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로 데뷰하던날

2007.03.04 04:49

노기제 조회 수:572 추천:143

               선후배 만남의 잔치

        세상을 살면서 각종 단체에 소속되고 모임들을 갖게 된다. 취미가 다양한 내 경우엔 그 많은 단체에 다 소속될 수가 없다. 회원의 의무 이행에 무리가 오기 때문이다. 일년 치 회비도 만만치 않고, 매 모임 때마다 경비도 무시 못한다. 그러나 비켜 갈 수 없는 단체가 바로 동창회다.
        내가 영글던 세월들. 가장 어여쁜 시간들을 함께 했던 이들과의 재회를 비켜 간다면 인생의 소중한 한가지를 버리는 셈이다. 그 중에서도 철들기 전, 중 고교를 함께 다닌 동창 모임을 어찌 모른다 할까.
        어제는 바로 정월 대보름 전야. 때를 맞춰 70 이상 되신 선배님들과 47세 이하인 젊은 후배들을 위한 특별한 만남의 장이 마련 됐다. 새로 총동창회장이 된 우리 동기는 직책을 수락할 당시 동기들의 도움을 절대 조건으로 주장했던 터다. 동창회 안의 각종 특별 부서장을 모두 동기들에게 강제로 떠 안겼다. 새 동창회장이 동기가 되는 바람에 곁에 모인 동기들이 모두 피곤해 진 결과다.
        이번 대보름 잔치도 다른 어느 동창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모임이다. 발상 자체가 가상할 일이다. 연로하신 선배님들 대접하고, 웬만해선 모여지지 않는 젊은 후배들을 한 번 모아 보자는 따스한 마음이다. 비용 차출이 어디서 되었는지 알 순 없지만 그 흔한 참가 회비도 없이 진정으로 모시는, 대접하는 잔치가 된 것이다.
        고작 일 년에 한 번, 연말이 가까우면 행해지던 총동창회 파티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던 선배님들이 예상보다 많이 참석을 해 주셨다. 또 집중 공격한 결과 30대 새내기 후배들까지 동원 된 굉장한 잔치가 이루어 진 것이다. 예상 인원 50명이 90명을 훌쩍 넘어서 테이블과 음식에 약간 불편한 점이 있긴 했어도 모두들 파안대소 행복한 시간들을 만끽했다.
        사회자가 낭독한 축시에 잡힌 주제가 "우린 지금 열 일곱"이었다.
어제는 설레임에 잠 한숨 못 잤네 그려/까까머리 숨기며 단정하게 눌러 쓴 교모/빳빳하게 풀먹인 하얀 카라/우린 오늘 이렇게 열 일곱 꽃다운 모습으로/모여 있잖은가/고단한 삶을 진즉에 접고/아무리 애를 써도 닿지 못할 곳에 먼저 가버린 친구들/그들의 손을 잡지 못하고 우리만 모인 이 자리/그들 몫까지 우리 신명나게 한바탕 놀아 보세나/누군들 한번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 안 했겠나/그래도 눈물보다는 웃음이 쬐끔 더 많았던 까닭에/아니 눈물이 더 많았다 해도/우리 열 일곱 그 꿈 많던 때를 뒤돌아보며 내닫고/다시 한 번 돌아보며 또 내 닫고/뒷심 좋게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았겠나/이보게나 친구들,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그대가 품었던 흔치 않은 그 꿈은/이제 얼마나 이루어 냈는가/세상이 내 뜻대로 잘 따라주어/이루고 싶은 만큼 다 이루었다해도/내 양팔을 얹어 놓을 그대들 어깨가 없었다면/그 무슨 대단한 꿈을 이루었겠나/열 손가락 모자라 세고 또 세며 적어나가던 꿈 보따리/그중 한가지도 맞아떨어지지 않아/상심한 인생을 살았다해도/이제 그대들과 나란히 얼굴을 마주하니/이게 바로 성공한 내 인생이구려/아직도 가야 할 길 남아 있으니/이보게나 친구들 오늘 다시 열 일곱 그 때로 돌아가/손에 손 맞잡고 우리 다시 꿈을 꾸어보세/그 무엇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나/우리 모두 아름다운 열 일곱/우리의 새로운 꿈을 가지고 함께 가꾸어 보세나/천하 부 중고, 우린 열 일곱, 다시 열 일곱이라네.
        축시를 쓰고, 사회를 자청하고, 여흥 순서까지 맡아 하기로 쉽게 결정은 했지만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니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았다. 내 전문 분야도 아닌 시를 쓰는 일도 버겁고, 여흥을 진행한다는 일은 내 생애 한 번도 없던 일 아닌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이다. 겁도 없이 하겠다고 했으니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게임 진행 방법 배우고, 사회자로서 갖춰야 할 외모에 의상까지 빌리고 꾸미고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하면 된다고 믿었으니까. 전문 사회자를 모셔와도 별 수 없던 파티가 한 두 번이었나. 예산이 없다.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
        친구에게 부탁해서 대학 간 딸래미 프롬 파티 때 입었던 드레스를 빌리기로 했다. 이 아이, 저 아이가 입었던 드레스가 세 벌이나 된다. 골라 입을 수가 있다. 얼마나 감사한가. 색깔도 품도 길이도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 주신 듯 맞는다. 다음은 외모. 어찌하겠나. 원래 부모가 이렇게 낳으셨는걸. 이럴 땐 정말 이쁘고 싶다. 눈에 확 띠게 이뻣으면 좋겠다. 이제 와서 성형수술을 할 수도 없고. 평생 한 번쯤 써 보고 싶던 공갈 안경을 준비했다. 도수도 없는 그냥 유리알 안경이다. 숫 없는 머리 미장원에 가 봐야 그 모양이 그 모양이다. 몇 해전 준비한 가발로 대신한다. 평생 이쁘단 소리 한 번 못 듣고 살았지만 최선을 다해 꾸미고 싶었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자 모이는 동문들에게 드리는 나의 선물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지 않은가. 온 마음을 다 해 준비했으니 나머진 하늘에 맡겼다. 내가 뭐 하룻저녁에 스타가 되겠다는 욕심을 내는 게 아니다. 내 힘으로 행복을 짜내어 동문들에게 한 조각씩 안겨 주고 싶은 마음뿐이니 그런 소망쯤 하늘이 안 된다 하실 리 없다고 믿었다.
        꿈처럼 사랑스러운 시간이었다. 대접을 받는 선배님들, 젊은 후배님들, 또 대접하는 위치에 선 중간 기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불평 없이 행복해진 잔치마당 이었다. 무언가 얻고자 기대하지 않은 잔치. 더 높아지고자 욕심 없이 참가한 잔치.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우리끼리 마음 모아 삶에 지친 서로를 한 번 으스러지게 껴안아 준 아름다운 잔치마당 이었다.
        한껏 주고받은 사랑 때문에,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 동문들의 하루하루가 한 결 수월해 졌으리라 믿는다. 그 사랑의 힘으로 더 열심히 살다가 다음 잔치 땐, 한 층 열 일곱다운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이다.

                                2007년 3월 4일 오후12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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