹여달라고 약을 보여준다.
그런 리엔이 작년, 새 밀레니엄 첫 날 해돋이를 페루의 마츄피츄에서 맞겠다고 떠났었다. 해발 만 사천 피트의 산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만나겠다고. 높이 오르면 하나님의 기운을 더 강하게 받아 치유 받을 수도 있다나. 어리석은 착상에 놀라긴 했지만 그 간절함에 동의하며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원했었다.
리엔은 혼자 살지만 일도 열심이고 매사가 적극적이다. 도무지 그런 병을 앓는 환자의 모습이 없다. 수시로 언성을 높이며 화를 벌컥벌컥 내는 인생의 여유를 보며 난 안도의 숨을 쉬곤 한다.
리엔이 전화를 안 받아도 겁이 덜컹 나서 서둘러 가곤 한다. 사십 마일이나 떨어져 사니 달려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아파트 메니저와 연락이 되면 그만큼 걱정은 줄어든다. 난 리엔의 음성으로 단번에 상태를 짐작한다. 그러나 리엔은 결코 먼저 말하지 않는다. 영어의 fine 이란 단어가 얼마나 위험천만인가 가슴을 쓸게 한다. 물어보고 다시 물어보고 하면 그제 서야 상태가 안 좋음을 고백하면서도 오지 말란다. 쉬면 된다고. 먹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괜찮다는 게 친구에게 하는 태도인가?
여러 면으로 리엔과 나는 다르지만 리엔이 아프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린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 리엔이 21세기 첫 날을 알라스카의 설원에 나타나는 신기한 빛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겠다고 여행을 떠났다. AURORA BOREALIS! 알라스카 페어뱅크지역 하늘에 나타나는 신비한 빛의 무리.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대자연의 현상과 접하면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싶은 리엔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런지 내 마음은 다급해진다. 12월 27일 여행길에 오르는 리엔에게 즐거운 여행되기를 빌어주고는 불안한 마음을 하늘에 맡기면서 결심했다. 새 해이던 새 날이던 내겐 별 의미가 없지만 이번만은 리엔의 생각과 발을 맞춰보자. 새로운 세기를 여는 첫 날 첫 번으로 리엔을 위한 기도를 하자. 다른 날 드리는 기도보다는 몇 배나 더 확실하게 응답 주시리란 리엔의 말없는 소망에 동참하면서 나도 은근히 내 기도에 힘이 더해지길 기대해 본다.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3
어제:
0
전체:
96,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