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빤히 보이는

2004.05.02 07:06

노기제 조회 수:556 추천: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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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빤히 보이는

노 기제

누구는 머리가 터져 나갈 듯 골치를 앓으며 일하고 누구는 집안에서 편히 뒹굴고 있느냐고 J와 팔자 타령 좀 했다. 그렇다고, 일해야하는 내 팔자가 한심하다는 말은 아니다. 남편이 넉넉히 벌어다주니 일 안하고 집에 있어도 되는 J의 팔자가 당연히 좋은 팔자라고 못박고 싶었던 거다.
J는 나의 유일한 친구다. 어떠한 경우에 처해도 결코 나를 배반하지 않을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냥 친구가 아닌 진짜 친구다. 어떤 비밀이라도 서로 지켜주는 그런 친구다. 친할 때 믿고 얘기한 비밀을 빌미로 역습을 가하는 어떤 동창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J가 집에서 뒹굴고만 있는 게 아니란다. 인터넷으로 주식투자를 해서 한 달에 3만 불을 벌었단다. 그 소리에 난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한 달에 벌 수가 있느냐고 바짝 다가갔다. 뭐라고 설명을 하는데 난 도무지 뭔 소린지 모르겠다. 거두절미하고 그럼 내 돈도 좀 늘려달라고 했다. 금방이라도 내 돈이 뻥 튀겨질 것 같다.
그런 대화가 있은 후, 난 날마다 J에게서 소식이 오길 기다린다. 자기 돈 마음껏 불리고 나면 내 돈도 좀 불려주리라 한껏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연락만 오면 금방 돈을 건네줄 수 있도록 준비도 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반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돈을 너무 벌어서 컴퓨터가 터져 버렸나. 원래 우리 생활이 이렇다. 반년을 넘도록 전화한통 없이 지내는 것이 다반사다. 얼굴한번 보려면 벼르고 별러서야 만난다. 그렇지 않음 무슨 일이나 있어야 만나게 된다. 부부싸움하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으면 전화한다. 그러면 금방 "내가 나갈까?" 이게 바로 미국생활이라는 거다. 뭐가 그리 바쁜지. 날마다 다람쥐 쳇 바퀴 도는 생활이 우리로 하여금 여유를 잊고 살게 한다. 이틀씩이나 되는 주말은 주말대로 시간이 없다. 가족과 함께 있는 주말에 둘만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나는 20년 넘게 한 가지 직종에만 종사하며 만족하게 산다. 제일 처음은 타이피스트로 시작해서 면허취득하고 통관사가 되어 회사도 차렸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내 나름대로 즐기면서 일한다. 수입도 만족할만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런 나도 한 달에 3만 불이란 수입은 어림도 없는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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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가시나야 돈 너무 벌어서 컴퓨터가 빠개졌냐? 왜 소식도 없냐?"
심통이 나서 벅벅 긁어대는 소리로 전화를 했더니 후후후훗 계면쩍게 웃는다. 그 동안 컴퓨터 놀이로 쏠쏠하게 주식투자에 재미를 부치고 뉴욕에 있는 올케에게 십만 불을 빌렸단다. 증시 시간 맞추느라 새벽 다섯 시(뉴욕 시간 8시)엔 깨어 컴퓨터 켜야하고 증시 마감시간까지 컴퓨터로 숫자만 들여다보니까 눈이 급작스레 나빠졌단다.
"나쁜 기집애, 내 것도 좀 해 달라니까. 관둬라 관둬. 은행에서 주는 이자나 받아 거북이 걸음이나 하련다. 너라도 돈 억수로 벌면 떨어지는 고물이라도 내 차지가 있겠지. 야, 그러나 저러나 한 달에 3만 불씩 반년이면 벌써 십 팔만 불 벌었잖아?" 뭘 모르는 내 계산법이다.
그 정도는 아니란다. 돈을 딸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단다. 그런데 자기는 돈이 될 것 같은 곳에다 왕창 넣기 때문에 위험이 따른다나. 하루에도 몇 번씩 넣었다 뺏다 이리 옮겨 놓고 저리 옮겨 넣고 아주 바쁘단다. 장의 변화가 순간마다 있어서 변소도 못 가고 화면만 들여다봐야 한단다.
뭔 소릴 하는지 알아들을 순 없지만 어쨋던 무지 바쁜 모양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 돈도 뻥튀기 하라고 조를 수가 있는가. 아쉽지만 내가 뒷걸음질하면서 포기했다. 그리고 난 생각했다. 나는 돈버는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냥 하나 하나 모아서 평범하게 살아야 하는 팔잔가 보다고.
그 후에도 가끔 궁금해서 전화를 하면 항상 신호만 가고 받지는 않는다. 바빠서 그런가 했더니 그게 바로 인터넷에 전화가 연결이 되어 통화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바빠진 친구가 마냥 높아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내 돈도 좀 불려주면 좋겠다고 은근히 기대하기도 한다.
