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까지 벗어 준

2007.06.29 02:48

노기제 조회 수:935 추천:134

20070618            

        유월 중순이 지났구나. 밤이면 밤대로, 낮이면 낮대로 난 많이 춥네. 남편과 강아지와 함께 자는 방에서는 무거워 싫다는 남편에게 맞춰 얇은 이불을 덮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 치우지 못한 솜바지 입고, 남편 출근 준비 끝나고 나면 조금 덥다는 느낌에 갈아입는다. 기온이 최고가 되는 한낮이면 또 한 차례 갈아  입어야 한다. 겨울 솜바지를 비롯해 반바지까지 다양하게 널려있다. 그에 따라 상의까지 몇 종류 늘어놓으니 내 전용 작은 방은 창고를 방불케 한다.
        이런 작은 창고를 배낭에 넣고 여행을 다녀야 할 판이다. 날씨가 어떤가 알아보면 내가 사는 엘에이 날씨와 같단다. 어? 그럼 창고를 이동하며 여행을 해야겠네. 그러나 여행 가방을 챙길 땐, 무거운 옷, 두터운 옷들은 넣었다 뺏다를 반복하다 결국은 빼놓고 가장 온도가 높은 시간대에 맞춰 옷을 챙긴다. 가볍고 얇은 옷들만 색색으로 접어 넣는다.
        지난 해 10월 20일경, 그렇게 챙긴 가방을 들고 고교 동창생들과의 추억여행에 나섰다. 한국으로 가서 짐을 풀고 며칠 지낸 후, 다시 짐 챙겨 중국여행을 함께 떠났다. 여러 곳을 둘러보는 여행이니 짐은 될 수 있는 한 간단하게 챙길 것을 엄두에 뒀다. 더구나 중국은 걷는 여행이나 마찬가지다. 버스로 이동은 하지만 걷는 거리가 대 부분이다. 걸으면 더워진다.
        이상기온으로 더운 날씨가 반복 되니 그에 따라 입었다. 호텔에 짐을 두고 간편한 복장으로 나섰다. 비오는 날씨까지 되었으니 후덥지근 찜통이려니 예상한 것이다. 내 예상은 빗나가고 기온은 떨어져 선선하다 못해 제법 춥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다들 두툼한 겉옷 차림이다. 유난히 추위를 타면서 복장은 한 여름. 추워 소리를 연발하며 몸을 웅크리고, 티셔츠 여벌로 챙긴 것 껴입는다. 비는 주룩주룩 몸은 젖고 바람까지 불어 주니 견딜 수가 없다. 아니, 해가 쨍하니 밝은 날엔 그리도 덥더니만 이거 원, 미국사람 대접을 이렇게 한담.
        관광여행을 하면서 무슨 구경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그저 춥다 추워 소리만 쉼 없이 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저 만치 떨어져 앉았던 숙화가 자기 겉옷을 벗어 준다. 너도 입어야지. 비오고 추운데. 아니란다. 자기는 스웨터를 두 개나 입었단다.  그럼 겉옷은 네가 입고, 스웨터를 하나 벗어 주라. 난 일회용 우비가 있으니 스웨터만 입어도 바람막이, 비 막이는 되니까.
        혼자 약은 척, 가볍게, 작게 짐을 챙긴 내가 바보스럽다. 두툼한 겉옷을 미국에선 챙겨 넣었는데, 서울에서 지내던 며칠 동안이 너무 더웠던 탓에 중국여행 길엔, 빼 놓은 거다. 난, 한 치 앞을 모르는 단순 세포인가. 어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갈까. 어차피 가방은 꽉 차지도 않았는데. 다행히 날씨가 더워 내가 챙긴 짐이 딱 들어맞았다면 누가 박수라도 쳐 줄 거라 기대했던 걸까?
        추운 것도 화가 나고, 바보 같은 내가 더 화가 난다. 옷 벗어 준 숙화에게 미안하고, 그날 밤, 잠들기 전 숙화는 내 방에 들러 칠 부 속옷과 겉옷까지 두고 갔다. 자기는 옷이 많아서 필요 없으니, 내일은 따뜻하게 입고 즐겁게 구경하잔다.
        이튿날엔 숙화의 옷으로 무장하고 따뜻한 관광을 했다. 장가게, 원가게의 절경을 차근차근 눈으로 찍어 두고 숙화의 사랑으로 포장까지 했다. 비는 계속 내리지만 겁날 것 없으니, 활기차게 봐야 할 것 모두 보며 걸었다. 춥지 않으니 살 것 같다. 신명나게 다니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한층 의미 있게 다가온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김숙화. 46년의 세월을 단숨에 비껴선, 꼬맹이 적 친구로 추위에 떨던 날 녹여줬다.
        무사히 서울로 돌아와 신세 졌던 옷들 돌려주니, 스웨터 색깔이 네게 잘 어울리니 미국 가지고 가서 입어. 속옷도 얇은 것이라 필요 할 것 같은데 가져 가구. 숙화의 마음이 고마워 갖고 왔다. 앞이 멋지게 패인 하얀 스웨터. 정말 자주 입고 나간다. 입을 적마다 숙화의 따스한 음성이 반복 된다. 한 번 나를 안아 본다. 숙화를 안은 듯 가슴까지 더운 물이 흐른다. 칠 부 속옷도 자주 입게 된다. 숙화의 모습이 보인다. 사랑 받아 많이 행복하다. 낡아 헤질 때까지 입고 또 입을 거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 때문에 일기를 짐작키 어려워졌다. 밤과 낮의 기온차가 화씨로 이십여 도나 되기 일쑤다. 평상시 집에서의 생활도 이처럼 여러 계절의 옷들을 늘어놓고, 하루에도 서너 번씩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기온에 유난히 민감한 탓에 방이 지저분하다고 남편에게 변명을 한다. 그러게. 왜 나만 유난히 추위를 타서 이 모양으로 사는지 민망스럽지만, 숙화의 스웨터를 만지작대며 춥다고 엄살떠는 나를 천진스레 보던 숙화의 얼굴이 떠오른다. 괜찮아, 너 입어. 따스한 음성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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