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첫사랑

2007.01.08 05:49

노기제 조회 수:531 추천:118

새해 벽두에 배달 된 전자 메일. 서울에 있는 조카녀석에게서다. 이모가 여섯이나 있으니 가끔 하나 뿐인 고모에게 얘기 할 때면 부연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모라는 단어 앞에 이름이 붙고, 몇 째라는 설명이 따라야 하고, 그도 부족하면 사는 모양까지 더해야만 고모가 알아 들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렇게 시시콜콜 다 꺼내지 않아도 그 아이 고모인 난 이름 하나만으로도 몇 째 이몬지, 어떻게 사는지 곧 알아 듣는다.  한 번 들었던 사실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뒤 돌아 본 나의 사랑할 시기는 모두 짝사랑 으로 일관 된 시간들이다.  여학생 시절 내게 관심을 보이고 뒤 좇아  온다든가 하던 남학생은 만나지 못했다. 있다 해도 그런 사실이 내겐 없는 것과 같다. 그 시기에 나의 모든 관심은 선생님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사실 그 땐, 같은 또래의 남학생들은 나보다 엄청 아래인 아이들 처럼 느껴졌고, 당연히 동생들에게 대하듯 거침 없고, 당당하고, 어른스러웠다.  하물며 몇 년 아래 남학생들이야  무슨 상대가 되었겠나.
        조카아이의 넷째 이모라면 우선 나이가 나보다 서너살 아래다. 처녀 땐 어느 외국 상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인물이 좋다. 이름은 민영. 결혼생활이 어려웠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별거가 오래 지속되어 이혼까지 간다고 들었다. 물론 한국에 사는 그들의 소식을 미국에 사는 내가 들었다 해도 얼마나 자주 들었겠나.  인물 좋고 친정 재력 괜찮은데 재혼 시키면 되려니 했다. 무척 오랜 시일을 그런 채로 사는 줄 알았다.  얼마 전 다시 합쳐서 잘 산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내 뒤에 앉았던 친구 따라 서울역 근처에 있는 성남교회에 나갔었다. 그 당시엔 성경말씀이나 믿음이나 어느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친구 권유로 그냥 한 번 가 본 것 뿐이다. 물론 한 번으로 끝나진 않았다. 성가대에 섞여 찬양도 했다. 청년들끼리 따로 모여 무슨 활동도 했다. 그래봤자 내 관심을 끄는 인물도 사건도 없으니 딱히 내 삶에 있어 기억에 남을 만한 부분은 아니었다.  조카아이에게 이멜을 받기 전까지는.
        고모 학교때 성함을 말하니까 자기가 고모보다 두 살 아래고, 성남교회 다녔고, 그 때 고모가 많이 예뻐 해 줬다고. 고모 덕에 시발 택시도 타보고 우리 집에도 가 봤다고.  머리가 좋으시니 기억하실 꺼라고.  이름은 김용익.
        갑자기 난 파안대소. 콤퓨터 앞에서 한 참을 웃었다.  온통 내 생각은 그 때 그 성남교회로 돌아갔다. 예배실 아랫층에 청년들 몇 명 모여 뭔가 의논한답시고 의견들 교환하는 모습. 고등학생들 모임이었으니 중학생이던 용익이 모습은 안 보인다. 엄연히 중학생, 고등학생이 구별되었는데 어떻게 용익이 눈에 내가 띄인 것일까. 모임이 아닌 그냥 담소하는 시간엔 어김 없이 용익이 얼굴이 보인다.
        12월 어느 날이었나보다. 평소 어떤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느냐는 용익이 질문에 인형이나  앨범(사진첩)이라고 말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빨간색의 두터운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학생에게서 받아 본 선물이다. 그 선물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건네 준 그 아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필요한 물건이니 아주 요긴하게 쓰다가 미국 올 때 친정에 남겨 두고 왔다.
        평상시,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의 호의에 관대하지 않던 불 같은 내 성질을 용익인 잘도 피해 가며 내 곁에 있었다. 겨울 방학 때 내가 속해 있던 육상부에서 부산으로 합숙을 떠났었다. 돌아오는 날 서울역에 마중나온 큰오빠(전자 메일을 보내온 조카 녀석의 돌아가신 아빠 다) 앞에 불숙 나타났던 용익이. 결국  1962년도 유행이던 시발 택시로 우리집까지 합승을 했던 모양이다. 집으로 데려간 기억은 없는데 우리집을 와 봤다니 그날인 듯 싶다.
        그 후엔 용익이가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내 교회 생활도 슬그머니 끝나고 언제 어떻게 연락이 끊겼는지 기억이  없다. 내가 대학입시에 실패한 그 때,  친구와 극장가던 길에 또 다시 불숙 나타났던 용익이가  던진 말. “거봐요. 자기두 그렇게 떨어지면서……”  그러게. 입학시혐에 실패하는 인간은 아주 형편 없는 인간이라고 없신여기기라도 했었나.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고입에 실패한 용익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모양이다.  극장가는 길인데 함께 가련? 고개 저으며 사라진 용익의 모습을 끝으로 이시간까지 소식을 모른채 지냈다.
        나이들며 한 두어 번 그녀석 생각이 났었다. 나이도 어린게 무엇하나 첫번으로 시선을 끌만한 아무것도 없던 나를 알아 보았던 그 안목. 신통하단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  그 때 중동 중학교에 재학을 하다가 고등학교는 어디를 응시했다 실패 했던것인지,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 알길이 없으니 찾을 길도 없었다.
        계속 내 얼굴에 번지는 이 행복한 미소는 무슨 의미일까. 내 인생에 어느 남학생 한 명 좇아온 역사가 없다고 한탄하던 일, 그 옛날 연하남의 시선을 받았었다는 놀라운 충족감, 그리곤 누군가 그 옛날의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풍선이 되어 나를 띄운다.
        몇 십년의 세월이 단칼에 베여 떨어져 나가고, 난 다시 여고 1년생이 되어 중학생인 용익에게 넌지시 한마디 하고 있다. “짜식, 까불지마. “


                                                                        2007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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