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라인 클럽, 그 3년 후

2007.06.20 08:43

노기제 조회 수:512 추천:126

20070615                인라인 클럽, 그 3년 후

        7월 4일,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다. 마침 일요일 이었다. 동호회 모임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연락하고, 가입해서 회원이 된 후 첫 출석한 날이다. 웹사이트 상으로 운영되던 클럽이어서 회원들 모두는 닉네임으로 소개되어 있고 난 에세이스트로 가입 되었다.
        나이가 소개 되지 않아, 보이는 그대로 느끼면 된다. 그러나 난 알았다. 모인 사람을 둘러보니 20대가 주류를 이루고, 30대, 40대, 당시 난 늦은 50대였다. 이글을 쓰기 전, 전편인 인라인 클럽을 읽었다. 내가 쓴 글이란 생각이 안 든다. 벌써 까마득히 먼 옛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한 여름에 만나서 함께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바닷바람에 마음도 싱그러워 진다, 밥 함께 먹고, 누구 생일인 날엔, 케이크 사들고, 노래방으로 가기도 했다, 애들이 무슨 돈 있으랴 싶어 슬그머니 계산을 끝내면, 질색들을 하던 표정들. 이모가 한 턱 쏘는데 뭘 그리 자존심들을 세우느냐며 핀잔으로 얼버무리던 내게. 이모란 호칭이 안 어울린다며 에세이스트라고 굳이 불러주던 이쁜 아이들.
        그 해 겨울이 되며 애들은 하나 둘 결석이 잦아 졌다. 여름방학 동안에 열심히 출석하던 아이들 중, 개학과 동시에 학교생활로 돌아 간 탓이다, 일부는 직장 생활에 시달리다 보니 취미 생활은 뒷전이 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웹사이트에선 자주 만나 소식은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공지사항이 떴다. 웹사이트 상태가 좋지 않아 다움에서 싸이월드로 옮겼다고 새로 가입하는 절차를 자세히 올려 논 것이다.
        그 때 난, 여권 복사해서 제출하라는 항목에서 딱 막혔다. 스케너가 없고, 혼자 할 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일피일 미루다 자퇴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래도 실전엔 내가 가장 우세한 상태여서 거의 매주 일요일 산타모니카 비치로 출석을 했다. 얼굴을 익히고, 서로 농담도 하며 한창 정들고 있던 즈음, 얼굴을 보이는 아이들이 줄더니 급기야는 나 홀로가 되었다.
        바람이 심한 날, 모래가 날려 눈을 뜨지 못하게 돼도 난 비치로 간다. 혼자 인라인을 타면서 즐겁다. 비가 오는 날은 마음으로 인라인을 타며 화원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달이 가고, 해가 바뀌고, 계절이 몇 번 지나는 동안, 뜨문뜨문 한 사람씩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스쳐 지난다.
        유진인 버지니아 어느 의대로 진학했고, 쎅쉬마마와 귀연 왕자는 각각 결혼을 했다. 강사인 오렌지님은 스키강사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이고, 바닥인생은 일의 종류를 바꾼 모양이다. 난타 소식은 안 들린다. 졸업은 했는지. 청랑은 신발가게 매니저로 일한다. 결혼한 귀연 왕자는 부모님이 하시던 봉제사업 이어 받아 사장님이 됐고 곧 아기 아빠가 될 거란다. 아드모아님은 여전히 젊은 오빠 모습으로 무척 반가워하며 웹사이트 쥔장인 크리스 소식을 준다. 유학생으로 와서 몇 년 애만 쓰다가 별 수 없이 귀국했다는 사연이다. 다시 예전처럼 함께 모여 밥 한번 먹여 보냈으면 좋았을 걸, 가슴이 아리다.
        바닷바람 가르며 혼자 달릴 땐, 그리운 마음 가득 가져와 조금씩 뿌린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을 대하면 단숨에 행복이 가슴을 채운다. 이렇게 사는 난, 모양이 다른 외길 사랑을 한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날 잊어도 내 가슴엔 언제나 그들이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날들이 나 혼자 왔다, 혼자 타고, 홀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속도를 줄이며 마무리하려 차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청랑을 만났다. 단숨에 환하게 밝아지는 내 얼굴. 반가운 인사하며 혼자냐 물으니 대답을 듣기도 전, 귀연왕자님 출연이다. 거봐. 내가 맞지. 오셨다구 했잖아. 내 차를 인지하고 청랑에게 말하니 청랑은 아니라고 했다나. 갑자기 오고 싶어서 준비 없이 와서는 스케이트를 빌려 오는 길이란다.
        느닷없이 귀연 왕자님, 아기 이름을 지어 달랜다. 아참 축하해. 언제야?
10월. 아들? 딸? 검사 해 봤어? 둘 다 지어 달라나. 검사는 안 해서 모른다고.
왜 내게? 할아버지가 계신데. 글 쓰는 분이니까
        짧은 대화 속에 묻어나는 진한 사랑에 젖어 들며 난 황홀해진다.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했을까. 귀한 첫아기의 이름을 내게 지어 달라니. 갑자기 내가 뭐 굉장한 사람인 양 착각하게 된다.
        스왑밋에서 일하는 청랑은 화요일이 쉬는 날이라 일요일엔 못 나온단다. 오늘은 부활절 일요일이라 예외라기에 그럼 언제 화요일에 만나 같이 타자. 귀연 왕자가 뛰어 든다. 난?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일찍일찍 들어가구. 안될 말이라나. 유부남 유부녀는 만나도 되지만 총각하고 유부녀가 만나는 건 불륜이란다. 제법 열을 올리며 하는 말에 청랑과 난 큰소리로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게 누가 장가는 그렇게 일찍 가랬냐?
        아직 스물여덟, 생일 돼야 스물아홉 되는 말띠들이다. 역시 별명대로 귀연 왕자다. 엄마 군번인 내게 그런 농담을 던지는 천진한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가. 덩달아 내 기분 하늘로 떠오르고 내 아이들인 양 그대로 품고 싶다.
        구름 끼는 날, 바람 몰아치는 날, 세차게 비 쏟아지는 날, 그리고 햇빛 밝은 날, 어느 날이 건 내 가슴엔 웃고 달리는 떠들썩한 그들 모습이 있다. 가슴에 둘 수 있는 모습이 있음에 행복하다. 외길 사랑이면 어떠랴. 그런데 그들도 나를 가슴에 두고 있으니 놀랄 일이다. 고마운 일이다. 더 많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한국으로 돌아 간 크리스가 다시 모습을 보일 날을 기다린다. 쥔장 잃고 묻혀버린 웹사이트의 부활도 기다려본다. 의사의 모습으로 나타날 유진을 기다린다. 귀연왕자의 아기. 그리고 또 다른 짝을 만나 나타 날 아이들의 모습도 기다릴 것이다. 인라인 클럽 그 3년 후인 오늘의 모습이다.
        금년 7월 4일은 수요일이다. 연휴로 이어지지 않아 여행들 못 갈 터니
인라인 타러 비치로 가면 그리운 얼굴들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가슴이 콩닥콩닥, 손가락 꼽아 남은 날짜를 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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