그후 J는 동창회 모임에도 안 나온다. 전화하기도 힘들다. 아마 이 기집애 나중에 만나면 얼굴이 컴퓨터 화면으로 바뀌어져 있을 거다. 저녁시간이면 통화가 가능하니까 전화 할 생각도 해 보지만 저녁땐 내가 바쁘다. 회사일 마치고 시장 들러서 반찬거리 사고 저녁 준비하면 남편 돌아올 시간이다. 그러면 저하고 나하고 단둘이만 하고 싶은 통화를 남편이 듣는 데서 해야하니 아예 전화를 안 하고 만다.
그래도 마음은 늘 J에게 가 있다. 변소도 못 간다니 그러다 오줌소태라도 생기면 어쩌나. 그러니 끼닌들 제때 찾아 먹겠나.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때 찾아 먹고 쉬엄쉬엄 벌면 더 좋으련만. 그 집 남편 되게 좋겠다. 집에서 마누라가 소리소문도 없이 억수로 돈벌고 앉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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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 난 무척 외롭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일이 꼬이고 신경이 곤두설 때면 J와 얘기하고 싶은데.... 남편과 티격태격 다툰 후에는 남편 흉을 싫건 봐야하는데..... 어디 마땅한 사람도 없다. 혹시나 하고 J에게 전화를 해도 역시 안 받는다. 돈 튀겨지는 소리만 뻥뻥 들릴 뿐이다.
그렇게 나를 외롭게 하며 소식도 없더니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내 사무실로 나오겠단다. 이제서야 내 돈 뻥튀기 해주려나 짐작하곤, 난 신바람이 났다. 그 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테니 점심은 얻어먹기로 작정을 했다.
"아니- 너, 얼굴이 그게 뭐냐? 어느새 검버섯이?"
소리도 없이 피식 웃는다. 일자리가 필요해서 나왔단다. 돈을 벌어야 한단다. 우리가 지금 새로 일자리 찾아 나설 나이는 아니다. 하던 일도 이젠 접고 편안하게 들어앉을 나이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무슨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노동은 못한다. 평생 안 해본 노동을 오십이 넘은 나이에 어찌 할 수가 있겠는가. 필요하면 하나님이 힘 주실 꺼 라며 아무 일이라도 해서 빚 갚아야 한단다. 다달이 나가는 이자만이라도 벌어야 할 입장이란다.
그게 뭐 주식시장이 요즘처럼 바닥을 칠 때 생긴 일도 아니다. 너나할것없이 주식으로 작게 크게 재미를 보던 때에 J는 이미 십만 불씩 두 번이나 날렸단다. 자기 말대로,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왕창 넣었다가 홀랑 날리곤 했단다. 한 달에 삼만 불씩 늘어났으리라고 내 나름대로 가늠하던 계산은 끝났다. 뻥튀기에 참여하지 못한 내 돈은 비록 은행이자가 밑바닥이라도 곤한 잠을 자고 있다.
자기가 저질렀으니 자기가 해결하겠다는 J의 각오가 비장하다. 노동 품을 팔아서 이자라도 갚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해봐도 일자리가 없다. 하는 수없이 또 한번 빚 얻어 장사를 하겠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천만이다. 동의 해 줄 수가 없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다고 단정했다. 자기 남편의 만류도 안 듣고 여기까지 왔는데 친구인 내 말이 먹힐 리 없다. 의논은 해 보지만 동의 안 해줘도 혼자 자기 생각대로 또 저질렀다.
그런데 지금 J는 샌드위치 장사를 아주 잘하고 있다. 애당초 계획했듯이 많은 돈을 갚아나가진 못해도 이자와 원금을 까나간다. 평생 처음 노동을 하는 셈이다. 새벽에 일어나고, 하루종일 샌드위치 팔고, 시장 가고, 밤늦게 자고 몸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하단다.
여전히 만나지도 못하고 전화통화도 자주 못하지만 씩씩하게 잘 견디는 J가 대견하다. 요즘 세상에 남의 돈 빌려쓴 후 갚으려 애쓰는 사람이 몇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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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까. 노동하며 고생은커녕 남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도 갚을 생각은 안 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숫자놀음만 잘하면 금방 벼락부자가 될 것 같더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닌가보다. 나도 진작에 인터넷을 잘 배웠더라면 한 두 번쯤은 뻥튀기 했음직도 한데 귀찮아서 안 배운 것이 현상 유지하는 지름길이 된 셈이다.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고 J에게 살짝 물어 봤다.
"경험자로서 나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라 할래? 분산 투자라던가, 아주 작은 돈만 취미로 투자해 보라던가, 뭐 그런 거 말야."
"아예 알려고 하지도 마. 주식투자란 네 사전에 없는 걸로 해."
J의 샌드위치 장사가 잘돼서 빨랑 빚 다 갚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랑 날마다 만나서 히히 하하 호호 옛날 여고시절처럼 살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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