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인사

2004.05.02 07:15

노기제 조회 수:586 추천: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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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사
하늘이 높아졌습니다. 높아지면서 파란색을 쏟았나봅니다. 쌀쌀한 바람에 밀린 구름이 어디론가 쫓겨가고 온통 파란 하늘에 꼬맹이들이 비칩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 유모차에 안전하게 앉은 아기, 아빠 손에 매달려 걷는 듯 뛰는 듯 움직이는 조금 큰아기, 아가들 전용 하늘인가 봅니다. 그 하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초겨울 잔디가 아직도 짙은 녹색입니다. 거기에도 똑같은 아가들이 있습니다. 파란 하늘은 거울이 되어 잔디밭에 있는 아가들을 담아주었던 것입니다.
예배당과 친교 실 중간에는 언제나 깔끔하게 손질된 잔디밭이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친교 실로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교우들에게 가장먼저 눈에 띠는 장면은 고만고만한 꼬맹이들이 디뚱 대는 모습들입니다. 걷는지 뛰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몸놀림들입니다. 나는 이 삼 개월 된 혹은 한 두 살 되는 아가들을 한 놈도 빠뜨리지 않고 인사를 합니다. 때론 엄마 품에서 뺏어 안아주기도 하고, 뽀뽀를 강요하기도 하고, 작은 장난감으로 환심을 사기도 합니다.
내가 아이일 적부터 나는 아기들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아찔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부산으로 피난 가서 살 때였습니다. 우리 집 아래층에 사는 가정에는 돌이 안된 아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자주 어른들 눈을 피해, 자고있는 그 아기를 혼자 등에 업곤 했습니다. 다섯 살 짜리 아이가 한 살 짜리 아기를 어른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등에 업는다는 행위는 대단한 위험을 동반합니다. 포대기까지 야무지게 두르고 아기를 재우곤 했습니다. 우리 엄마한테 혼두 많이 났는데, 개의치 않았습니다. 너무너무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도 모릅니다. 그냥 이쁘니까, 마냥 안아주고 싶은 것입니다. 길을 지날 때, 또는 전차나 버스 안에서도 주위에 아기가 있으면 꼭 얼러주고 웃어주고 아는 척을 하고야맙니다. 주책 스러울 정도로 아가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가, 내 생전 처음으로 일부러 피하는 아기가 생긴 것입니다. 처음엔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습니다. 얼굴을 보려고도 안 했습니다. 싫었습니다. 분명 아기에게 탄생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데 입은 닫혀버리고 고개는 돌려져버리곤 했습니다. 나 자신도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는 채 매주 교회에서 그 아기를 만나는 일이 부담스러워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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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기 부모와도 불편한 눈인사가 고작이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눈도 안 맞추려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야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기이한 현상이었습니다. 확실한 이유 한가지는 그 아기 아빠의 전 부인이 자꾸 그 아기 얼굴을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부인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지 않습니다. 사정이 있어 이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여자 만나서 재혼한 가정에 첫 아들로 태어난 아기입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기에 내가 그렇게도 이뻐하는 아가들과 똑같이 그 아기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렇게 불편하게 시간이 좀 흘렀습니다. 강보에 쌓여 어른들 품만 전전하던 그 아기가 어느새 강보를 떨쳐버리고 근사한 연미복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아기가 벌써 오 개월이 되었다며 누군가가 아가의 연미복이 앙증스럽지 않느냐고 내게 물어왔습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조용히 그 아기를 보았습니다. 아가도 나를 조심스레 보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같이 아가는 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내게 말하고 싶다고 허락 받기를 종용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따듯한 한 줄의 물이 내 가슴에 스며들며 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아가도 따라서 얼굴에 약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곤 내게 아주 작게 말하는 듯 했습니다.
"왜 나는 안되나요? 아줌마, 나도 이뻐해 주세요. 나도 아줌마 사랑 받고 싶단 말에요. 네?" 나즉하지만 강한 소리가 내 가슴을 혼들었습니다. "미안, 미안, 아가야, 정말 미안해. 글쎄나 말이다. 그래야겠지? 그랬었구나. 그렇게 기다렸구나. 아아 어쩌면 좋으니, 아줌마가 나빴구나. 난 말야, 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다 알고 있었구나."
나의 처절한 반성이 혼잣말처럼 흘렀을 때, 그 아가의 얼굴이 화악 밝아지며 제법 큰 소리로 옹알이를 했습니다. 그 소리는 강약과 높낮이를 조화시킨 호소력 있는 기쁨의 옹알이 었음을 나는 알아차렸습니다. 아직 말도 못하는 핏덩이를 향해 가볍게 내 감정에만 충실했던 어른인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래, 아가야, 네가 무슨 죄가 있겠니. 넌 다만 내가 좋아하는 다른 모든 아가들과 다름없는 아기일 뿐인데. 이제부터 이 아줌마랑 잘 지내보자."
십 일월도 반이 뚝 달아났습니다. 높아진 하늘에 찬바람의 안무가 우리 둘을 초대합니다. 하얀 조각구름들을 후우 불어 보내고 새파란 하늘무대에 아가와 함께 춤을 추랍니다. 이번엔 녹색의 잔디가 거울이 되어 우리의 춤을 비춰줄 것입니다. 까르륵 까르륵 즐거운 웃음소리가 아가의 내부에서부터 힘차게 달려나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그 아가와의 첫 인사가 이루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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