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꺼내 보이는 삶

2005.12.19 04:01

노기제 조회 수:776 추천:137

121905                사랑을 꺼내 보이는 삶
                                                                노 기제
        작은 꾸러미를 받았다. 누가 보냈나? 무얼까?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 더구나 한국에서 왔다. 주소를 보니 영어로 표기가 되어 얼른 읽혀지질 않는다. 그냥 풀렀다. 탁상용 달력이다. 언듯 보아선 달력이란 감이 오질 않는다. 왼쪽 작은 쪽들은 모여 앉아 무언가 소곤소곤 귀를 간지른다. 오른쪽 조금 큰 쪽들은 의젓하게 서른이 넘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1월 임을 알린다. 그렇게 양쪽으로 갈라져 각각 열 두장을 묶고 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우리 인생들은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 따뜻하게 살 수 있다며 조용조용 말하는 왼쪽 예쁜이들은 고도원의 아침편지 모음이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도 있다. 어떻게 나누며 살아야 할가도 말한다.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엔 그렇게 살고 있는 친구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의왕시 가정폭력 상담소 소장인 영수가 보낸거다.
        순간 부끄럼이 화악 온몸을 덮는다. 너덜너덜 걸친 나의 누더기가 너무 무겁다. 나의 안일한 생활이, 내가 추구하는 오락이, 의욕 잃고 추욱 쳐진 나의 사지육신이 숨통을 조인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화들짝 나를 깨우는 이름 석자 최 영수. 여고 동창생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나 졸업후에도 전혀 교감의 전해짐이 없던 이름이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반을 안 해본 동창들은 낯설기 마련이다. 480명이나 되는 동기동창들을 다 기억할 순 없다. 영수와 나도 그랬다. 맨 처음 내 문학서재에 들러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준 영수를 접하곤 시카고에 사는 중학교 동창인 최영수로 착각 했었다. 난 미국에 한번도 안 가봤는데 라는 댓글에 황당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런 나의 무심함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내 글을 읽어 주고 독후감을 올리고 글짓는 나를 응원해 주는 귀한 독자다.
        경기도 의왕시. 안양 근처다. 그곳에서 자신의 시간, 재물, 열정을 고스란히 쏟아 붓고 있는 따뜻한 친구 영수. 자기 몸도 아주 건강한 상태는 아닌 듯 한데 하루 온종일을 매맞고 햑대받는 여성들을 위해 전화 상담도 하고, 만나서 상담도 해 주며 자기 속에 있는 사랑을 꺼내 준다. 그 여성들에겐 딸린 자녀들이 있다. 학대 받아 혼자 울고 돌아서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 자녀들까지 보듬지 않는다면 곧장 사회에서 낙오되는 문제아들이 생긴다.
        혼자 힘으로 무슨 수로 상담소를 운영 할까. 남편이 돕고 자식들이 돕고 또한 뜻을 같이하는 봉사자들이 돕고 이젠 제법 허우대가 멀쩡하니 근사하게 자란 청년의 모습인가 보다. 그럴수록 상담소를 찾는 피해자들은 늘어만 간다. 사회의 가장 기초가 되는 가정을 지키도록 미리 가해자가 될법한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일이 절실하다.
        후 대비책과 전 예비책이 어찌 이 작은 여인의 힘으로 이뤄질 수 있겠는가. 재정을 위해 모금 운동을 할라치면 국밥을 팔기도 하고 밑반찬을 스스로 만들어 사례하기도 하면서 자기 한 몸 탈진상태로 몰고가기 일수인 친구. 그 국밥 몇 그릇 팔아 줬다고 인삼캔디 봉다리 안겨주는 친구 앞에 한 없이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내게 또 꼼짝 못하게 상담소 이름이 빛나는 예쁜 달력을 보내왔다. 난 어떻게 살고 있나? 달력이 말하는대로 살아보자.
        여기저기 연말 파티가 시끄럽다. 나도 벌써 두곳이나 다녀왔다. 파티 참석하고 돌아오는 내 모습에 씁쓸함이 번진다. 내 속엔 무엇이 들어 있나. 영수가 잘도 꺼내는 그 고운 사랑이 내 속엔 없단 말인가. 꺼낼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꺼내는 작업이 겁나는 모양이다.  나를 감싼 누더기를 벗기가 싫은거다. 안일함, 편안함, 나태함, 하나씩 털고 일어서자. 영수를 돕고 싶다.
        오늘 아침 서울은 40년 만에 몰아친 추위가 영하 14도를 기록했단다. 머물곳 없는 무숙자들이 어떻게 견딜까. 따끈한 국밥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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