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의 끝에는 이렇게 쓰고 싶다

2004.01.05 09:07

노기제 조회 수:534 추천:88

120403 이 해의 끝에는 이렇게 쓰고 싶다

노 기제
새벽잠을 깨우는 가쁜 숨의 전화가 있었다. 유 씨 버클리에 다니는 아들아이가 아파트 비를 못 내서 쫓겨날 지경이란다. 이따 점심때 갚을 테니 1200불만 아들아이 은행 구좌로 급하게 좀 넣어달란다. 얼마나 급했으면 주위사정 생각 없이 그런 부탁 할 사이가 아닌 내게 부탁했겠나 싶어 은행 문 여는 시간에 맞춰 2000불을 입금 시켰다. 그렇게 급한 지경이면 먹을 것인들 제대로 있겠나. 아이를 생각하며 부모의 입장이 되어 넉넉히 넣어준 것이다.
무얼 바랐느냐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선, 없는 사람의 답답한 심정을 느꼈을 뿐이다. 내게 여유가 없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마침 있었다. 점심시간에 갚겠다던 말은 전혀 계산하지 않았다. 점심때 있을 돈이라면 그렇게 급한 지경까지 가지도 않았을 터다.
특별하게 제목을 부칠만한 사람은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이지만 왠지 가까운 친구 같은 사람의 전화 목소리가 완전히 절망상태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일이 좀 있단다. 금방 세상을 하직할 것 같은 상태가 되도록 큰 일이냐고 다시 물었다. 주말에 교통사고를 냈는데 꼬마 아이가 달려들어서 피하다가 전봇대를 받고, 차는 완전히 폐차란다. 옆에 앉았던 와이프가 아주 많이 다쳤단다. 보험이 없어서 병원에도 못 가고 자신은 일을 해야 하니까 간신히 나왔다는 사정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이 되어 점심 식사도 잘 안 먹는다. 우선은 밥을 먹게 하고, 와이프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당장 차가 없어서 와이프 일도 못 가게 생겼으니 싼 차라도 하나 사야겠구나. 누가 뭐라지도 않았는데 혼자 머리 속이 바빠지면서 얻은 결론이다. 앞 뒤 생각 없이 그렇게 해 줬다. 생기가 나서 씩씩하게 돌아갔다.
생활고에 목숨을 끊는 가장이 생긴다. 그럭저럭 카드를 긁어서 살다가 숨이 턱에 차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다달이 필요한 돈은 안 들어오고 이자에 이자가 붙어 환하게 웃어 볼 새가 없다. 네 장의 크레딧 카드에 갚아야 할 빚이 2만 6천불이다. 그 동안 사치하고 펑펑 써대서 생긴 빚은 아니다. 이리 막고 저리 막고 하다 쌓인 빚이다. 누가 이 빚 좀 탕감 해 준다면 숨통이 트여 신나게 잘 살아볼 것 같다. 그렇게 해 줬다.
꿈같은 얘기다. 당장 끼니가 간 곳이 없어도 난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 돈의 있고 없음을 떠나 누가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척척 내 줄 사람이 있을까. 정말 답답했다. 부모님이 능력 없어서 학비도 제때 못 내며 간신히 졸업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돈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해야 했나.
돈, 돈, 돈, 가능하다면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딱한 사정 내게 말하는 사람에게 요술쟁이처럼 다 들어주고 싶다. 내가 그런 경험을 했으니까. 돈 없어 답답한 지경 많이 당해봤으니 그런 답답한 지경에 있는 사람 모두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그런데 막상 내겐 돈이 없다. 있을 땐 그렇게 살았다. 내가 돈이 없어지더라도 또 다시 예전의 그런 지독하게 답답한 지경 까진 가지 않는다. 예전엔 부모님만 바라보며 살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전히 내 주위엔 돈 없어 답답한 사람이 많다. 아직도 내 귀엔 힘없이 삶을 기뻐하지 않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비참한 삶에 얼굴을 펴지 못하는 표정이 보인다. 축 처진 어깨가 유난히 슬픈 사람도 많다. 나도 점점 작아지고 있다. 돈의 위력이 이렇게 우리를 꼴 짓고 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어두운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꼴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순 없다. 무슨 방법이든 찾아야 한다. 희망을 주자. 기쁨을 주자. 행복을 체험하도록 해 주자. 우리가 사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건 아니다. 욕심을 줄이고 점점 마음을 비우다보면 자연스럽게 인생은 기쁨이 되고 행복은 바로 내 삶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풍성했던 내 주머니는 비워지고 더 이상 꺼낼 것이 없어서 조금은 답답해지려 하지만 그래도 난 정말 잘 살아왔다. 바르게 살았다고 자신한다. 이 해가 나의 마지막 해가 된다해도 맨 끄트머리에 난 이렇게 쓰련다.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았다고. 날마다가 행복했다고. 내 맘은 아직도 큰 부자다. 나는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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