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마감시간

2007.05.18 09:34

노기제 조회 수:649 추천:123

051107                    내 삶의 마감 시간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재해 소식이다. 그저 뉴스로만 들린다.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는 듯이 느껴진다. 전쟁에, 홍수에, 지진에, 가뭄에, 총기 난사에, 토네이도에 산불에.....지치지도 않고 이어지는 재난들을 이젠 매일 들어야 할 소식인양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소식을 전해 듣는 위치에선 놀라움이 조금씩 희석되어 간다. 남의 일이다. 다른 나라 일이다. 나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듣고는 잊고, 일상생활을 이어간다.
        화요일, 한국에선 어버이날로 제정 된 오월 팔일이다. 수업도중, 창밖으로 보이는 시커먼 떼구름에 산불이라 직감했다. 연기만 보이더니 순간 빨간 불꽃이 심지처럼 생겼다.  곧 아주 큰 불덩어리가 된다. 학교에서 볼 때 북쪽이니 내가 사는 동네 뒷산이다. 일어나 창밖으로 다가서니 분명 우리 동네 쪽이다. 수업에 방해가 됨을 느꼈는지 선생님이 농담을 한다. 그래 너희 집에 불났다. 농담도 농담 나름이지. 변하는 내 얼굴 표정을 보곤 진지한 음성으로 어서 집에 가보란다.
        아무렴, 아니겠지. 무슨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겠나. 그래도 가보자. 시간은 오후 한 시 반. 집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동네도 조용했다. 검붉은 연기구름의 위치는 분명 집 뒷산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에 있던 강아지가 평화롭게 자던 낮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아무 일도 없구나. 다시 학교로 가서 나머지 수업을 마치고 왔다.
        퇴근 해 돌아 온 남편이, 프리웨이 출구도 막아 놓고 밖은 지금 야단이란다. TV로 보이는 산불의 상황이 마치 화산이 터져 용암이 흐르는 듯이 보인다. 내가 집으로 돌아 올 땐 조용했다. 별 걱정 없이 저녁 준비 하고, TV도 켤 생각을 안 했다. 혹시나 하고 한국 라디오 방송을 틀어 봤지만 산불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미국 TV 방송국들은 정규 방송을 다 중단하고 온통 산불 광경을 중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에야 별일 있겠나. 동네 뒷산일 뿐이다. 저녁 식사 후 나른하게 보내던 시간을 지금은 TV 뉴스로 긴장하고 있을 뿐이다. 소방대원들의 진화 작업은 필사적인데 창밖으로는 거친 화마의 일부가 우리 집 앞까지 단숨에 달려오는 듯 보인다. 남편은 밖으로 나가 상황을 지켜보며 지붕과 나무들, 집 주위에 물을 뿌리고 있다. 그 때, 만약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나? 무슨 일이란 구체적으로 뭘까. 집과 소유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과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깝다고, 스스로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자칫 내 생명이 여기서 마감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맨 몸으로 나갈 것인가. 뭔가 갖고 가야 한다면 뭘 얼마만큼 어디에 챙겨야 하나.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눈에 보이는 강아지만 끌어안고 나가면 된다.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엔 뭘 갖고 갈 순 없다.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일까. 아직 세상과 하직하는 건 아니다. 내 집을 잠간 버려두고 가야한다면 여행 가듯 간단하게 짐을 꾸리면 될 것이다.
        물 뿌리기를 중단하고 들어 온 남편의 음성이 급해진다. 불길이 바람타고 제법 빠르게 이동하니 피해야겠다. 간단하게 중요한 것만 챙겨라. 뭐가 중요한 건데? 바빠진 마음에 여행 가방을 꺼내긴 했는데 막상 그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서두르라는 남편의 높아진 소리가 한층 나를 당황하게 한다. 뭘? 뭘 서둘러야 하는데?  
        옷장을 여니 속옷 칸이다. 있는 것들 다 옮겨 넣었다. 평상시 편하게 입는 운동복 한 벌 던져 넣는다. 허리 아프면 쓰는 허리띠. 어깨 아플 때 두드리는 안마기. 여권. 집문서. 아참 수표책도 넣어야지. 그리곤 다시 멍해진다. 살아가는 데 이렇게 필요한 게 없을까.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갖고 살았다. 방마다 가득 찬 것들 중에 가져 갈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또다시 채근하는 소리가 들린다. 뭘 챙겨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강 하면 된다나. 설마 불길이 여기까지야 오겠냐며, 연기로 숨 쉬기가 곤란하니 피하는 거란다. 그런 이유라면 집을 버리고 떠나기 싫다. 집의 입장을 생각해보니 무척 서운할 것 같다. 끝까지 물이라도 뿌리면서 지켜 주고 싶다. 대강 챙긴 여행 가방과  물 한 박스를 차에 옮겼다. 차고에 있던 차도 꺼내 놓고 여차하면 떠날 수 있게 했다.
        갑자기 확성기로 경고를 준다. 위험한 상황이니 빨리 이 지역에서 나가란다. 우리 집 앞을 몇 번이나 오가며 계속 한다. 남편에게 고개를 저었다. 난 안 간다. 대피소가 가까이에 마련 됐으니 서두르라는 소리다. 강아지가 내 품에서 벌벌 떤다. 우리 식구를 품고 있는 우리들의 집도 혹여 떨고 있는 건 아닐까. 함께 있자. 20년이나 서로를 품어 주며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집만 덜렁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다. 이건 배신이다. 정말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 될 때까지 함께 있고 싶다.  
        뚜벅뚜벅 무거운 발소리에 이어 초인종 소리. 문을 여니 마스크를 한 몸집이 아주 큰 폴리스 맨 이다. 어서 대피소로 가세요. 동네에 가득한 연기로 기침이 나온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우린 집에 있겠습니다. 준비는 됐습니다.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되면 그때 이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명히 경고 했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집 밖은 어둠이 짙다. 다행이다. 벌겋게 불길이 보이던 때보다 훨씬 마음이 놓인다. 바람이 잠들었다. 불길도 따라 숨을 고르는 모양이다. 그럼 우리도 눈 좀 붙여 볼까. 많이 피곤하다. 집에서 식구가 함께 잠자리에 들게 된 것이 가슴 벅차게 고마워진다. 소방대원들도 우리처럼 잘 수 있으면 좋겠다.
        남의 일로만 느껴지던 일. 지구촌 소식으로만 간주 하던 일. 바로 내게 닥친 일이고 보니 삶과 죽음을 오가는 걱정까지 했다. 편한 호흡을 방해하는 매운 공기에 조금 불안하지만 그대로 잠을 청해 본다.  모든 정리를 끝내야 하는 내 생의 마감시간은 아직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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