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떠러지

2007.08.07 00:30

노기제 조회 수:730 추천:131

20070629                         낭떠러지
        
        뱀이다. 차분하지만 긴장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리더의 손가락을 눈으로 따라 간다. 정말 뱀이다. 준비가 끝나면 선두가 붙어야 할 바위, 바로 그 지점이다. 혀를 파르르 떠는 움직임이 자신의 길을 막지 말라는 듯 보인다. 까만 뱀이네. 새까만 뱀이라니.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얼굴이 동그라니 독은 없다는 판단이 서는데 타르르르 타르르르르, 꼬리 떠는 소리가 방울뱀이 아닐까.
        전문 바위 꾼과 바위타기에 나선 유월 둘째 일요일. 아버지날이다. 주말 근무 차례가 되어 남편은 출근했다. 바위가 타고 싶다고 언제든 가능한 건 아니다. 장비를 갖춘 전문인이 동행할 때만 된다.  선두로 우릴 이끌어 주실 산악회의 원로, 모두들 맏형님이라 칭한다. 금년 칠순인데 아직도 후배들을 위해 선두로 바위에 오른다. 마땅히 훈련 된 선두가 없기 때문이다. 맏형님이 리더가 되면, 난 만고강산 겁날게 없다. 어떤 난코스라도 차근차근 설명 하시면, 그대로 잘 따르기만 하면 어느새 높이 솟은 바위 정상에 서 있게 된다.
        초반, 까만 뱀과의 만남에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지팡이로 딴 길을 향해 던졌다. 물론 형님이 했다. 내가 아무 괴성도 내지 않았기에 의외로 편한 선두를 보셨다는 후담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뱀을 본 즉시 숨을 몰아쉬며 엄마야란 고성이 튀어나오기 일쑤가 아닌가. 난, 놀라도 소리 없이 속으로 놀라고 만다. 내가 설쳐대면 주위 사람이 위기감으로 어려워 질 터니, 될 수 있는 대로 보통 말소리 외에는 침묵하는 편이다. 특히 위험한 순간엔 그렇다.
        선두는 어렵다. 깍아 지른 바위를 붙잡을 로프도 없이, 뒤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바위 틈새에 고리를 박으며 로프를 걸면서 외롭게 오른다. 한 발 한 발을 생각하고, 신중하게 옮긴다. 오늘은 왜 이리 미끄럽냐. 시간이 지체된다. 햇볕은 따가워진다. 목이 탄다. 얼음물 한 모금 생각이 간절하다. 물론 없다. 배낭에 있는 물은 미지근하겠지. 그것도 중간에선 마실 수가 없다. 배낭을 바위 아래 두고 맨 몸으로 바위에 붙었으니까.
        산악회 회원들을 모두 데리고 가던 바위는 짧은 코스였는데 오늘은 올라가고  올라가도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의사전달은 오직 로프의 팽팽함으로 이뤄진다. 왜 이리 미끄럽냐 시던 그 지점에서 오른 발이 찌익 미끄러지더니 이내 확보 된 왼발도 미끄러지며 내 몸은 공중에 달렸다. 로프로 나를 감당하고 있는, 보이지도 않는 리더에게 위험이 전달 됐다.
        올라 온 만큼 그냥 떨어진다면, 나와 리더 두 사람 다 무사할 순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악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할 수 있다. 리더가 든든하게 확보하고 있다. 다시 시작하자. 미끄러웠던 그 지점을 피해 발 디딜 곳을 눈으로 찾는다. 바위에 붙이는 면을 넓혔다. 다섯 발가락 끝에만 힘을 주고 일어서던 자세를 발바닥 반에서 전면을 붙여 보며 차분히 시도 했다.
        스리 피치. 세 구간이라 할까. 리더가 먼저 올라가서 확보한 후, 뒤 따라 간 사람과 만나고, 다시 처음과 같이 로프 정리해서 선두가 고리 박으며 올라가 는 것을 세 번으로 나눈 것이다. 바위의 모양새에 따라 구간이 나눠진다. 거기에 따라 로프의 길이도 달라져야 한다. 물론 굵기도 달라진다.
