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앞을 모른다더니

2006.06.19 05:38

노기제 조회 수:789 추천:113

2006,06/19                        한치 앞을 모른다더니
                                                                        노 기제
        월드컵 축구의 열기가 한창 뜨거운 유월 셋째 일요일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경기가 낮 열 두시부터 중계를 시작했다. 가슴이 떨려서 중계되는 게임을 지켜 볼 수도 없다. 아예 밖으로 나가자. 산타모니카 비치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나  타자. 바닷바람 맞으며 땀 좀 흘리고 싶다. 승패에 매달려 마음 졸이는 게 내겐 버겁다.
        일요일 정오니까  프리웨이도 한가하겠지. 과일과 선식으로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고 집을나서니 생각 밖으로 길이 막혔다. 프리웨이로 진입하는 길이 벌써 막힌 상태이면 프리웨인 또 어떻겠나.  방향을 바꿔 딴 길로 가려고 돌아서고 보니 신호등이 바뀌면서 그런대로 차가 빠지는 듯 하다.  다시 차를 돌려 그 길로 그냥 갔다.  그런데 프리웨이에 들어서고 보니 완전히 정지 상태를 방불하게 막혔다.  
이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네. 차라리 곁길로 다시 빠질까.
        거기까지만 생각이 난다. 그 담엔 왜 내 차가 지그재그를 시작했는지. 저 많은 차들을 다 이리 저리 치고 갈 것만 같다. 사람이 많이 다치겠구나. 왜 이러나. 큰일이네. 그러다 갑자기 프리웨이가 훤하다. 그 많던 차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내 차 혼자서 속도를 내며 지그재그를 계속한다.  앞에 차가 한 대 보인다. 비켜라. 내가 너를 박을 것 같은데 빨리 비키지 뭐하니. 어머. 중앙 분리대가 있구나. 저걸 박으면 차가 박살이 날 텐데. 그래도 미친 듯 지그재깅하는 내 차가  멈출 순 있겠구나. 아무리 핸들을 이리 저리 돌려도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아예 놓아 버리자.
        네번째 레인에서 첫번째 레인까지 정신 없이 지그재그로 달리더니 급기야 시멘트로 된 단단한 중앙 분리대를 박기는 박은 모양이다. 두번째 세번째 레인을 비스듬한 자세로 차지하고 차가 섰다. 내가 잠간 정신이  나갔었나보다. 손에 감긴 물체를 털어 내니 에어백이다. 아하 이게 바로 에어백이로구나. 뭐 별 볼일 없네. 그리 크지도 않구나.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엔진 쪽에서 연기가 난다. 이크 불나기 전에 내려야 겠구나. 서둘러 벨트를 풀고 나오니 햇볕이 뜨겁다. 눈이 부시다.  내 차에게 얻어 맞은 중앙 분리대는 상처 한 군데도 없다. 그럼 안 박았나? 그곳에 가만히 등을 대고 쪼그리고 앉는다. 차는 어떻게 섰을까.
    움직일 적마다 가슴이 아파서 천천히 도둑고양이 몸짓을 해야 한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오른쪽 손바닥으로 가만히 눌러 준다. 숨이 막힐 듯 고통이 엄습해 온다. 왼쪽 귀 밑에서 어깨까지 움직일 수 없게 아프다.  왼쪽 손은 무섭게 부어 있다. 손등이 울퉁불퉁 벌써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손목 뼈가 부러졌나?  난 어떻게 되는걸까.  눈부시게 하얀 햇살이 모른척 평화롭게 쏟아진다. 이 넓은 길바닥에 홀로 쪼그리고 앉은 내 모습이 혹여 하늘이 쫓아낸, 곧 숨이 끊어질 인생은 아닐까. 차 쪽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바닥에 뿌려진 유리조각들이 반짝반짝  천진스레 웃는다. 툭 불거져 나와 대롱대롱 매달린 내 차의 눈들이 나를 외면한다.
그냥 집에서 뜨개질이나 하고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성경공부나 계속 더 할걸. 그랬더라면 널 이지경으로 만들진 않았을 텐데.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뒤쪽 오른편이  무섭게 찌그러진 듯 보이는구나. 지금이라도 다시 네게 올라 타고 산타모니카 비치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두 될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안될까. 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어쩌면 좋으니.
    누군가 내게 말을 부친다. 괜찮니? 가슴을 웅켜쥐고 대답을 못하는 내 눈을 맞추며 내 가슴에 손을 얹어 준다.  그래도 말을 할 수가 없다. 소리가 안 나온다.  뒤 이어 다른 사람이 가까이 보인다. 전화를 거는 모양이다. 또 다른 사람이 달려온다. 역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다. 내 곁에 앉아 준 여자는 계속 나를 달래고 있다. 괜찮을 거니까 안심하란다.  곁에 섰던 남자가 얼른 내 차에서 햇빛가리게를 꺼내다 내 등에 받혀주며 허리를 펴 보란다. 푹신하니 접힌 쿠숀이 등에 닿으며 안정감이 느껴진다. 고맙다고 눈짓을 보냈다.
내 차 앞 쪽으로 정차한 운전자는 차가운 물 한 병을 내게 권한다. 머뭇거리며 천천히 받아 마셨다. 한 병을 다 마셨다. 이어 커다란 컵에 얼음물을 한 가득 채워 가져다 준다. 고마워서 살짝 웃어주고 마셨다. 갈증은 해소 되었지만 성의가 고마워서 또 마셨다. 혹시 내가 치고 지나간 그 차가 아닐까. 물어보고 싶은데 여전히 소리를 낼 수가 없다. 고개만 끄덕여 감사함을 표시한다.  키가 훤칠한, 베트남 사람 처럼 보이는 젊은이다.
내 가슴에 손을 얹어 주고 위로하는 여자는 멕시코 사람인 듯하다. 그와 동행한 남자도 열심히 전화를 걸더니 드디어 불자통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뉴스시간에 화면에서나 보던 장면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 앰불런스에 실린다. 집에서 나와 프리웨이에 내 차를 버려 두고 빨간차에 실리기까지 삽십분도 안 걸렸다. 내 인생의 길이에서 이 삽십분은 한 치도 안 되는 앞 날이었다.
내게 다가왔던 서너명의 천사들에게 인사 한 마디 제대로 못한 것이 안타깝다. 나도 그들처럼 천사가 되어 남은 생을 꾸며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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