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된 연애편지

2007.12.14 06:00

노기제 조회 수:690 추천:130

20070828                출판 기념회에서 회상된 연애편지
        2회 이중희 선배님의 출판 기념회에 참석 했다. 책 제목이 미국 와서는 안 될 사람, 미국 오면 행복 할 사람이다. 책을 받아 든 참석자 모두는 똑같은 질문 하나를 자신들에게 던지고 있다. 어떤 피하지 못할 큰 심판을 앞 둔 사람들처럼, 두근대는 가슴으로 조심스레 언도를 기다리는 광경을 스케치 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과연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 혹, 와서는 안 될 사람 쪽이라면 무지 불편한 자리다.
        6회 이완규 선배님의 귓속말 명령에 따라 식탁에 놓인 와인을 축하객들 잔에 채우는 작업을 맡았다. 동기 민경자와 같이 모든 분들께 술을 따른다. 자칭 이쁜 기생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임무 수행을 했다. 마음 가볍고, 즐거운 기생노릇이었다.
        식순에 따라 식사가 시작되고, 줄 끝자락 부분에서 음식을 접시에 담으며 이동할 때다. 마주보며 이동하던 분의 이름표를 읽었다. 낯익은 이름이다. 얼굴은 낯설다. 박기순씨, 나 생각나요?  친근하게 던지는 말에 툭 튀어나간 내 대답이 2학년 언니에게 연애편지 전하라셨던 선배님?  아니란다.
        아차. 내가 착각했다. 중학교 1학년 가을 쯤 이다. 학교에서 뭔가로 좀 유명한 2학년 언니가 내게 쪽지를 주며 3학년 남학생 누군가에게 전하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지금 이 분은 남자 선배니 내가 심부름 했던 그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분이다. 실수했다. 낯선 선배에게 경솔하게 말머리를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도 내 기억은 연애편지와 엮인 사람이라고 자꾸 나를 긁어 댄다. 누굴까?
        우리 일학년 여학생 교실이 아래층에, 2,3학년 남학생 교실은 2층, 3층에 있었다. 같은 건물 아래 위층이었지만 남학생 교실이 있는 2, 3층엔 한 번도 올라가 본적이 없었다. 심부름을 맡고 3층으로 올라갔다. 막상 남학생들로 가득 찬 교실이 보이자 복도를 걸을 수가 없었다. 발이 그 자리에 붙은 듯 움직이질 않는다. 내가 그 곳에 왜 갔는지도 잊었다. 호흡도 멈출 것 같고 뒤 돌아 내려올 수도 없는 어려운 시간에 구세주처럼 나타나신 노창익 선생님. 무슨 일이니? 선생님, 이것 좀 전해 주라는 데요 선생님이 좀 해 주세요.
        그 때 나타나신 노창익 선생님이 얼마나 자애롭게 보이던지. 내가 맡은 일을 대신 해 주신다니 또 얼마나 감사 했는지. 안심하고 내 교실로 돌아간 후 까마득히 잊고 살아 온 사건이다.  지금 생각하니, 쪽지를 선생님께 드렸다는 건, 일러바친 결과가 됐고 그 두 상급생에게 무슨 체벌이 가해졌는지 그 당시 난 그런 생각 못하는 철부지였나 보다.
        이중희 선배님의 삶 자취가 축소되어 편집 된 화면들을 보며, 난 중학  일학년으로 돌아갔다. 엄한 표정으로 꾸중하는 엄마가 보인다.  엄마 음성은 내가 아주 중한 죄를 짓고, 세상 끄트머리로 떨어진 다 끝난 계집애를 대하듯 짙은 한숨이 섞여 있다. 누가 알가 봐 겁나니까 읽어 보고 당장 증거 인멸하라며 편지를 주셨다. 아울러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내가 뭘 어쨌다고? 우체부 아저씨가 배달한 모양이다.
        중학 입학과 동시에 지리 선생님에게 넋을 빼고 있던 내게, 아무리 2년 선배라 해도 그런 연애편지에 동요 될 내가 아닌 걸 엄만 모른다. 지금 생각하니 편지 자체가 꽤 괜찮았다. 내용은 잊었어도 문장이 읽기에 매끄럽던 기억이다. 문학에 소질이 있던 사람인 듯싶다. 그러니 그 나이에 소위 연애편지를 써 보낼 생각을 했겠지. 보통은 마음만 굴뚝같지, 감히 글로 써낼 엄두를 못 내던 시기가 아닌가. 내 가슴에 아무 바람도, 설렘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그 편진 엄마 뜻을 따라 읽고 찢어 버렸다. 아깝다. 평생 간직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1959년 가을 쯤의 일을 2007년 한 여름에 떠올리고 있다. 그것도 대단한 착각현상을 거치며 더듬어 끄집어 낸 것. 싱그럽다. 평생 어느 남학생의 관심 한 번 못 받아 봤다고 투덜댔는데 그게 아니었으니 기분 엄청 좋아진다. 같은 특별 활동 반 이었다고 나를 일깨우던 선배. 이제 생각난다. 그 선배들이 졸업할 때, 모두에게 똑 같은 예쁜 석고를 선물했다. 그러나 그 선배에겐 특별한 걸로 했다. 어린 맘에도 편지를 보낸 그 선배를 귀히 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내가 받아 본 단 한 편의 연애편지. 그 선배가 틀림없다.
        얼핏 들으니 이민 온 해가 나와 같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지난일 나누고 싶다. 엄마가 계시면 왜 그렇게 맘 졸이며, 꾸중 했는지 여쭤 볼 텐데. 내가 엄마라면 연애편지 받는 딸아이가 자랑스러울 것 같다. 그 선배는 편지 내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까? 혹여 내 기억이 엉뚱하다면 어쩌나. 그래도 맑은 하늘 올려다보는 듯 상큼하다. 고운 색 풍선하나 하늘로 날려 보낸다. 천진한 시절을 추억함이 기쁘니까.
        저 멀리 산모퉁이에 앉아 있는 오두막집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굴뚝 하나 내 가슴에 그려 넣었다. 예쁜 추억 한 토막 소올솔 피어나게 해 준 이중희 선배님의 출판기념회. 진정과 열성으로 혼신을 다해 살아오신 삶을 읽으며 나도, 그 선배도 미국 와서 많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 해 본다. 한 번 만나 지난 얘기 나누고 싶은데, 그 선배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동창 모임은 언제가 되려나?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들러주시고 글 읽어 주시는 분들께 [2] 노기제 2022.12.01 42
» 회상된 연애편지 노기제 2007.12.14 690
139 내가 마지막이길 노기제 2007.09.03 715
138 연애편지 노기제 2007.08.29 681
137 밥 먹자 노기제 2007.08.22 646
136 애인 노기제 2007.08.08 2431
135 맞 바람 노기제 2007.08.08 578
134 스포츠 광고 모델 노기제 2007.08.05 638
133 길목 노기제 2007.07.29 500
132 나는 왜 글을 쓰나 노기제 2007.07.13 682
131 낭떠러지 노기제 2007.08.07 730
130 속옷까지 벗어 준 노기제 2007.06.29 935
129 인라인 클럽, 그 3년 후 노기제 2007.06.20 512
128 아이 하나 노기제 2007.06.12 595
127 편지 노기제 2007.05.20 967
126 구름 한 점 노기제 2007.05.20 963
125 산불 노기제 2007.05.18 472
124 흔적 노기제 2007.05.18 443
123 내 삶의 마감시간 노기제 2007.05.18 649
122 먼발치 노기제 2007.04.26 618
121 바꿔주고 싶은 개팔자 노기제 2007.04.12 781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96,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