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남자들

2007.03.31 08:32

노기제 조회 수:807 추천:119

   스키동호회에서의 여행이다. 자주 참석하지 않는 비협조적 회원인 내가 참여를 결정한 것은 여간해선 가기 힘든 캐나다 휘슬러 스키장인 때문이다. 낯선 회원들이 더 많은 탓에 매사에 긴장해야 될 것이 예상 되었지만 그게 우리네 삶이 아닌가. 새로 만나서 처음엔 좀 불편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또 다른 친구가 생기게 되는 축복의 기회로 만들면 된다.
   새로 취임한 회장이 마련한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장정 일곱에 나 혼자 여자다.다행히 아주 작고 아담한 공간이 독방으로 배당되었으니 감사함으로 시작 된 여행이다.
   어떤 운동을 하던 즐기는 차원에서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내 마음가짐이다. 특히 스키를 다니면, 타고 내려오는 시간은 짧고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은 길다. 즉 운동은 잠간하고 쉬는 시간이 긴 운동이니 특별히 더 쉬는 시간이 필요 없다. 점심도 될수록 간단하게, 화장실도 안가는 방향으로, 물 마시기나 간식은 리프트 타고 올라가는 동안 해결한다.
   이번 여행전까진 내 방식대로 함께 스키를 탄 사람이 없었다. 남편을 비롯해 어떤 일행이던지 그렇게 시간을 아끼며 억척스럽게 스키를 타는 나를 비정상적이라고 고개들을 젓곤 했으니 내 딴엔 장정 일곱이래야 얼마던지 따라 다닐 수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웬걸 이번엔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격이다. 새 회장과 동행 한사람, 두 분은 나흘 전부터 스키를 타고 있었으니 그 쯤되면 이미 피곤해 질 시기다. 그런데 아니다. 늦게 합류한 우리팀보다 더 팔팔하다.
   화창한 날에 밝게 웃어주는 태양이 처음 대면하는 휘슬러 스키장에서의 불안을 말끔히 걷어갔다. 광대한 광야를 연상케하는 확 트인 눈밭이 내 앞에 펼쳐지면서 가슴은 기쁨으로 요동하기 시작한다. 육천 피트, 칠천 피트를 올랐는데도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는 탓에 더 넓게 느껴진다.
   스키장의 디자인이 아주 잘 되어서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도 모글과 편만한 부분이 공존하므로 실력차가 있는 동행이라도 나란히 타고 내려 올 수 있으니 겁먹지 말라는 설명이다.
   순조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설경에 감탄하며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듯한 부드러운 모양새의 연이은 산봉우리들을 가슴으로 옮겨 온다. 맴모스 가는길의 시에라네바다 산맥보다 더 아름답다는 느낌이다. 여성적 곱상한 모습에 나긋나긋 부드러움을 내 비치는 매력에 잠깐 넋을 빼앗긴다. 산봉우리마다에 내려 앉은 태양은 다섯, 여섯, 일곱이나 된다. 자기만이 차지한 유일한 태양을 품은 까닭에 내 눈에 들어 온 일곱 개의 태양과 그가 품겨진 일곱의 산봉우리. 빛과 그늘이 만들어 낸 멋진 착시 현상이다.
   한 시간 쯤 지났을가. 감촉 좋게 쌓인 눈에 스키가 박히는 듯 하더니 순간 앞으로 엎어지며 얼굴이 눈밭에 박혔다. 그리곤 어디엔가 왼쪽 무릎이 심하게 부딪는다. 아아 아프다. 얼굴이 뭉글어 지는 듯한 통증에 이어 심하게 부어 오른 듯 감각이 둔해진다. 하나님, 이거 뭐에요? 가뜩이나 쌩쌩 잘 타는 남자들 따라다니기 힘든데 여기서 처지면 길도 모르고, 어쩌라구요?
