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아이, 그의 고민

2007.04.09 03:12

노기제 조회 수:644 추천:121

040407                        어여쁜 아이, 그의 고민

        요즘 아이들은 결혼 적령기가 따로 없다. 결혼이란 걸 꼭 해야 된다는 생각도 없는 듯이 보인다. 우연하게 내게로 다가온 아이가 있다. 제 계절이 되면 아무 소식도 없이 예쁜 꽃이 피어나듯 그렇게 슬며시 내 곁으로 와 준 어여쁜 아이. 그냥 내 아이로 하고 싶은 고운 아이다.
        방금 봉우리 탁 터트리고 꽃 피우려는 이십대 초반, 한창 공부할 시기에 그 테두리를 뛰쳐나와 군대로 방향을 잡아 본 아이. 대학에 입학을 해 보니 뚜렷한 장래가 보이지 않아 공부를 접고 입대를 했다고 한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란다. 혹시, 여자 문제로 방황을 했다던가 뭐 그런 이유 말이다. 입대하면서 한국으로 발령 나기를 청했지만 이뤄지지 않고 온전히 미국 땅에서 군대생활을 했단다.
        군대 들어가기 전, 식당 주방에서 접시 닦는 일, 자동차 타이어 파는 데서 막일 도우미로, 웨이터 등등 많은 종류의 일을 했다고 한다. 부모가 계신 가정에서 왜 혼자 나와 그런 고생을 자처했는지는 묻지 않아서 모른다. 그러다 군대로 가고, 한국으로 가려던 뜻이 막혔지만, 운명이라 생각하고, 제대할 땐 야무지게 전문직 면허까지 챙겨 나왔다.
        미국 군대가 여러 가지 좋은 혜택이 많지만 자신이 노력해서 쟁취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곳이다. 공부도 할 수 있고, 기술도 배울 수 있고,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다. 허나 그 모든 게 자기 할 나름이다. Pharmacy  Technician 이라면 약국에서 약사 보조로 괜찮은 봉급의 전문 직종이다. 일단은 인생 첫발을 잘 내 딛은 셈이다. 그렇게 살아도 순조롭게 살 수 있는 삶인데, 그렇게 다섯 해를 열심히 살아보니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나 보다. 객관적으로 좋은 직장 사직하고, 진짜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계획하고 실천에 들어간다.
        다시 시작하는 셈이다. 우선 가까운 시립대학에 들어가 필요한 과목을 이수한 후 4년 제 대학으로 편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열심히 해 보겠지만, 역부족으로 이룰 수 없을 시는 약사로 양보한다. 나이 스물 여덟에 스무 살에 했어야 할 대학생활을 시작하며 대단한 각오를 하는 모습이 많이 이쁘다.
        그 동안 의젓한 사회인으로 살던 습관들이 공부하는 데 지장을 주기도 한다. 계절 따라 여행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밥집, 술집 등을 밤늦도록
헤집고 다니기도 했던 생활들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모두 직장 다니는 사회인들이니 늦게 공부 시작하는 친구의 상황을 심각하게 도와 줄 사람은 없을 거다. 얼마나 힘들는지 상상이 된다. 게다가 혼자 사는 것도 아닌, 사회 친구들과 함께 기거하며 혼자만 학생이 되었으니 같이 놀고 싶고, 늦도록 잠자고 싶은 그 심정 어찌 모르겠나.
        그런 시기 다 지내고 이젠 원하는 대로 시간 쓰는 내 입장에선 이해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세월이 빨리 지날 것이니 잠깐만 참으면 별 것 아니라고 말해 주지만 스물 여덟 힘이 넘치는 나이에 겪어야 할 일이니 뭐라 위로할 말이 없다. 친구들은 다 졸업하고, 번듯하게 직장생활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는데 난 이제 시작이니 하며 고개를 떨군다.
        그럴 줄 모르고 인생 항로를 바꿨느냐고 다그친다면 상처를 주는 뻔한 질문이다. 인생 팔십으로 잡으면 아직 갈 길이 먼데, 오 년 정도야 나중엔 점 하나의 공간도 안 되는 것이니 목표를 향해 정진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도움이 안 될 터니 침묵한다. 화창한 봄날, 어쩌다 맞은 황금 시간, 일주일의 방학이지만, 시즌 막판 스키여행을 간다느니, 다같이 뭉쳐 한탕 진하게 마시자는 친구들의 유혹이 얄궂기만 할 것이다. 어쩜 구름 끼고 비오는 궂은 날이 견디기엔 좀 수월하겠다.
        어렵게 견딘 세월이 나중엔 더 귀한 추억이 될 거라고 말해주면 작으나마 위로가 될까. 여행이나 모임이나 경제적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능력을 감추고 귀 막은 채 도서관으로 향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서 옛날부터 어른들은 공부도 다 때가 있으니 할 때 열심히 하라고 그리도 성화를 대셨던가보다.
        입장이 다른 상황에서 섣불리 입을 떼고 위로를 해도 별 도움이 될 수 없다. 걱정해주는 마음 보이려고 나도 같이 학교에 등록을 한다. 물론 머리 싸매고 들이 파야하는 공부는 택할 수 없다. 능력도 체력도 따라 주지 않는다.  학교에 가고 오는 재미없는 반복 행위가 혼자서만 하는 일이 아니어서 할만하다고 느끼게 하고 싶다. 중간고사, 학기말고사, 시험 때가 되면 똑같이 좋아하는 일 포기하고 시험준비에 시간을 보낸다. 좋은 성적 받으려고 무진 애를 쓴 사실도 얘기해준다.
        자기가 원하는 풍요로운 삶을 새로 디자인하고 실천하는데, 나이가 상관없다. 안정이 보장된 채, 편한 생활, 취미 생활 등을 잠깐 포기하는 용기도 값진 아름다움이란 걸 이 아이는 잘 안다. 그래도 순간마다 들이대는 화려한 유혹에 잠시 고민하는 모습이 너무도 어여쁜 아이. 이 아이의 새 삶이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 할당 된 내 몫을 곁에서 감당하고 싶다. 어여쁜 아이가 내게 허락한 나만이 누릴 행복이다.                            0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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