        전문인에게 배우려면 하루 300불 이상 든다. 절대 쉬운 스포츠는 아니다. 세 구간을 무사히 올라서면 하늘과 입맞춤이라도 할 수 있을 듯 가까이 느껴진다. 걸어서 산 정상에 올랐을 때완 다른, 사뭇 진한 감사함과 통쾌함이 따른다. 리더 말씀이 화이브 텐, 오늘 코스였단다. 난이도에 따라 정해 진 바위의 구별된 이름이라 짐작 된다.
        절대로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어려운 바위 잘 하고, 내려가기만 하면 되니까 더 조심해야 한다고 이르고 또 일러주신다. 두 구간을 로프로 내려오고 나머지 부분을 내려다보니 줄 없이도 쉽게 내려 갈 수 있을 것 같아 리더에게 물었다. 경험이 많은 바위꾼들은 보통 그냥 내려가지만 나 같은 초짜는....., 할 수 있으면 해 보란다.
        다시 한 번, 위험한 부분 잘 하고, 끝 부분이니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에 찬찬히 내려가겠다고 했다. 또 당부 하신다. 자신 없으면 어느 지점에서 건 멈추고 기다리라고. 지나치게 조심 하란다고 투덜대며 자신 있게 내려가기를 잠깐, 췸니다. 굴뚝처럼 좁은 부분이라 등을 붙이고 손바닥과 무릎을 대며 쉽게 내려가질 듯 했는데 발이 닿지 않는다.
        다시 오르며 두리번거려도 내려갈 방법이 없다. 바로 앞에 작은 바위가 보이는데 훌쩍 뛰면 될 듯싶다. 첫 발에 서지 못하고, 반동으로 한두 발 더 가면 낭떠러지인 좁은 공간이다. 살살 뛰자. 그러자니 착지 못 하겠고, 좀 세게 뛰자니 딛고 정지할 수 없을 것 같고. 위를 보니 로프 정리에 바쁜 리더가 또 한번 주의를 준다. 안전하게, 안전하게, 집에 가는 길이니 더 안전하게....
        부담 드리지 말자. 내가 내 힘으로 해결하자. 기다리면 되는데 엉뚱한 판단을 하고 조심스레 졈프 했다. 아주 짧은 순간 공중에 뜨고 보니, 아차 이건 아니다. 반동으로 그냥 설 수가 없겠구나. 아이쿠 아버지. 나 서야 되요. 세워 주세요. 급한 기도 후 발이 돌에 닿긴 닿았는데, 멈추질 않고 한 발 두 발 더 간다. 안돼요. 안으로 삼키는 큰 소리를 외치며 발에 힘이 들어갔다. 서 졌다.
        그 작은 공간 끝이다. 한 발만 더 갔어도 그냥 추락이다. 아무소리 못하고 돌처럼 섰다. 감사 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까불지 말아야 했는데. 그 담은 앞장서는 리더 따라 조심, 또 조심 내려왔다. 바위를 떠나 흙에 발이 닿자 갑자기 내장이 흔들린다. 고개를 들어 곁에 조용히 서 있는 아까 그 바위를 보니 엄청 높아 보이는 직선의 절벽이다. 서지 못하고 떨어졌다면 지금 쯤 난, 어떻게 되어 있을까. 남은 두 사람은 또 어떤 모양 일까. 오싹 소름이 돋는다.
        겉으로 보이는 난 멀쩡한 데, 내 오장육부는 마구 흔들린다. 한기가 느껴지며 사각의 얼음덩이 안에 갇힌 듯 꼼짝을 못 하겠다. 우선 뭣 좀 먹으라는 리더의 음성이 귓바퀴를 돈다. 아무것도 먹을 수도, 입맛도 없다. 여전히 내장 흔들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나를 깨어 있게 한다.
        인생의 절벽을 만나고도 잘난 척 했나?, 겸손하지 않고 대자연에게 까불었나? 바위 타겠다고 따라나선 자체가 이미 신세 지는 것이고, 부담 드리는 일인 걸 몰랐던 걸까. 어쩌자고 끝마무리에 신세 안지겠단 생각을 했을까. 죽음으로 뛰어드는 길이었는데.
        그리고 보니, 작년 아버지날에도 남편은 주말 근무였고, 인라인 스케이트 타러 바닷가로 가다 대형 차 사고를 혼자 당했다. 무슨 조화인가. 일 년에 한 번씩, 그것도 같은 날에 죽을 뻔 한다. 그리곤 25일 후 다시 태어 난 듯, 생일을 맞았다. 한 번도 아닌, 두 해 연거푸, 덤으로 살게 되는 특권을 얻은 기분이다. 아직 죽지 않은 자아를 죽이라는 하늘의 신호인가. 어떻게 자아를 죽이나. 절벽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시선을 멈추며 흔들리는 내장의 소리를 해석하려 숨을 멈춰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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