   다행히 정신 가다듬고 고개 들어보니 한 사람이 기다려 준다. 고글에 꽉 찬 눈을 털고, 벗겨진 스키 찾아 신으며 먼저 가라고 보냈다. 마냥 기다리게 할 순 없다. 시간 아까운데 빨리 타고 싶어하는 심정을 내가 아니까. 그때부터 조금씩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지도도 잃어 버렸고, 어디에서 타고 또 그 다음은 어디로 이동 하는지 난 아는게 없다. 괜히 괜찮다고 가라고 했구나.
   이런 상황에 처할수록 당황하면 안 된다. 설마 그대로 이 눈산에서 미아가 되기야 할라구. 말이 통하는데 물어 물어 가보자. 겁이란 자꾸 떼어 버려야지 생기는대로 그냥 두면 박테리아처럼 곱절로 불어 난다.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뭐가 겁나는데?
   말로만 들었던 길고 긴 슬로프. 7KM, 8KM, 함께 탈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혼자 찾아 가는 길은 유난히도 길다. 역시 세계적으로 이름난 스키장이구나. 그래도 이런 스키장에 올 수 있었던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언제 다시 올런지 모르니 즐기자. 넘어져도, 혼자 타게 되도 기억에 남을 만큼 기쁜맘으로 최대한 즐기는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겁도 달아났다.
   한 참을 내려오니 낯 익은 색갈의 스키복들이 눈에 띈다. 아아, 찾았구나. 이젠 더 바짝 따라 다녀야 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때부터 두 팀으로 갈라졌다. 망우리 공동묘지를 사랑하는 팀과 아닌 팀이다. 모글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거다. 듣고 보니 무척 재미있는 표현이다. 마치 공동묘지모양 봉긋봉긋 솟은 모양이 딱 닮은 모글. 맞다. 난 공동묘지가 싫거든.
   Blackcomb Glacial. 리프트타고 올라가서, T-Bar로 갈아 타고 그도 모자라 스키 벗어 메고 한참을 오르막길 올라가서야 내려 올 수 있는 가장 높은곳이다. 과연 내가 타고 내려 올 수 있을가 잠간 주춤 했더니 "이번엔 독한 남자들 만나서 고생 좀 하시네요" 회장과 동행하신 처음 만난 분이다. 그러게요. 여지껏은 내가 정상이 아닌 줄 알고 스키를 탔는데 이제 보니 나도 지극히 정상적인 스키어네요. 무슨 남자들이 물도 안 마신다. 중간에 쉰다는 건 그들 사전엔 없다. 진짜 독한 남자들이다. 스키타기에 완전히 미친 남자들이다.
   두 팀이 되니 우린 세명이 함께 탄다. 실력들은 월등하지만 한 사람이 나 보다 먼저 넘어지면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졌다. 그런 동료를 위해 한 사람이 주치의를 자원했고 난 슬며시 간호사 자격으로 합세가 되어 안전하고 무리없이 스키를 즐기게 되었으니 이것도 내겐 축복이다. 그러나 그도 오래가지 않아 또 다른 재난이 내게 달려 왔다. 함께 모이기로 한 식당을 찾아 가는 길에 또 나 혼자 떨어졌다. 셋이 길을 잘 못들어 험한 오르막길을 가게 되자 내가 잘난척하고 내리막길로 빠져서 다른 리프트를 탄 것이다. 어찌어찌가면 안 될가 자신만만하게 샛길로 빠진거다. 감히 그 넓은 산을 얕보고 덤빈 격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물어 보니, 이 리프트로는 그 식당에 쉽게 갈수가 없다는 답이다. 그럼 난 어떡하라구? 만나기로 한 시간은 달음질 쳐 지나가고 물어 물어 오르고, 내리고, 기어 올라가고를 반복하며 드디어 식당에 도착했다. 나를 위해 걱정을 하거나 점심 안 먹고 기다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 계셨어요? 삼십분이나 기다렸다구요" 곱지 않은 볼멘 소리에 순간 남편 얼굴이 스친다. 역시 날 위해 걱정 해 주고, 밥 안 먹고 기다려 주고, 화장실 가서 열나절 있다 나와도 묵묵히 밖에서 기다려 주던 남자가 얼마나 고마운 남자인가 알게 된거다. 변명과 사과를 하지 않고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남자. 그 남자 외에는 아무도 내게 고운 기다림을 해 줄 사람은 없다는 현실이다.
