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여심

2003.07.11 02:03

노기제 조회 수:536 추천:89

100300 가을과 여심
노 기제
달린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향해 마음을 띄우며 달린다. 저 멀리 하늘 끝이 내려앉은 곳에 나의 모습이 있을 성싶어 달리고 있다. 이 세상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나의 진짜 모습. 난 그 모습을 찾고 싶다. 태양이 뜨거운 여름엔 존재하지도 않을 모습이다. 녹작지근한 봄날에도 없던 모습이다. 더구나 추위로 온통 몸을 가려야하는 겨울엔 생각조차 못하는 모습. 그 모습은 오직 소슬한 바람에 마음을 적시고 나면 나타난다. 나의 염원 속에서 가을을 포옹하면 탄생할 수 있는 모습을 찾고자 나는 허공을 달린다.
지난 주말 해질녘에 뒤뜰로 나가보았다. 평소엔 삶에 헝클어진 마음 탓에 발길이 뜸한 곳이지만 뭔지 모를 휑한 기대감이 뒤뜰로 이어졌다. 거기서 나를 반기는 건 대책 없이 심겨진 동백나무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연고로 동백나무를 아홉 그루씩이나 심었을까? 칠십 년 전에 세워진 우리 집 나이로 봐서 언제 적 주인이 심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세 그루도 아닌 아홉 그루라니. 그것도 뜰이 넓어서 공간 메우기로 그랬다면 이유가 될까만 그것도 아니다. 고작 사철나무 다섯에 철쭉이 셋, 그리곤 모두 동백나무다.
기대를 갖고 나선 뒤뜰에서 제일 처음 내가 만난 것은 진한 자주 빛 외겹 동백꽃이다. 진한 자주 빛 그 자체도 촌스러운데 어우러진 샛노란 꽃술이 영 마음에 안 든다. 얼굴을 찡그리며 가까이 살펴보니 꼭 한 송이만 폈다. 선구자답게 피곤한 얼굴 색이 안쓰러워 가까이 눈맞춤을 해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가을이구나. 어느새 그 뜨거운 문턱을 살포시 넘어 가을이 들어섰구나. 어쩐지 내 마음이 온통 헬리움 불어넣은 풍선 꼴이더라.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홉 그루 동백나무는 한꺼번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한 나무에서도 자기들이 정한 질서대로 차례로 꽃을 피운다. 또한 한 나무 한 나무 이어지는 꽃피우기가 일년 내내 이어진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신기한 것은 어느 한 나무의 꽃 모양이 다른 나무의 꽃 모양과 똑같은 나무도 없다. 각각 겹이 다르거나 색깔이 다르거나 하여튼 똑 같은 꽃 모양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보니 동백꽃을 못 본지가 한참 된 것 같다. 그렇다. 이른 여름까지 남아 있던 동백꽃을 향해 미운 눈길을 주었던 생각이 난다. 별로 예쁘지도 않고 향기도 없는 동백꽃을 난 은근히 구박하고 있던 셈이다. 이제 뜨겁던 한여름을 보내고 다시 동백꽃이 피기 시작했다. 가을에 젖어 가는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백꽃의 꽃말을 '기다림'이라 했나보다. 밖으로부터의 그 무엇을 기다림이 아닌, 자기들 안에서의 차례를 기다리는 차분한 질서가 보인다. 이제야 선구자로 핀 촌스럽게 느껴졌던 못생긴 꽃송이가 귀하게 다가온다. 전들 먼저 피고 싶어서 설익은 꽃봉오리 터트렸겠나. 주어진 차례를 따르다 보니 아직 준비도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얼굴을 보였겠지. 질서에 순종한 그 모습이 오히려 예뻐 보인다.
이런저런 속사정을 끌어안고 피어나는 동백꽃을 보며 똑 같은 얼굴 하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어느 누구하나 자기가 원하는 모습을 배당 받고 태어나는 사람 있겠나? 아니다. 그 당연한 순리를 인정하고 불평 없이 살아온 내 삶에 일대 반란이 일고 있다. 이제 막 들어선 가을 문턱에서 나를 온통 뒤흔드는 목마른 바램이 있다.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무서운 속도로 내 온 마음을 점령해 버렸다.
조카아이가 어릴 적에 즐겨 그리던, 만화책에나 나옴직한 아주 어여쁜 공주의 모습을 닮고 싶다. 초롱초롱한 새까만 눈동자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크고 똥그란 눈 주위엔 길고 까만 속눈썹과 그려놓은 듯 촘촘히 심겨진 반달형 눈썹이 오똑한 콧날과 잘 어울려 영락없는 절세 미인이다. 그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하고 레이스가 많이 달린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엔 보석으로 꾸며진 관을 쓰고 있는 공주님.
그런 얼굴을 갖고 싶다. 한 번 모습을 나타내면 주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부러움을 살 수 있는 그런 얼굴이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잠간이면 상관없지만 오래 보면 얼굴이 찡그려지는 동백꽃 같은 그런 모습은 싫다.
새 천년의 첫 가을이 내게 다가오는 출발점에서 나를 유혹한다. '달려라. 허공을 달려라. 하늘 끝이 내려앉은 저 멀리에 너의 참 모습이 있으니 달리고 또 달려라'라고. 그렇게 달리다 보면 만화책의 여주인공 같이 어여쁜 내가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뜰의 동백꽃은 결코 앞뜰의 장미꽃을 시샘하지 않는다. 향기와 미모를 뽐내는 화려한 장미꽃을.

*****미주 문학세계에 당선되어 글쟁이로서 이름을 받은 작품입니다. 2000년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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