   그렇게 다져진 마음으로 준비 되었더니 또 다른 환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두팀이 다 모여서 숙소로 돌아 오려는 시점에, 이왕 모였으니 우리 다 함께 딱 한 번만 더 타자는 제안에 겁도 없이 합세를 했다. 나랑 타던  분들은 고개 저으며 숙소로 돌아 가고 달랑 나 혼자 공동묘지 사랑하는 팀에 합류하면서 이번엔 공동묘지로 내려오지 말고 내 실력에 맞는 길로 내려오는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따라갔다.
   분명히 의사 소통은 그렇게 했는데, 막상 리프트에서 내려 앞서 간 사람들 따라 첫 발을 옮기니 얼렐레, 이거 공동묘지 아냐? 앞으로 내 딛지도, 뒤로 돌아서지도 못하게 된거다. 벌써 저 아래로 달려간 사람들 옷 색갈을 번갈아 내려다 본다. 빨강, 노랑, 연두.......세상에 누굴 믿고 따라 나선 거였나. 그렇게 철통 같이 다짐에 다짐을 하고 따라 나섰는데. 이게 무슨 인심이람?  어린애들 스키 첨 가르칠 때 담력 길러 줄 요량으로 꼭대기까지 데리고 가서 팽개치고 내려 간다더니 내가 바로 그 꼴이다.
   인간성 알아 봤다. 다시는 같이 안 논다. 별별 푸념을 다 늘어 놔도 아무 소용이 없잖은가. 그렇다. 내겐 든든한 빽이 있다.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 예수님이 곁에서 함께 내려 가면 된다. 공동묘지 아니라 더 한 곳에서라도 난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 긴 슬로프를 예수님과 함께 아무 사고 없이 내려 왔다. 시간은 엄청 걸렸지만 흐믓한 사건이다. 그래봤자 마음 편한 쪽은 나다. 아무렴 걱정들 안 하겠나. 무사히 숙소를 찾았다. 아직 스키도 벗지 않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파안대소하며 받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스키 보관함에 들러 스키를 두고, 이층 방으로 들어 서는데 또 전화가 울린다. 방문 여는 소리에 방안에선 다급하게 누구세요? 를 묻고, 내 전화기는 계속 울어 대고......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시간이다. 독한 남자들과의 게임에서 일방적으로 완전히 패한 것은 아니다.
   사색이 되어 원망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멀쩡하게 배실배실 웃는 얼굴로 들어서는 내게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회장. 뭐가 그리 죄송하단 걸가. 듣고 보니 의사 전달이 잘못 되었다는 거다. 함께 타지만 실력대로 옆길 편편한 대로 오시고 자기들은 공동묘지로 타겠다는 뜻이었단다. 그렇담 그건 함께 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익숙하지 않은 낯선 슬로프를 혼자 내려 올거라면 마감할 시간에 무슨 이유로 따라 나섰겠나. 나란히 함께 타고 싶은 마음 때문에 피곤한 끝시간에 선듯 따라 나섰던 거였는데. 함께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 못하는 독한 남자들은 한국 떠난지 오래인 탓에 어휘력이 부족한 남자들로 이해하기로 했다.
   공동묘지 홀로 타기를 이뤄 낸 역사적인 스키여행이기도 한 이번 휘슬러 스키여행은 여러가지로 다른 종류의 기쁨을 맛본 셈이다. 새로 만난 사람들의 새로운 성격들을 대하면서 나 자신의 어떠한 면을 이해하는 방법도 다 제 각각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 내가 뜻하는 대로 나를 받아 주는 사람은 없을수도 있다란 사실이 놀랍다. 결국 나 그대로를 아무 토씨 안 달고 인정해 줄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해 받으려 생각 말자. 당연히 나 그대로를 알아 줄거라고도 기대하지 말자. 내가 원하는 만큼 그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려 생각하면 훨신 편하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도 깨달은 값진 여행이었다.



3월 31일 4:15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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